[242호 인문학술 : 민족주의의 잔재 혹은 계승]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와 라틴아메리카 국민주의

격동의 20세기를 지내며 각 국가, 혹은 공동체들은 스스로의 정당화 수단으로 민족주의를 앞다투어 내세웠다. 저마다 처한 상황과 역사적 맥락에 따라 형성된 각각의 민족주의들은 세계화라는 거대한 가치에 밀려 점차 구식의 담론이 되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민족주의는 사라졌다 말할 수 없으며, 과거의 모습은 온전하게 혹은 변용된 모습으로 자리잡고 있다. 본지 인문학술 <민족주의의 잔재 혹은 계승> 시리즈의 두번째 지역은 라틴아메리카다. 식민지에서 독립한 각 국가들이 뿌리깊게 내재되어 있는 인종적·계층적 차이를 뛰어넘고 국민/국가라는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 살펴보자.

네이션이란 무엇인가? : 네이션을 바라보는 두 가지 관점

내셔널리즘(nationalism, 민족주의 혹은 국민주의)이라는 용어는 19세기에 발간된 대부분의 사전에 실려 있지 않았다. 내셔널리즘이라는 말이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이었고, 내셔널리즘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가 시작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내셔널리즘이 국제적 이슈로 등장한 것은 유럽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새로운 국가 건설의 이념으로 내셔널리즘을 내세웠기 때문이다. 내셔널리즘 연구에서 획기적인 전환이 이루어진 시기는 1980년대였는데, 특히 1983년은 이정표가 될만한 해였다. 내셔널리즘 연구의 시금석으로 인 정받는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의 『상상된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과 테렌스 레인저(Terence Ranger)가 편집한 『만들어진 전통(The Invention of Tradition)』, 어니스트 겔너(Ernest Gellner)의 『네이션과 내셔널리즘(Nation and Nationalism)』이 동시에 출간되었기 때문이다.

네이션(nation, 민족 혹은 국민)을 바라보는 관점은 크게 원초주의(primordialism)와 근대주의(modernism)로 나뉜다. 원초주의는 네이션을 공통의 혈통, 언어, 관습, 종교, 영토 등을 공유하는 공동체로 인식하는 반면에, 근대주의는 네이션을 근대의 정치적 산물로 규정한다. 원초주의가 네이션의 혈연적·문화적 요소를 강조한다면, 근대주의는 계약적·정치적 요소에 중점을 둔다. 원초주의가 네이션의 뿌리를 혈연적·문화적 요소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네이션은 종족 (ethnie)에 가깝고, 근대주의가 계약적·정치적 요소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네이션은 국민에 가깝다. 원초주의가 네이션을 항상-이미 존재해온 시원(始原)적이고 불변적인 것으로 전제한다면, 근대주의는 네이션을 문화적 단위와 정치적 단위가 일치하는 사태로 규정한다. 근대주의자인 겔너는 내셔널리즘을 네이션이라는 문화적 단위와 국가라는 정치적 단위가 일치해야 한다는 정치적 원리로 규정했고, 홉스봄은 국가와 관련되지 않는 네이션은 의미가 없다고 단언했다. 이런 맥락에서 원초주의가 ‘인간은 어떻게 공동체를 구성하는가(how peoples unite themselves)’라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라면, 근대주의는 ‘국가는 어떻게 네이션을 만들어내는가(how states invent nations)’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일반적으로 민족, 민족주의로 번역되는 네이션, 내셔널리즘이라는 용어가 혈연적·문화적 공동체로서의 종족(ethnicity)이라는 의미와 계약적·정치적 공동체로서의 국민(nationality)이라는 의미의 중간적인 의미를 갖는 것은 이 때문이다. 네이션과 내셔널리즘이 규정하기 어려운 개념인 것도 종족의 문화적 요소와 국민의 정치적 요소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이후 네이션과 내셔널리즘 연구에서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것은 근대주의이다. 내셔널리즘의 기원을 프랑스 혁명 이후로 규정하는 근대주의는 네이션에서 내셔널리즘이 생겨난 것이 아니라, 내셔널리즘이 네이션을 만들어낸 것이라 고 보았다. 즉 이탈리아 건국운동에 앞장섰던 다첼리오(Massimo D’Azeglio)가 “이탈리아를 만들었다. 이제 이탈리아인을 만들 차례이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근대주의는 내셔널리즘을 네이션의 자율성과 통합, 정체성을 추구하는 국가의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정의했다. 다시 말해, 근대주의의 관점에서 민족국가(nation-state)는 네이션과 국가라는 서로 이질적인 것의 결합이다. 근대주의가 네이션을 근대의 산물로 보는 것은 근대에 들어와 비로소 가능했던 세 개의 혁명을 통해 자본=네이션=국가라는 결합체가 출현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혁명은 자본주의라는 경제적 차원의 혁명이었다. 자본주의는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자신의 의지로부터 독립된 일정한 필연적인 생산관계로 끌어들였다. 두 번째 혁명은 절대주의 왕권국가로 상징되는 정치적 혁명이었다. 절대주의 왕권국가는 화폐경제를 토대로 관료와 상비군을 만들었고, 이를 통해 역사적으로 전례가 없는 강력한 집권적 국가가 되었으며, 절대왕은 단일한 인격을 지닌 주권자(sovereign)가 되었다. 세 번째 혁명은 문화·교육혁명이었다. 주권자인 절대왕은 문화·교육혁명을 통해 개인을 절대적인 주권자에 복종하는 신민(臣民)으로 만들었고, 이후에 절대주의 왕권국가의 신민은 시민혁명을 통해 주권을 갖는 시민이 되었다. 요약하자면, 세가지 혁명이 중첩된 변화의 매트릭스를 통해 출현한 근대 국가는 자본=네이션=국가라는 삼위일체의 결합체이다. 서구 유럽이 근대에 들어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중심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절대주의 왕권 국가가 독특하게 융합되었기 때문이다.

민족(국민)국가의 종언? : 자본=네이션=국가의 결합체로서의 근대적 사회구성체

그렇다면, 1980년대에 내셔널리즘 연구가 활짝 꽃피운 이유가 무엇일까? 홉스봄은 『1780년 이후의 네이션과 내셔널리 즘—프로그램, 신화, 리얼리티(Nations and Nationalism since 1780: Programme, Myth, Reality)』(1990)에서 1980년 초반에 네이션과 내셔널리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진 것은, 황혼녘이 되어서야 비로소 날개를 펴는 미네르바의 부엉이처럼, 네이션이라는 관념과 내셔널리즘 운동이 황혼기 를 맞이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20세기 내내 근대 세계를 구성한 가장 중요한 분할선이었던 민족국가가 종언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독립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새로운 국가 건설의 논리로 내세운 민족주의는 전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중심부의 관점 에서 다루어지고 분석되었기 때문에 세계체제 주변부 국가들의 민족 문제와 민족주의 운동은 근대화로 향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과도기적 현상쯤으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민족국가의 종언에 대한 예견은 빗나갔다. 현실 사회주의 블록 붕괴 이 후 동유럽 지역에서 새로운 민족국가들이 탄생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민족주의가 더 강화되고 민족 문제가 국제적 이슈로 등장했다. 앤서니 스미스(Anthony D. Smith)의 말을 빌리면,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국제정치적 위기 가운 데 종족적 감정이나 민족주의적 열망과 관련되지 않은 것은 거의 없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소멸이 예견되었던 민족주의와 민족 문제가 사라지지 않고 민족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에 민족국가가 소멸될 것이라는 주장은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도래했다는 주장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도래로 국가는 시장에 주권을 넘겨주었고, 금융자본주의 체제를 통해 중심-주변이 물질적으 로 수렴되고 있으며, 새로운 정보기술과 대규모 이주는 문화 간 접근과 대화를 용이하게 만들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세계화의 진행으로 ‘민족’과 ‘국가’는 더이상 일치하지 않으며, 세계는 민족국가의 경계선을 넘어서서 탈국가적이고 초국가적 블록으로 재편되고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현재 온 인류가 겪고 있는 코로나19의 세계적 대유행은, 앤더슨이 『상 상된 공동체』에서 단언한 것처럼 “그렇게 오랫동안 예언된 내셔널리즘의 종말은 요원하고, 네이션-됨(nation-ness)이 우리시대 정치생활에 가장 보편적이고 정당한 가치”라는 사실 을 새롭게 환기시켜 주고 있다. 바이러스에는 국경이 없어도 바이러스 대응에는 국경이 있다는 사실 앞에서 초국가적 공동 체의 이상이 맥없이 무너지고 있다. 그렇다고 취약성과 부정 적 얼굴을 드러낸 세계화에 대한 해결책이 반세계화적 국가주의로 귀결되는 것도 아니다. 국경 차단은 세계가 서로 얽혀 있다는 반증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세계화냐 국가주의냐는 배타적 이분법의 논리가 아니라, 근대 국가를 자본=네이션=국가 가 보로메오의 매듭처럼 결합되어있는 사회구성체로 인식하는 것이다.1)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이 『세계사의 구조』에서 설파하고 있는 것처럼,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민족국가가 사라지지 않 고 민족 문제가 여전히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는 이유는 자본=네이션=국가가 각각 다른 교환 원리로 작동하고, 이 때문에 어느 하나에 의해 다른 것이 소멸되거나 수렴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어느 것 하나라도 없으면 다른 것도 성립하지 않는 보로메오 매듭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근대적 사회구성체를 생산양식으로 파악한 마르크스는 자본제 경제를 물질적 하부 구조로, 네이션과 국가를 관념적 상부구조로 간주했고, 자본제가 폐기되면 국가나 네이션은 자연스럽게 소멸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예상과 달리, 한편에서는 국가사회주의(스탈린주의)가 출현했고, 다른 한편에서는 내셔널 사회주의(파시즘)가 등장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는 실패했다. 자본=네이션=국가는 각기 다른 교환양식에 뿌리를 두는데, 네이션의 교환 양식은 증여-답례이고, 국가의 교환양식은 약탈-재분배(혹은 지배-보호)이며, 자본의 교환양식은 화폐-상 품이다.2) 네이션은 자본=국가에 의해 만들어졌지만, 그저 자본=국가의 수동적 산물이 아니다. 네이션은 노동력이나 경제적 이익이라는 차원만으로 환원될 수 없는 연대의 감정이다. 이러한 연대의 감정은 가족이나 부족공동체 안의 사랑과는 다른, 오히려 그와 같은 관계로부터 벗어난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감정의 교환이라는 점에서 ‘상상된 공동체’의 회복을 의미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의 말을 빌리면, 네이션은 “각 국민에 보편화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실질적인 불평등과 수탈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심오한 수평적 동료의식(fraternity)”을 바탕으로 구성되는 ‘상상된 공동체’이다.

▲ (그림 2) 라틴아메리카의 인종 5각형. 혼혈에 의한 17세기 남아메리카의 인종 분류가 상상을 뛰어넘을 만큼 엄청나게 많은 범주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5종류로 나타난다.
ⓒ필자제공

라틴아메리카 국민 만들기의 역사와 미완의 상상된 공동체

약 300년 동안의 식민 시기를 거치고 19세기 초 대륙 전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된 독립운동 이후 라틴아메리카 역사는 네이션을 만들고, 네이션과 국가를 결합시키기 위한 역사였다. 내셔널리즘의 관점에서 라틴아메리카 독립은 지극히 불완전한 것이었고, 식민 시기부터 쌓여온 복합적인 모순과 갈등이 한꺼번에 드러나는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의 전환을 통해 국민국가를 만드는 출발점이었다. 독립을 주도했던 크리올 엘리트 과두 지배 계층은 유럽의 공화제와 자유무역주의를 받 아들였지만 이것은 라틴아메리카 현실과는 무관한 것이었다.3) 단적으로, 19세기 후반부터 사용되기 시작한 ‘라틴’아메리카는 아메리카 남쪽에 남부-가톨릭-라틴 유럽 문명을 복원하고, 동시에 이곳에 살았던 원주민과 아프리카에서 노예로 끌려 온 흑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표명하려는 의도에서 선택된 이름이었다. 자신들이 스페인 사람이면서 동시에 라틴 아메리카 사람이라는 ‘이중 의식’(double consciousness)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크리올 엘리트 과두 지배 계층은 유럽을 인종적으로 의식하기보다는 지정학적으로 의식했지만, 메스티소, 원주민, 흑인에 대한 의식은 인종적이었다. 단적으로 말하면, 독립 이후 라틴아메리카 역사는 크리올 엘리트 과두 지배 계층이 다양한 방식으로 유럽이 성취한 근대성과 하나가 되려고 시도하는 동안 메스티소(혼혈인), 원주민, 흑인은 더 가난해지고 더 주변화된 역사이다. 수입된 이론으로 현실을 재단하는 모순된 상황은 라틴아메리카를 ‘내적 식민주의’ (internal colonialism)로 몰고 갔으며 이러한 상황은 19세기 내내 지속되었다.

20세기 초반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외적으로는 본격적으로 세계경제 질서에 편입되기 시작했고, 내적으로는 전통적인 과두 지배 권력에 저항하는 사회운동이 발생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국민 만들기’(nationbuilding)는 신생 부르주아지, 노동자, 농민, 그리고 계급으로 규정할 수 없는 다양한 사회계층을 아우르는 민중국민주의(popular nationalism) 노선을 표방했다.4)

민중국민주의를 주도한 사람들은 헤게모니 집단에서 배제된 엘리트였으며, 민중국민주의는 전통적인 과두 지배계급으로부터 상대적인 자율성을 갖게된 국가가 신생 엘리트 산업 부르주아를 포함한 주민 다수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국민주의를 내세워 국내 시장을 육성하려는 헤게모니 정치 프로젝트였다. 요약하자면, 민중국민주의는 자본주의 계급과 구조적인 인종주의를 아울러 국민을 만들려는 시도였다.5) 대표적인 경우로 멕시코의 포괄적 형태의 민중국민주의인 메스티소 국민주의(mestizo nationalism)와 아르헨티나의 제한적 형태의 포퓰리즘 민중국민주의를 들 수 있다. 메스티소 국민주의는 원초주의의 관점에서 네이션의 뿌리를 종족-문화적 서사 (ethno-cultural narrative)에서 찾았다. 메스티소 국민주의는 종족-인종적으로 다양한 멕시코의 사회적·문화적 모순과 갈등을 봉합하는 데 매우 유용한 도구였다. 메스티소 국민주의와 유사한 예는 브라질의 ‘인종 민주주의’(racial democracy)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메스티소 국민주의는 식민 시기부터 폭력적 억압과 이에 대한 저항의 연속이었던 멕시코의 역사를 망각하고 새로운 국민을 만들기 위한 이데올로기였다. 메스티소 국민주의는 스페인 정복 이전의 원주민 문명을 찬양했고, 멕시코 혁명에서 패배했던 농민 지도자 에밀리아노 사타파 (Emiliano Zapata)와 판초 비야(Pancho Villa)는 국립묘지에 묻혀 국민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메스티소를 ‘우주적 인 종’(cosmic race)으로 미화했지만 ‘포용의 이데올로기’와 ‘배제의 현실’사이에는 커다란 간극이 존재했다. 민중국민주의 주창자들은 원주민을 국가의 통합과 발전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여겼고, 원주민을 역사적 기원으로만 인식했을 뿐 살아 있는 원주민을 국민으로 통합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 멕시코 혁명은 엘리트 과두 지배 체제에 도전함으로써 국민국가를 만들 수 있는 역사적 계기를 제공했지만, 혁명이 공언한 민중국민주의는 정치적-경제적 발전을 앞세운 국가주의(statism)에 예속되면서 국민은 ‘미완의 상상된 공동 체’(unfinished imagined community)로 남았다. 국민을 가능하게 만드는 뿌리 깊은 수평적 동료의식은 ‘식민적/인종적 계서화’(colonial/racial hierarchy)의 억압을 당하는 메스티소, 원주민, 흑인에게는 ‘불가능한 동료의식’(impossible fraternity)였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메스티소 국민주의가 종족적-문화적 서사에 뿌리를 둔 국민주의였다면, 아르헨티나의 포퓰리즘 민중국민주의는 민중(pueblo)에 뿌리를 둔 정치적 차원의 국민주의였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를 갖추고, 광범위한 공교육 체제의 기반을 마련했으며, 인종적 갈등도 존재하지 않았던 아르헨티나는 곡물과 육류의 수출, 발달된 철도망,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 수준과 도시화, 유럽으로부터의 값싼 노동력 유입으로 산업국가 대열에 진입할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해외 시장과 해외 투자 자본에 의존하는 경제는 구조적인 종속성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사회계층간 분배의 불평등과 지역 간에 심각한 격차를 드러냈다. 페론주의(peronism)로 상징되는 아르 헨티나의 민중국민주의는 경제적 자유주의를 내세운 과두 지배 체제의 헤게모니에 도전하고 경제적 재분배를 강화하여 국민국가를 만들려고 시도했지만 과두 지배 계층과 군부의 저항에 부딪히면서 아르헨티나 국민도 ‘미완의 상상된 공동체’로 남았다.

내셔널리즘 역사에서 라틴아메리카가 늘 예외적인 경우로 취급된 것은 1950년대 이전까지 네이션이 형성되지 못했고 국 민의식이 확산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민중국민주의 지도자들은 개개인을 절대적인 주권자에 복종하는 신민으로 만들었던 유럽의 절대주의 왕권 같은 주권자가 될 수 없었고, 라틴아메리카 민중들은 시민혁명을 통해 주권을 갖는 시민이 되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라틴아메리카 내셔널리즘이 언급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였고,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식민지에서 독립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의 민족주의운 동과 쿠바 혁명이 자리 잡고 있었다.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 내셔널리즘 연구는 냉전이라는 시대적 상황과 종속이론의 영향으로 석유 국유화를 중심으로 경제적 내셔널리즘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말부터 권위주의적이고 억압적인 군부 정권이 들어서면서 내셔널리즘 연구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 다. 라틴아메리카 내셔널리즘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진 것은 1990년대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1980년대 정치적 민주화와 동시에 진행된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이 자리 잡고 있다. 정치적 민주화가 전통적인 과두 체제를 다두 체제(polyarchy)로 변화시키는데 그친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개혁은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양극화를 더욱 악화시켰다. 이 때문에 1980년대 후반부터 대륙 전체에서 사회운동이 촉발되었고, 배제되었던 사회적 집단들이 정치적 행위자로 등장했다. 사회운동의 행위자 들은 단지 경제적 영역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 문화를 가로질러 모든 영역에 구조화되어 있는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근본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한다. 그리고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는 체제의 문제보다 탈식민적 국민의 문제와 더 깊이 관련되어 있다. 2세기 전에 식민지로부터 독립한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의 과제는 여전히 국민을 만드는 것이다. 지난 3-40년 동안 다른 어떤 지역보다 신자유주의 개혁이 가장 먼저, 가장 강도 높게 적용되었고, 가장 먼저 그 폐해를 경험하고 있는 라 틴아메리카에서 출현하고 있는 사회운동은 ‘아래로부터’, 그 리고 자본이나 국가와는 다르게 작용하는 교환양식에 뿌리를 둔 네이션을 만들려는 시민혁명의 시작으로 규정될 수 있다.

김은중 /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각주

1) 보로메오의 매듭은 세 개의 링이 서로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있는 형태를 말한다. 세 개의 링은 고유성을 잃지 않고 각자의 형태를 이루고 있으면서 동시에 서로 결합되어 있고, 어느 하나라도 떨어지면 전체가 끊어지 고 마는 하나의 일체를 이룬다.
2) 코로나19 감염병의 출현은 신자유주의 세계화로 인해 축소되고 소멸될 것이라고 예측되었던 국가의 귀환을 요구하고 있다. 국가의 존재는 다른 국가와의 전쟁뿐만 아니라, 감염병 같은 재난의 상황에서도 지배와 보호(혹은 약탈과 재분배)의 교환양식에 뿌리를 두기 때문이다. 한국이 코로나19 대응의 모범국이 된 것은 국가가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면서 골든 타임을 놓치지 않고 국민을 감염병으로부터 보호했기 때문이다. 논란이 되고있는 긴급재난자금 또한 국가가 거둬들인 세금을 재난의 상황에서 재분배하는 것이다.

3) 크리올(creole)은 유럽 백인 혈통으로 아메리카에서 출생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4) 민중국민주의는 훼손된 민주주의라는 의미에서 흔히 포퓰리즘으로 불린다.
5) 이 때문에 라틴아메리카 내셔널리즘은 민족주의로 부르기보다는 국민주의로 부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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