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2호 책지성: 모리스 블랑쇼 읽기 ] 조각의 문학을 위하여 – 모리스 블랑쇼의『기다림, 망각』앞에서

모리스 블랑쇼의 『기다림, 망각 L’ATTENTE L’OUBLI』 (1962)을 읽는 일은 그가 열광하고 쓰기를 멈추지 않았던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중에서 『법 앞에서 Vor dem Gesetz』처럼 죽을 때까지 ‘법의 문’ 앞에서 기다리고 통과하기를 갈망했던 시골 사람의 형편과 어쩌면 다르지 않을 것이다. 문지기는 한없이 법의 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임종에 다다른 시골 사람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곳에서는 너 이외에는 아무도 입장을 허락받을 수 없어. 왜냐하면, 이 입구는 단지 너만을 위해서 정해진 곳이기
때문이야. 나는 이제 가서 그 문을 닫아야겠네.” (프란츠 카프카,『 변신』, 솔출판사, 1997) 시골 사람의 기다림처럼 모리스 블랑쇼의 『기다림, 망각』 (그린비, 2009)에서 ‘그’의 ‘기다림’을 프롤로그의 시(詩)로 표현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내가 세워지는 곳은 검은 극장 빈 무대/나는 기다린다 나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말한 것이다 나는 기다린다 내 몸 속 자석과 코일 사이 발생하는 말의 전압 불현 불꽃과 빛으로부터 태어나는 언어 그녀는 단어에 리듬을 부여한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내 육체의 전선을 끊는다 그녀의 육성이 날 것으로 내 육체를 통과한다 나는 모든 벽을 울리며 사라지는 공기의 파열을 듣는다 나는 말한 것이다 나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기다린다/조명이 꺼진다”
—송승환,「 마이크」전문『( 클로로포름』, 문학과지성사, 2011.)

그의 ‘기다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 “검은 극장 빈 무대”에서의 기다림과 “모든 벽을 울리며 사라지는 공기의 파열”같은 “말”을 향한 다가감과 기다림이 필요한데, 그 우회의 경로 입구에는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의 ‘비인칭(Impersonnalit´e)’이 있다. 말라르메는 장시「에로디아드 H´erodiade」에서 보석과 광물이 될 수 있는 죽음을 실천하여 영원히 아름다워지려는 ‘에로디아드’라는 인물을 창조한다. 그녀는 유한한 육체의 아름다움과 우연한 언어의 문법, 그 모든 우연과 한계 너머에서 영원히 아름다우면서 기하학적 엄밀성으로 작동하는 ‘언어’, 스스로 우주의 보편적 질서를 수행하는 단 한 권의 책, 『주사위 던지기 Uu coup
de d´es』에서처럼“북두칠성 le septentrion”이 되려는 비인칭적 존재를 지향한다. 인칭대명사가 1인칭부터 3인칭까지 인간을 지칭하는 대명사라면 비인칭대명사의 ‘비인칭’은, ‘비가 오고 있다’의 영어 ‘It’s raining’에 해당하는 프랑스어 ‘Il pleut’에서의 ‘Il’이다. 비인칭 ‘Il’은 ‘날씨, 날짜, 시간, 거리, 요일’처럼 인간의 의지와 힘이 깃들 수 없는 천체의 운행과 우주의 질서를 함의한다. 그런 점에서 비인칭에는 인간의 유한한 육체와 언어의 우연성이 자리 잡을 수 없다. 비인칭에는 에로디아드처럼 유한한 인간과 “결코 우연을 배제하지 못하는” (『주사위 던지기』) 언어의 우연성이 죽어있다. 비인칭은 인간의 육체와 언어의 우연성이 죽어있는 ‘무(無)’이고 그 자체로 천체가 운행하고 우주의 질서가 작동하는 ‘빈 곳’이다. 『 주사위 던지기』에서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무한히 언어 스스로 의미를 생성하고 있는 ‘공백(Blank)’이다. 이것은 말라르메가 ‘에로디아드’를 쓰면서 끝없이 절망하고 우연한 언어의 한계 앞에서 실패가 예정된 언어로 시를 쓰는 주체의 죽음을 발견한 ‘무(無)’이다. 그것은 세계를 온전히 재현할 수 없는 언어의 한계와 글쓰기 주체의 죽음이 드러나는 ‘백색 빙하’의 빛깔을 지닌 종이의 공백이다”. 『 기다림, 망각』에서 그가 그녀에게, 그녀가 그에게 말해야 할 것으로서의 공백이다. 그 공백 앞에서 그녀와 그는 서로 마주하면서 현전하고 기다리면서 말한다. 말하지 않는다. 그와 그녀는, 저 공백의 ‘있음’과 ‘비어 있음’을 가로질러서 오는 말을 기다려야 한다. “오직 기다림 속에서만 어떤 관계가, 기다리기 위해 한 말들이, 말들의 기다림이 그들이 말하는 것 가운데에서 이어진다.”(『기다림, 망각』:47쪽, 이하 쪽수만)

말해야 할 것의 ‘비어 있음’으로서 공백 ‘Blank’는, 그저 비어있는 투명한 흰빛의 무(無)가 아니다. 영어 ‘Blank’는,‘ 어둡고 캄캄한 검은’의미를 지닌 영어 ‘Black’과 빛깔 없이 ‘창백한(pale)’,‘ 백색(white)’의 의미를 지닌 영어 ‘blanc’,‘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 흰’과 ‘빛나다’, ‘불타다’의미를 지닌 프랑스어 ‘Blanc’과 함께 영어의 어원 ‘blak’과 ‘bla – c’을 모두 공유한다. 더 나아가 영어 어원 ‘blak’을 공유하는 독일어 ‘Blank’는 ‘반짝이는’과 ‘빛나는’뿐만 아니라 ‘벌거벗은’의미까지 지닌다. 그런 점에서 공백의 언어, ‘Blank’는 순백의 순수한 침묵의 비어있는 언어가 아니라 재의 언어이다. 빛이 어둠에서 나오듯 ‘흰’은 검정에서 나온다. 타오르는 불길에 타들어가서 몸체의 대부분이 연기로 사라져버리고 검게 그을린 붉은 숯이 되었다가 잿불만 남은 숯등걸. 그 숯등걸의 흰빛으로 남은 재의 언어이다. 그와 그녀 사이에는 저숯등걸의 흰빛으로 남은 ‘말’이 있다. “그가 듣고 있는 한결같은 이 말. 가까이에도 멀리에도 있지 않으며, 공간을 내주지도 않고, 모든 것을 공간 속에 놓이도록 하지도 않는 말, 한결같지 않은 한결같은 말, 그 무차별성 속에서 언제나 다른 말, 모든 오는 것을 가로막고 모든 현전을 가로막으면서 결코 오지 않는 말, 그녀가 말한 것의 단순성 속에 감추어져 있지만 언제나 말해지는 말. 어떻게 그는 그 말을 그녀에게 되돌려 줄 수 있을 것인가?”(128쪽) 그것은 말라르메의 전언처럼 우연한 언어 대신에 “자연에 있고” 자연에 “아무것도 보태지 않아도”되는 사물 자체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그런데 그 사물 언어는 어떻게 가능한가. “불변의 의연한 기운이 있는 이 장소에서처럼, 그들 사이에서 모든 것들은 그 잠재적 상태 그대로 남아 있다.”(128쪽)

앙텔므의 비인칭

모리스 블랑쇼의 『기다림, 망각』을 읽는 또 다른 우회의 경로 입구에는 로베르 앙텔므(Robert Antelme)의 『인류 L’esp´ece humaine』(1947)가 있다. ‘인간이라는 종 L’esp´ece humaine’을 함의하는 로베르 앙텔므의 『인류』는 독일 강제수용소에 수감되었던 그 체험의 기록이다. 강제수용소에서 수인들은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고 매일 정확한 오열로 점호를 받는다. 머릿속에는 오직 배고픔을 견뎌내고 살아남기 위해 ‘빵’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끝없는 노역 속에서 유일한 휴식은 배설을 위한 ‘변소’에서 머무는 순간이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고 지친 몸을 눕히면서 청하는 잠은 휴식과 꿈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내일의 노역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쓰러지는 잠이다. 매일 반복되는 수용소의 노역은 수인들의 신체를 변화시킨다. 동일한 삭발 머리와 줄무늬 수인복을 입은 익명의 존재가 됨으로써 모두 비슷해진다.

수인들은 이름이 지워지고 숫자로 불리면서 얼굴 없는 비인간에 가까워진다. 수인들 관리의 편의성을 위해 이름 대신 명명된 숫자는 인간의 고유한 정체성을 지우고 무(無)로 만든다. 강제 수용소는 익명의 공-동체(共-動體), 비인칭을 탄생시킨다. 수인들은 얼굴 없는 비인칭이 되어감으로써 단지, ‘있다(Il y a∼)’의 ‘공동체(共同體)’가 된다. 모리스 블랑쇼는 “수용소에서 이름들이 불리는 것을 생각한다. 명명하는 것은 말의 죽음의 놀이를 동반한다. 이름의 임의성, 이름을 앞서거나 동반하는 익명성, 명명의 비인격성은 끔찍한 방식으로, 언어가 살인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상황에서 명백히 드러난다”(『저 너머로의 발걸음 Le pas au-dela、(1973)』그린비,
2019)고 사유한다. 그가 그녀를 부른다. 그 말은 어떤 효과를 불러일으키는가. 에필로그의 시로 대신한다.

“나는 세계에서 지워지고 있다//나는 내 몸속을 울리며 사라져가는 그녀의 모든 말을 증폭시킨다//나는 말한다”(송승환,「 마이크」전문, 상동.)

송 승 환 / 시인, 문학평론가

작성자: khugnews

이글 공유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