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호 책지성 : 플라톤, 『향연』] 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하여

제법 감성적인 제목으로 글을 시작했다. 필자도 그러하듯이, 감정을 다루는 것은 참으로 추상적인 일이다. 그럼에도 ‘사랑’은 많은 예술가에게 영감이 되었다. 사랑을 소재로 한 예술 작품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범람하고 있고, 인간 역사의 공통된 정서로서 앞으로도 무한히 쓰일 것이다. 어떻게 살면서 단 한 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리. 플라톤은 왜 그의 이데아를 묘사하기 위해 사랑을 이용하였는가. 변하지 않는 것이 사랑의 실재고 본질이라면, 변하는 것은 무엇일까?

변화하는 매체, 늘어만 가는 사랑

인간은 사랑을 전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취했다. 때로는 노래했고, 때로는 글을 적어 내려갔으며, 때로는 그림을 그렸다. 그저 몸을 닿게 하는 것만으로도 사랑이 전해지는 순간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 전달의 방법이 인간의 신체만은 아니었다. 언젠가는 손으로 쓴 편지가 감정을 나누는 데 사용되었고, 인터넷으로는 이메일을 보내는 것이 그토록 설렐 때가 있었으며, 곧이어 SNS가 등장해 ‘그 사람의 일상’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는 영상 통화, 카카오톡 등 지금까지 기술의 집약체가 연애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딱 그만큼, 사랑의 형태도 증가했다. 현대에는 과거와 다른 형태의 사랑이 있다. ‘게임’이나 ‘채팅’과 같은 온라인 매체에서 사람을 만나 결혼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대표적인 사례이다. 이전에는 사람과 대면을 한 이후 점차 직접적으로 서로를 알아가는 방식이었다면, 온라인에서의 만남은 텍스트로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외면적인 요소는 고려하지 않고, 혹은 성별도 알지 못한 채로―온라인에서 공개하는 성별이 실제가 아님을 고려할 때, 상대방을 특정 성별로 알고 사귀었더라도 아닌 경우가 생길 수 있다― 연애가 진행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것은 사랑이라고 할 수 있을까?
고전의 가치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변하지 않는 정신에 있다. 『향연』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한다. 더 명확하게, 『향연』에서 묘사하는 것은 ‘에로스’이다. 사랑의 근원, 에로스의 근원은 현재까지 플라톤이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형태는 오직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만이 알 뿐이다. 고대 그리스부터 현대의 한국까지. 이 거대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도 사랑의 본질은 과연 변치 않는 진리인가. 사랑의 불변성, 혹은 가변성. 독자는 사랑의 무엇과 마주하게 될 것인지.

가치의 변화는

사이에 먼 거리를 두고 하는 연애, 통칭 ‘롱디’는 오래 전부터 있어 왔다. 그러나 지금처럼 가까운 거리에 있는 것과 같은 기술들이 예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롱디’에는 실체가 있다. 나와 연애하는 상대방, 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그를 만나기 위해 기술적인 수단을 사용한다. 그러나 온라인에서의 연애는, 기술적인 수단이 실재를 앞선다. 그런 ‘실재를 확신할 수 없는 사랑’에 대해서 플라톤은 어떻게 설명할까? 사랑의 가치는 변화했나?
온라인에서만 만남을 지속한 커플에 대해 생각해 보자. 모니터 건너편 실재하는 존재가 있는 현대와는 달리, 온라인의 캐릭터는 말 그대로 ‘비실체’에 가깝다. 나의 세계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대상임과 동시에, 분명히 나와 대화하는 상대는 존재한다. 어떻게 보면, 실제 형태를 알 수 없는 추상적인 형태를 가진 ‘사랑’이라는 감정에 알맞은 방법이다. 대화를 통한 정서의 교류가 주를 이룰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후 만남을 도모할 수는 있겠지만, 네트워크를 통해 만나는 상대방의 존재에 대해 시각적으로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그럼에도 오히려 정신적인 교류만 존재하기에, 플라톤의 『향연』에서 기술하는 사랑의 본질을 발견하기 쉽다.
플라톤이 학자들의 입을 빌려 사랑에 대해 말하는 논의들은 각각의 논리만으로도 흥미롭지만, 필자는 그것을 일종의 ‘과정’처럼 바라보았다. 에로스의 시작이 때로 ‘결핍’이라는 것은 이미 너무나도 많이 이야기되었다. ‘아름다운 것’을 갈망하는 ‘추한 것’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논의가 떠오르는 구절이다. 상대방에게서 본인에게 부족한 것을 발견하고, 그 모습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언뜻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이것은 상대방이 실체를 가졌느냐와는 상관없는 과정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출산을 통한 영구적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상대방의 실체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해당 고찰을 위해 영화 <그녀>(Her, 2013)의 대사 일부를 인용해 본다.

나는 당신과 처음 사랑에 빠지던 순간을 어젯밤 일처럼 기억해. 그 작은 아파트에서 당신 곁에 아무것도 안 걸친 채 누웠던 밤. 그때 나는 마치 무언가 커다란 세상의 일부로 변한 것 같았어. 우리 부모님. 또 우리 부모님들의 부모님들……. 그날 이전에 난 마치 이 세상 모든 걸 다 아는 것처럼 살아왔어. 그런데 그때 밝은 빛이 나를 흔들어 깨운 거야. 그 빛은 바로 당신이었어.

육체적인 에로스 관계를 가졌을 편지의 화자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누워 무언가를 깨닫는다. 개인은 현재적 시점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부모님을 타고 올라가 무수하게 이어지는 역사 안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출산을 통한 에로스의 불사’와 다름없다. 결국 부모님으로 연결되는 가지들이 지금까지 존재하고, 그 가지들은 또 다시 ‘밝은 빛’과 만나며 결합한다. 이 ‘밝은 빛’은 마치 아리스토파에스가 말하는 에로스처럼 보이기도 한다. 우리는 온전한 자들이었으며, 그 온전함에 대한 욕망과 추구에 붙여진 이름이 바로 에로스이다. 그리고 그 결합이 이루어질 때, 우리는 안정감을 느낀다.
소크라테스는 아름다운 것끼리의 결합이 ‘사랑’이라고 정의했지만, 그 또한 결말은 ‘완전함’이었다. 결합을 이룸으로써 이전보다 완전하게 만드는 것은 부정할 만한 여지가 없어 보인다. 결국, 사랑에서 존재의 문제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결론으로 닿을 수 있다. ‘사랑하는 것’이 실체를 가지고 있지 않을지라도, 나는 사랑할 수 있다.
실체가 없는 관계에는 정신적인 결합이 있다. 에뤽시마코스는 에로스가 모든 동물들의 몸에도 땅에서 자라나는 것에도, 말하자면, 있는 모든 것들 속에 있다고 말했다. 에뤽시마코스의 에로스는 ‘모든 곳’에 있다. 또한 디오티마는, ‘몸에 있어서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많이 영혼에 있어서 임신하는, 그리고 영혼이 임신하고 출산하는 게 적당한 것들을 임신하는’, 그런 자들이 있다. 다시 표현하면, 예술가들이다. 영혼에 머금고 있는 ‘에로스’를 작품에 표현해 내는 것이 ‘그런 자’들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출산할 수 있다면, 모니터 건너편의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는 또 어디 있을까.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사다리 이론은 여기에서 다시 등장할 수밖에 없다. 에로스의 최종 목표는 ‘신적인 아름다운 것 자체를 직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앞서 설정한 가상의 커플의 결말을 마음대로 지어 버릴 수는 없으니, 《그녀Her》의 결말을 다시 빌려 본다. 인공지능 사만다는 주인공 시어도어와 사랑을 마무리하며 말한다.

나는 당신의 책 안에서 더 이상 살 수 없어요. 설명하기 어려워요……. 그렇지만 당신이 그곳으로 온다면, 나를 찾아와요. (중략) 이제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아는 거겠죠?

퍽 낭만적인 말과 함께 사만다는 지향하는 ‘아름다움’을 향하기 위하여 시어도어를 떠난다. 그리고, 함께 그 ‘아름다움’에서 만날 수 있다면 본인을 만날 수 있을 것이고, 그곳에서는 갈라질 일이 없을 것이다. 이는 에로스의 최종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으로, 그 순간에는, 더 이상 욕망해야 할 것이 남지 않는다.
한 사람이 사랑하는 ‘그녀’들은 각각 결핍과 충족을 만들어 내는 존재이다. 누구에게든지 ‘그녀’는 존재한다. 그리고 누구든 ‘그녀’를 열망할 때, 근본적인 아름다움을 마주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에로스에 대한 끈질긴 탐구가 동반된다면 에로스의 최종 단계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플라톤의 에로스가 현대의 에로스와 괴리감이 느껴지는 것은 영화의 인공지능 사만다처럼 도움을 주는 ‘그녀’가 흔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에로스가 플라톤이 말하는 기능을 온전히 다하기 위해서는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전제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범인은, 필자를 포함하여, ‘그림자’ 즉 현실에 지나치게 얽매여 있다. 현실적으로 중요한 것은 ‘나’와 ‘그녀’가 당장 맞이할 내일이지, 후일 함께 탐구하게 될 근원적 아름다움이 아니다.
심지어 자본주의가 도래하고 사회생활이 무엇보다 중요해진 현대에 플라톤의 에로스론을 모든 이에게 적용시키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절대적인 아름다움’으로 비유되는 이데아를 바라보기에는 이미 ‘그림자’에 매인 것이 지나치게 많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 아테네와 현대 한국의 사회적 분위기의 차이 때문이다. 그러나 결론은 같다. 변화하지 않는 ‘진리’는 존재하지만, 그 진리가 모두에게 완벽하게 적용될 수는 없다. 그렇기에 플라톤은 ‘나와 유사한 사랑을 한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 ‘전시대적 에로스의 본질을 꿰뚫어 본 철학자’로 남았을 것이다.

김태림 기자 | bianca111@khu.ac.kr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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