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호 리뷰: <상하이 독립운동 유적지>] 상하이에서 조우한 독립운동의 흔적

‘상하이임시정부’. 학창시절 기계적으로 외운 이 단어가 생각난 것은 지난해 말 상하이 여행을 준비할 때였다. 상하이를 가게 되면 다들 한번씩은 들른다는 말에 임시정부 방문을 계획했지만, 이 일곱글자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한창 역사를 배우던 중고등학교 때 19세기 이후의 우리나라 역사는 나에게‘불의에 대해 약간은 화가 나면서도 당장 눈앞에 닥친 수많은 외워야 할 것들에 밀려 이를 외면하게 만드는 것’투성이였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조우한 이 기억에, 이번 여행에서는 만 하루를 꼬박 투자하여 임시정부뿐만이 아니라 상하이 곳곳에 남아있는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았다. 대표적 으로 ▲상하이임시정부와 ▲영경방 외관, ▲홍커우공원, 그리고 ▲만국공묘(송칭링 능원)이다.

상하이임시정부는 오늘날 상하이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서울로 치면 이태원같 은 일종의 핫플레이스에 위치했다. 유럽풍의 펍이나 레스토랑이 즐비한 이곳은 과거 프랑스의 조계지이다. 바로 이 이유로 독립운동가들은 이곳에 임시정부를 꾸렸다. 일본과 동맹 관계인 영국의 라이벌, 프랑스의 영역권에 있으면 일본의 감시에서 보다 자유로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지에서 만난 임시정부는 이렇게 눈치를 보며 살아야 했던 초라한 현실을 잘 보여줬다. 가파른 계단과 단출한 사무실과 숙소 등 당황스러울 정도로 작은 공간은 한 나라의 정부라기엔 너무나도 부족했다.

이러한 현실은 김구 선생님이 가족과 거주하신‘영경방’에서도 드러난다. 재개발 등으로 인해 오늘날에는 외관만 볼 수 있지만, 어느 정도 당시의 상황을 엿볼 수 있었다. 당시 선생님의 어머니께서 쓰레기통을 뒤져 쓸만한 채소를 모아 식사를 준비하셨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독립운동가들은 담대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윤봉 길 의사다. 그의 상하이 홍커우공원 의거는 일본과 세계에 우리나라의 독립 의지를 드러내었고,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인해 고통받던 중국에도 큰 울림을 가져왔다. 비 록 오늘날 사건 현장 자체는 호수가 되어 알아볼 수 없지만, 공원 한쪽에 마련된 윤봉길 기념관‘매헌’은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고 있다. 폭탄을 품에 숨긴 채 일본군의 눈을 피해 단상으로 다가가는 순간,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의 사진 앞에 놓인 싱싱한 국화를 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

오늘날까지 밝혀지지 않은, 당시 정체를 숨기고 활동한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우리 는 다 알지 못한다. 한정된 교과서 지면에 실리지 못한 독립운동가 또한 수없이 많다. 이러한 분들 중 일부나마 뵐 수 있는 곳이 상하이의 만국공묘다. 묘역 한편에 마련된 외국인묘원은 상하이의 발전에 도움이 된 외국인들을 특별히 기리는 장소이다. 이곳에서 한글 이름이 새겨진 10여 개의 묘지 초석을 찾을 수 있었다.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는 광복 이후 단계적으로 한국에 이장되었지만, 일부는 여전히 그곳에 남아 방문객을 맞이한다.

교과서 속 몇 개의 글자들은 일제강점기 당시의 현실을 다 말하지 못한다. 겨우 하 루 동안 보고 읽은 독립운동가들의 성함과 업적 또한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이 공간들을 매개로 마주한 일부나마의 과거는 현재를 사는 나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왔다. 사람들은 과거의 흔적을 찾고 발자취를 좇는다. 추상적인 진술이 아니다. 일본제품 불매운동, 코로나19로 인해 나타난 혐오의 확산은 일상에서의 민족주의의 발현이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과거는 결코 현재와 단절되어있지 않음을 느낀다.

류제원 기자 | jewonryu@khu.ac.kr

작성자: khugnews

이글 공유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