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호 인문학술 : 민족주의의 잔재 혹은 계승] 인도의 민족주의-‘힌두 국가’의 탄생

한민족의 자주독립을 외치던 1919년 3·1운동 이후 만 백년이 지나며 한민족이라는 개념은 희미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지난해 과거 강제징용 문제가 불거지면서 소위 “독립운동은 못했어도 불매운동은 한다”는 문구가 크게 인기를 끌었고, 과거사 문제를 현재와 연결짓기 시작했다. 이는 한국만의 일이 아니다. 우리는 지금 세계 각지에서 전염병의 발발로 인한 민족주의를 목도하였다. ‘우리’를 위협하는 타자에 대한 혐오 등, 민족주의는 시대에 따라 그리고 지역에 따라 변화하는 양상을 보인다. 이에 본지는 이번 호부터 3회에 걸쳐 다양한 지역적·역사적 맥락에서 인도와 라틴아메리카, 그리고 한국의 민족주의 시리즈를 기획했다. 그 시작은 종교와 결합된 인도의 힌두민족주의이다.

민족(nation)이“상상의 공동체”로 치부되며 이미“역사의 종언”이 선언된 탈근대의 시대에, 민족주의의 이해는 무슨 의미가 있는가? 탈근대의 담론은 전 세계의 탈정치화, 국경 없는 글로벌 사회, 비정부·비정치적 네트워크로 연결된 지구촌을 그렸다. 그런 세상에서 민족이란 실체 없는, 그저 구시대의 잔재같은 존재가 되리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국경은 사라지지 않았고, 세계 여러 지역에서 민족은 여전히 하나의 정치적 단위로서 실질적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목도하였다. 민족주의로 모든 현상을 설명하기에 현재 사회는 복잡하고 변화무쌍하지만, 민족은 여전히 국 가와 국가 사이에서, 그리고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일어나는 많은 일들을 설명하는 주요한 기제가 되고 있다.

인도의 경우, 식민지시대에 그 뿌리를 두고 성장해 온 세속민족주의와 종교민족주의의 경쟁과 갈등이 정치계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이러한 민족주의의 갈 등은 엄청난 동력이 되어 정치뿐 아니라 거의 전방위적으로 사회 변화를 추동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면 인도의 민족주의는 어떻게 생성, 전개되어왔으며 오늘날 인도 사회에 어떤 과제와 도전을 남겨주고 있는가?

인도 민족주의의 시작과 종교적 민족주의

18세기 중반부터 약 200년에 걸친 식민지배를 겪었던 인도에서, 민족주의는 서구식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에 의해 이식된 형태로 시작되었다. 19세기 말에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고민은 무엇을 근거로‘인도 민족’을 구성하는가의 문제였다. 민족국가는 대부분 그 구성원들이 언어, 역사, 문화, 종교 등을 공유하고 있으며, 이러한 공통점을 근거로 민족의식을 형성했다. 그러나 인도에는 지역마다 다른 수십 가지 언어와 그에 따른 지역주의, 각각 독립적으로 통치했던 다수의 지역 왕조가 있었다. 힌두교, 이슬람교, 불교, 기독교 등의 주요 종교는 물론이고 시크교, 조로아스터교, 부족신앙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교가 공존한다. 인종적으로도 하나의 민족이라는 정체성을 불어넣고 통합된 민족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는 통일성의 요소가 너무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인구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힌두교도를 중심으로 민족의식이 싹트기 시작했다. 힌두교도는 1901년 센서스를 기준으로 인구의 약 70%를 차지했다. 식민지시대에 자문화에 대한 자각과 근대적 사회 및 종교개혁운동이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힌두 부흥주의(Hindu revivalism)가 성장했고, 이러한 종교적 움직임이 민족주의와 맞닿았던 것이다. 인구의 대다수가 신봉하는 힌두교는 하나됨의 의식을 불러일으키는 매개체로 쉽게 이용될 수 있었다. 각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행해지던 종교 축제, 성지순례 등이 민족주의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다. 서구 문물인 철도의 도입으로 성지순례가 활성화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힌두교를 구심점으로 하는 민족주의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하였다. 중세의 지역 군주가 이슬람에 대항하여 ‘힌두 민족’을 지킨 영웅으로 각색되었으며, 전국적으로‘소 보호운동’이 일어나 흰 암소가 인도인의 어머니라는 신화가 유포되기도 했다. 특히 소 보호운동은 소를 잡아먹는 무슬림에 대한 적대감을 자극하여 20세기 초반 힌두와 무슬림간 유혈 폭동의 원인을 제공했다.

힌두교를 중심으로 하는 민족주의의 형성과 성장은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이슬람교도를 소외시켰다. 이슬람교도는 1901년 인구의 약 21%를 차지하여, 소수라곤 하나 결코 만만한 교세는 아니었다. 그러나 무슬림은 영국 식민지시대에 힌두에 비해 사회적 진출이 제한적이었고, 상대적으로 낙후된 집단으로 여겨졌다. 영국이 무너뜨린 무굴(Mughal) 제국이 이슬람 왕조였기에, 무슬림들은 영국 지배에 반감이 컸고 서구 문화와 지식을 받아들이는 데 소극적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서구식 교육보다는 이슬람 종교 교육과 전통 교육에 집착했고, 순수했던 초기 종교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가 유행하였다. 따라서 식민정부 하에서의 공직 진출 등에서 힌두에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힌두가 먼저 민족주의로 뭉치자 무슬림 사이에서도 서구화와 종교개혁을 주창하는 지식인들이 생겼다. 이들은 이슬람 대학(Muhammadan Anglo- Oriental College, 현재의 알리가르 무슬림 대학)을 세워 종교개혁과 서구식 교육의 요람으로 삼았다. 조직화도 진행되어 1906년에는 무함마단 교육회의가 조직되었고, 이는 같은 해연말 정당인 무슬림 연맹(Muslim League)의 결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인도국민회의와 세속민족주의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사이에 인도에서는 힌두교와 이 슬람을 중심으로 하여 각각 민족주의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제일 먼저 정치적 조직화를 이룬 것은 1885년에 창립된 인도국민회의(Indian National Congress)로서 종교색을 내세우지 않는 단체였다. 초기 인도국민회의 회원은 힌두가 다수이긴 했으나 무슬림, 파르시(조로아스터교도) 등이 섞여 있었고, 영국 정부에 대한 청원과 협상을 주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초기의 엘리트 중심적인 조직에서 1920년경 마하뜨마 간디 (Mahatma Gandhi)의 지도력이 부상하면서 대중적인 민족운동 조직으로 탈바꿈하게 된다. 그 성격이 점차 저항적인 것으로 바뀌어 갔지만, 2차대전 시기까지도 인도국민회의는 독립이 아니라 자치를 목표로 활동했다. 물론, 국민회의는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포용하는 포괄정당으로, 개중에는 급진적인 사상과 운동 방식을 주창하는 이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국민회의의 지도자 중 간디 선생과 초대 총리 네루 (Jawaharlal Nehru)를 포함한 핵심 그룹은 세속민족주의(secular nationalism)를 대표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인도를 힌두의 나라로 규정하는 것에 반대하며, 힌두뿐 아니라 무슬림이나 다른 어떤 종교의 신자도 인도를 조국으로 한다면 모두 인도 민족이라고 하였다. 국민회의가 표방한 민족주의의 형태가 바로 세속민족주의로서, 인도의 세속주의는 정치를 비롯한 공적 영역은 종교적 신념이나 종교 기구와는 구분되어 운영되어야 하며, 서로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 동시에 모든 사람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

식민지시대 힌두-무슬림의 경쟁

힌두와 무슬림의 경쟁은 1905년 커즌(George Curzon) 총독에 의해 선포된 벵갈(Bengal) 분할령을 계기로 정치화되고 격화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에는 영국이 인도의 다양한 집단 간의 경쟁을 부추기고 교묘히 이용하여 통치의 편의를 도모하고자한 분할통치(Divide and Rule)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었다. 분할은 힌두교도들의 전국적인 결사반대로 무산되고 벵갈은 5년여 만에 하나의 지역으로 원상회복되었다. 그러나 경쟁과 폭력으로 무너진 힌두와 무슬림 사이의 신뢰는 다시 돌아오기 어려웠다. 또, 1930년대 전반 인도의 선거제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종교별 집단의식이 보다 확고해졌고, 종교집단 사이의 경쟁도 치열해졌다. 무슬림은 이때 분할선거와 이중투표의 권리를 얻으며, 정치적으로 분리된 집단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으로 여겨졌다. 무슬림 연맹은 1937년 지방 선거에서 국민회의에게 무슬림 의석을 대거 내주며 패배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슬림 집단을 대표하는 정치조직으로 성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0년대 중반, 영국 통치의 종식을 요구하는‘인도철수운동’이 전국화되어 인도의 독립이 가시화되면서 이슬람민족주의와 세속민족주의 사이의 경쟁은 더욱 증폭되었다. 이 두 세력이 무슬림 연맹과 인도국민회의를 필두로 뭉쳐서 독립 후 인도의 운명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식민지의 민족운동은 필연적으로 독립적인 민족국가의 건설을 목표로 삼을 수밖에 없다. 인도국민회의는 독립 인도가 남아시아의 유일한 민족국가가 되어야 한다는 ‘1국 이론’을 주장한 반면, 무슬림 연맹은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독립해야 한다는‘2국 이론’을 주장했다. 국민회의의 주장은 인도가 세속국가로서, 개개인의 종교와 관계없이 모든 국민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무슬림 연맹은 무슬림은 힌두와 다른 개별적인 민족이므로, 힌두의 나라인 인도와는 별개인 독립적인 이슬람 민족국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분리독립과 독립 이후의 인도

영국은 인도의 독립을 기정사실화한 상태에서 인도를 하나의 나라로 독립시킬지,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독립을 추진해야 할지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그러는 사이 종교폭동은 북인도 대부분 지역에서 수많은 사람을 죽고 다치게 했다. 이러한 폭력 상황이 제어 불가능하게 되자, 간디 선생을 제외한 국민회의 지도자들과 영국 식민정부의 책임자들은 인도와 파키스탄의 분리독립 이외에는 해결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고, 무슬림 연맹의 분리 독립안을 받아들이기로 한다.

1947년 8월 15일 인도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고, 인도와 파키스탄 두 나라가 건국을 준비했다. 급조된 국경선의 이쪽과 저쪽에서 수백만의 난민들이 종교의 자유를 찾아 국경을 넘었고, 그 과정에서도 폭력이 난무했다. 폭력으로 인하여 원치 않게 고향을 떠나야 했던 사람도 많았다. 인도와 파키스탄은 독립 직후 새로운 공화국의 역사를 서로 간의 전쟁으로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 식민지 인도의 이슬람민족주의 진영은 자신들의 원대로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을 건국함으로써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셈이었다. 인도국민회의는 비록 파키스탄의 분리를 막지는 못했지만, 인도공화국을 세속국가로 선포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인도가 힌두교 국가라는 오해와는 달리 인도는 국교가 없으며, 모든 인도 국민은 종교의 차이에 따라 차별받지 않을 권리를 헌법에 의해 보장받는다.

힌두민족주의의 이념

그러면 식민지시대부터 종교민족주의의 한 축을 이루었던 힌두민족주의자들은 어떤 길을 걸어왔을까? 인도의 초기 민족주의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힌두교라는 종교에 크게 기대어 발전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인도국민회의가 결성되며 인도인 전체를 대표하는 정치적 결사체로 성장하여 대다수 힌두의 지지를 흡수하였다. 대외적으로 국민회의는 인도인 전체를 대변한다는 스스로의 정체성과는 무관하게‘힌두의 대표’로 인식되었다. 특히 영국 정부는 국민회의를 힌두 정당으로, 따라서 무슬림 연맹의 상대로 여겼다. 이에 따라 힌두교를 인도인 정체성의 핵심으로 인식했던 힌두민족주의자들은 대중적 지지와 힌두 대표로서 인정을 받을 여지가 크지 않았다.

힌두민족주의를 표방한 조직이 처음 결성된 것은 1915년 북인도 뻔잡(Punjab) 지역이었으며, 1921년에 명칭을 전인도 힌두대연합(Akhil Bharat Hindu Mahasabha)으로 바꾸고 본격적인 정치 활동에 들어갔다. 그러나 대중적 지지와 식민정부의 인정을 독차지한 국민회의에 밀려 1930년대 후반부터 있었던 여러 선거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따라서 힌두민족주의 이데올로기는 인도가 참정권을 확보하고 민주화의 발판을 마련하던 1930년대와 국가형성의 논의가 활발하던 1940년대에 주목할 만한 정치적 역할을 하지 못했다. 더구나 독립직후인 1948년 사바르까르(V. D. Savarkar)를 비롯한 힌두대연합의 주요 인사들이 간디 암살사건에 연루되면서 힌두대연합은 정치적으로 더욱 소외되었다.

힌두민족주의의 이론적 기틀을 마련한 사바르까르는 힌두정체성의 요체를‘힌두뜨바(Hindutva)’라는 용어로 표현하였다. 힌두 원리주의 정치사상의 중심에 있는 힌두뜨바는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는‘힌두임’, ‘힌두성(힌두性, Hinduness)’ 정도로 번역될 수 있으며, 그 실질적인 의미는 힌두뜨바의 세 요소인 국가, 탄생, 문화가 의미하는 바를 통해 알 수 있다. 먼저 국가는 지리적 통합성을 의미하며 인도라는 지리적 기반에 세워진 국가를 말한다. 탄생이란 인종적 통합성이며 공통의 혈통으로 결속된 혈연 공동체를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문화는 조상 대대로 힌두들이 함께 경험한 역사와 종교 등 공통의 문화를 뜻한다. 이 중 첫 번째 요소인 국가란 곧 ‘힌두 국가(Hindu Rashtra)’를 의미하는 것으로 구체적으로는‘힌두스탄’으로 불리는 인도라는 지리적 개념이며, 힌두에게는 자신의‘조국’이자‘성지(聖地)’의 의미를 갖는다. 즉, 힌두 국가는 지리적 구체성을 가진 국가이면서 조상들과 내가 공유하는 땅이고, 종교적 성스러움을 갖춘 땅이라는 것이다. 이 지점은 힌두 국가에 힌두뜨바의 세 가지 요소가 모두 결합되어 있음을 보여주며, 민족주의라는 정치사상으로서의 성격을 드러내는 부분이기도 하다.

힌두 정체성과 배제의 원리

그렇다면 힌두 국가의 국민인 힌두는 누구인가? 사바르까르는 힌두뜨바를 가진 사람이 힌두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힌두라고 분류되기 위해서는 인도 또는 힌두스탄이라는 지리적 공간에 속해있어야 하며(국가), 인종적으로 힌두라는 혈통을 타고나야 하고(탄생), 힌두이즘을 근간으로 하는 힌두의 역사와 문화를 공유해야 한다는(문화) 것이다. 이에 따르면 현재 인도에 살고 있다 하더라도 인도 출신인 조상을 갖지 않은 사람, 인도 출신이고 조상 때부터 인도에 살아왔지만 이슬람이나 기독교와 같은 이방의 종교를 신봉하는 이들은 힌두가 될 수 없다. 그 이유는 그들이 힌두라는 혈통을 공유하지 못하거나, 힌두의 문화를 공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부분이 인도라는 국가를 삶의 터전으로 하여 살고있는 모든 이들이 인도인임을 주장하는 세속민족주의와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힌두뜨바 개념을 중심으로 한 힌두민족주의는 인도의 주인을 힌두로 한정하고, 그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을 배제하고 있다. 그 논리에 따르면 힌두로서 조상 대대로 인도에서 살아온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힌두 국가의 구성원이 될 수 없다. 오랜 세월에 걸쳐 끊임없이 외부에서 유입된 문화, 사람들과 융합되어 온 인도의 역사와는 걸맞지 않는 조건이라 할 것이다. 인도 인구의 상당수를 차지하는 무슬림만 해도 길게는 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인도에 정착하여 인도를 고향으로 알고, 그 일부로서 살아왔다. 인도의 영토 내에서 오랜 세월 살아왔지만, 힌두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독자적인 전통문화를 영위해 온 많은 부족민도 제외될 수밖에 없다. 민족
주의가 자민족을 중심으로 하는 성격 때문에 어느 정도 배타성을 갖는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지만, 힌두민족주의는 이미 한 나라의 구성원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많은 사람을 배제하는 것이다.

독립 이후 힌두민족주의의 성장과 정치적 성공

힌두민족주의 진영은 식민지 시절이던 1925년에 사회단체인 RSS(Rashtriya Swayansevak Sangh: 민족자원봉사단)를 결성하여 힌두교 선교 활동을 비롯한 다양한 사회활동을 펼쳤다. RSS는 독립 이후에도 다양한 계층에 파고들며 사회활동을 지속하여 현재까지 힌두민족주의 세력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는 핵심 조직이다. 정당으로는 힌두대연합이 세속주의와는 구분되는 힌두민족주의를 표방하고 있었으나, 독립 직후 간디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그 활동의 여지가 축소되었음은 전술하였다. 그에 대한 타개책으로 1951년 BJS(Bharatiya Jan Sangh: 인도인민당)를 새로 창당하여 당시 다수당이었던 국민회의에 대항하여‘민족주의적 대안’정당임을 표방하 였다. 이 정당이 훗날 이름을 BJP(Bharatiya Janata Party)로 바꾼 인도의 현 집권여당이다.

BJS 역시 힌두대연합과 마찬가지로 선거에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1951년부터 1971년까지 5번의 총선에서 3석으로 시작하여 22석까지 꾸준히 의석을 늘려갔다. 1980년 BJP라는 이름으로 제2의 창당을 한 후 첫 선거에서 543석의 하원 중 겨우 2석을 차지하는 데 그쳤지만, 1990년대 람(Ram)신의 탄생지를 재건하자는 종교적 캠페인이 대중적으로 성공하면서 점점 많은 의원을 배출하기 시작했다. 종교운동을 통하여 다수 힌두를 지지자로 끌어모아 1996년, 1998년, 1999년 세 차례의 총선에서 정당 연합을 이끌며 집권했다. 2004년과 2009년에는 국민회의에 정권을 빼앗겼다가 2014년과 2019년에 다시 정당 연합을 주도하여 총선에서 크게 이기며 안정적인 여당으로 집권하고 있다. 특히 2019년 총선에서는 BJP 단독으로 303석을 차지할 정도였으며, 연정 파트너 정당들을 모두 합치면 335석의 거대 여당을 구성하였다.

▲ 현대 힌두민족주의의 상징인 악샤르담 사원 ⓒ Google

힌두민족주의와 인도 사회의 도전

독립을 전후한 국가형성기에 힌두 국가의 꿈을 달성하지 못했던 힌두민족주의 정당은 50년 이상 지난 후에 국가 권력을 획득하였다. 권력이 장기화될 전망이 보이고 정치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BJP는 여러 가지 정책을 통하여 힌두 국가의 면모를 세우고 있다. 선거 때마다 표몰이에 이용되던 아요디야(Ayodhya)의 람 사원 문제는 결국 대법원에서 그 자리의 500년 된 이슬람교 사원을 마저 허물고 힌두교 사원을 지으라는 취지의 판결을 받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힌두교를 민족의식의 중심으로, 힌두의 우월성을 이야기하는 역사 교과서가 다시 쓰이고, 전국 곳곳에서‘암소자경단’이 결성되어 소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무슬림과 소수집단을 억압하는 일도 생겼다. 이로 인하여 소의 시체를 처리하고 가죽을 통하여 생업을 이어가는 하층 카스트 성원들이 소를 도살했다는 누명을 쓰고 집단 구타를 당하고, 죽기도 했다. 무슬림과 기독교도들은 인도의 국민임에도 2등 시민의 지위를 받아들일 것을 암묵적으로 강요당하고 있다.

지난 2019년 총선을 두고 많은 평론가는 세속주의의 부활과 힌두 국가의 장악을 저울질하며 향후의 인도를 점쳐보았다. 숙적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과의 전쟁 상황을 연출하고, 람 탄생지 운동을 재개하여 다수 힌두의 종교적 감성을 자극한 선거 운동의 결과, 인도의 운명은 힌두 국가로 향했다. 선거에 의한 다수 국민의 선택이었다. 이는 힌두 국가의 건설이 외부 세계에 대한 투쟁이나 국민을‘우리’와‘타자’로 가르며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국가 이데올로기로서 힌두 민족주의는 어떻게 다양성을 포괄하며 통합성을 확보할 수 있을지, 아직 내부적으로 많은 과제와 도전을 안고 있음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인도의 민족주의는 탈근대의 시대에 소멸의 길에 놓여있다기보다 여전히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 지 은 / 한국외국어대학교 인도연구소 HK연구교수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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