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호 기획 : 혐오와 바이러스] 지금, 혐오의 대상은 누구인가

▲프랑스 불로뉴에 위치한 일식집에‘코로나 바이러스’라고 낙서가 돼 있다. ⓒ twitter

코로나19 사태와 함께 지속적으로 퍼지는 것은 다름아닌‘혐오’와‘편견’이다. 이는 바이러스에 대한 혐오를 넘어 다양한 대상으로 전이되고, 결국‘혐오 바이러스’라는 이름으로 확장되었다. 무분별한 혐오로 인한 사회 현상에 의해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있는 와중, 본보는‘혐오 바이러스’의 실상을 파해쳐 보고자 한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19(이하 코로나19)가 전 세계로 번지면서 혐오 언어 또한 국경을 넘나들며 창궐하고 있다. 감염증이 처음 중국 우한에서 발병하자 각국에서 박쥐까지 잡아먹는 일부 중국인의 식습관을 비난하며 앞다투어‘야만적인 중국인’과‘문명화된 자국민’을 분리했다. 바이러스 인종주의가 확산되면서 중국인의 입국을 원천적으로 봉쇄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으므로 일부 여론을 중심으로 중국인의 입국을 원천 봉쇄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부가 이를 따르지 않자‘친중 정권’이라거나‘중국의 눈치를 본다’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혐오 언어와 혐오할 대상을 찾는 사람들

한국 정부는 국경을 봉쇄하는 대신 입국자 중심으로 감염 여부를 확인하는 관리체제를 고수했다. 코로나19의 확산이 한동안 주춤하자 정부에 대한 혐오가 잦아들었다. 하지만 대구에서 신천지를 중심으로 코로나19가 빠른 속도로 번져나갔고 다시 혐오 언어가 튀어나왔다. 사이비, 혹은 이단으로 불리는 신천지가 괴이한 집회를 통해 코로나19를 확산시키는 범죄자 집단으로 각색되었다. 당시 코로나19의 가장 큰 원인으로 생각되었던 신천지 교인만 잘 관리하면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을 수 있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스스로 정통이라 일컫는 개신교 교회에서도 감염자가 속출했다. 이에 밀착해서 예배를 드리는 개신교의 집회 방식에 대해서도 또 혐오가 퍼부어졌다.

코로나19가 대구 전역으로 확산되자 급기야 대구는 오염된, 출입금지 구역으로 낙인찍혔다. 전국으로의 확산을 막기 위해 대구를 봉쇄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오면서 대구 출신인 손님을 거부하는 식당도 등장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대구시민’이라는 이유로 혐오하고 폭언하는 네티즌도 있었다. 마치 대구만 잘 통제하면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을 수 있다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전국으로 코로나19가 빠르게 퍼져나가자 그제서야 대구시민에 대한 혐오 언어가 힘을 잃었다. 지역에 상관없이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코로나19에 감염될 수 있다는 공포가 널리 퍼졌다.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지면서 어린이집, 유치원, 학원이 문 닫고 초·중·고등학교와 대학의 개학이 연기되었고 대부분의 직장인들이 회사에 출근하는 것 대신 재택근무에 들어갔다. 거리에 사람이 줄어들어 요식업을 필두로 자영업자도 가게를 닫았다. 공공장소에서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졌고 일상생활에서 마스크 착용이 필수 에티켓이 되었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거리에 나선 사람은 무뢰한으로 낙인찍히거나 눈총을 받는 일이 허다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은 마스크 없이 거리에 나섰다가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마스크 품귀 현상이 일어나면서 마스크를 제때 공급하지 못한다며 정부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는 혐오 언어가 다시 쏟아졌다.

마스크 수급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이제는 사회적 거리두기 운동에 동참하지 않는 집단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면역력이 약한 노인이 감염에 취약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콜라텍에서 춤추는 노인을 혐오하는 언어가 널리 퍼졌다. 요양병원 같은 노인 집단거주 시설도 기피와 혐오의 대상으로 추락했다. 이후 젊은 사람은 면역력이 강해 감염이 잘 안 되고 설사 감염된다 해도 가벼운 증상으로 끝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일부 사람들이 술집과 클럽에 모여들었고 제주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남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젊은이에 대한 질타가 쏟아졌다. 시골에 있던 어르신들도 마을회관이 폐쇄되자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다들 가족 집으로 몸을 옮겼다. 갑자기 대가족이 된 그곳은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자녀가 한데 모였고, 평소 바빠 얼굴 보기 힘들던 온 식구가 종일 한 집안에 함께 있으니 눌러놓았던 갈등이 폭발한다. 삼시세끼 차리는 것이 코로나19보다 더 무섭다는 아내의 말에 남편이 발끈하고 아내는 가사분담 하자고 말하다가도 시부모 눈치에 입을 닫는다. 취업 준비 잘 되냐, 결혼은 언제 하냐 등 명절 때나 건네던 칼침 인사가 일상이 되자 세대 갈등이 부글부글 끓는다. 서로에게 혐오 언어를 쏟아내고, 심지어 폭력이 발생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가족이라는 이유로 한 공간에서 살벌한 친밀성을 유지한다.

해외에서도 한국인에 대한 혐오 언어가 쏟아졌다. 올림픽을 코앞에 둔 일본은 안전지대를 강조하기 위해 한국인의 입국을 막았다. 다른 몇몇 나라도 한국발 코로나19를 원천 봉쇄한다며 중국인을 비롯해 한국인의 입국을 금지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일본과 동남아를 비롯한 아시아 전체로 코로나19가 확산되자 유럽등지에서는 코로나19에 대한 반감을 아시아인에 대한 인종 혐오로까지 표출하며 아시아인을 야만적인 인종으로 낙인찍고 입국을 막았다. 공공장소에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가 폭증하고 실제 물리적 폭력도 일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를 시작으로 스페인을 넘어 프랑스와 독일 등 유럽 전역으로 코로나19가 확산되자 아시아인에 대한 혐오가 한풀 꺾였다. 급기야 미국으로까지 번지자, 이제 비로소 코로나19가 어느 특정 지역이나 인종에게 한정되지 않는 지구적 문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WHO 같은 국제기구가 지구적 협력을 끌어내는 데 한계를 보이는 사이 각국 정부가 앞다투어 국경을 통제하거나 봉쇄하기 시작했다. 자국 영토 안에서 사회적 거리두기와 자가격리, 심지어는 출입 전면 봉쇄를 감행했다. 이제는 각국 정부의 행정 명령에 따르지 않고 집 밖으로 나오는 사람이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더 나아가 외국에서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코로나19 감염원으로 의심받았다.

코로나19 이후의 사회

이러한 모든 현상 밑에는 명확하게 구획된 영토 안에는 단 하나의 국가가 절대적인 주권을 행사한다는 근대 국민국가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서 시작된 이 원리는 19세기에 들어 민족주의의 발흥에 힘입어 전 세계로 번져나갔다. 어떻게든 자국의 영토를 넓히고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단 하나의 국민으로 통합시키려는‘영토화 과정’이 대세가 되었다. 마침내 양차 세계대전으로 파국을 맞으면서 이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다. 국민국가 사이에 협치 체제를 만들려는 노력이 기울여졌고, 마침내 UN을 비롯한 많은 국제기구가 생겨났다.

국민국가 프레임을 벗어나려는 시도는 1980년대 후반 이래 거센 세계화 바람을 타고‘탈영토화 과정’으로 심화되었다. 국민국가는 자기 완결된 영토 국가가 아니라 다른 국가들과 서로 연계되고 의존하는 네트워크 국가다. 그 네트워크 안에는 개인, 집단, 지역, 국가, 역내, 세계 등 여러 차원의 행위자들이 강도 높은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 사람, 상품, 자본, 노동, 지식, 이미지, 범죄, 공해, 문화, 신념, 섹슈얼리티, 재난 등이 이 네트워크 안에서 활발하게 오고 간다. 모두 복합적으로 상호 연계된 이 지구적인 네트워크 안에서는 그 누구도 자기 완결된 실체로 살아갈 수 없다.

코로나19의 발원지를 어느 한 곳에 고착시키고 봉쇄하는 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다. 발원지로 지목된 지역의 주민을 상징적으로 오염시켜 혐오의 언어를 쏟아붓는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물론 물리적으로 특정 지역을 봉쇄하고 특정 주민이나 국민을 고립시킬 수는 있다. 그러면 어느 정도 코로나19의 확산을 막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코로나19가 종식되면 좋든 싫든 지구적 네트워크 안에서 상호작용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혐오 언어를 퍼붓던 사람과 다시 어떻게 상호작용하며 더불어 살아갈 수 있겠는가?

코로나19는 우리에게‘사회’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성찰하게 만든다. 국적이나 인종 같은 사회적 범주와 상관없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코로나19에 감염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지구라는 혹성에 하나의 인류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극단화하면 사람이 모여 상호작용하지 않게 되고 급기야 사회가 정지한다. 코로나19의 확산이 사회적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 것이라지만, 사회 그 자체도 사회적 상호작용으로부터 구성되는 과정이라는 점을 잊으면 안된다. 지구적인 탈영토화된 네트워크 안에 살아가는 우리가 타자를 혐오하고 배제하여 상호작용으로부터 몰아내면 사회가 아예 불가능하다. 우리가 혐오 언어 대신 연대 언어로 코로나19 이후의 사회를 상상하고 만들어가야 할 이유다.

최종렬 / 계명대 사회학과 교수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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