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호 책지성 : 《파리리뷰》『작가라서』(2018)] 밤이면 조명을 밝히고 침대에 엎드리는 사람들

책등에 아로새긴 몇 개의 제목만 읽어도 포만감이 느껴지는 하루가 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무릇 이런 질문 앞에 놓여진다. “ 왜 글을 쓰는 것이죠?”“주로 어디서 글을 쓰시나 요?” “언제 가장 행복하신가요?” 등등, 무수한 질문이 빈종이 위에 쌓이면 수학 문제를 풀 듯이 글을 쓰는 사람들은 자신만의 해답을 마치 정답인 것 마냥 채워 넣는다. 《 파리리뷰 The Paris Review》는 우리 모두가 할 수 있는, 또는 하고 싶었던 질문 앞에 303인의 작가를 세워두고 919개의 정답을 들려주고 있다. 『 작가라서 The Writer’s Chapbook』(2018)라는 제목에 벌써부터 배가 부른데, 그 안에서 해답을 찾은 사람들의 행복한 얼굴을 마주할 수 있으니 필자의 밤이 깊어만 간다.


작가란 어떤 사람입니까?

시인 예후다 아미하이(Yehuda Amichai)가 이런 말을 한다. “시인이 되면 자신이 시인이 라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 시인은 자기 스스로를 시인이라고 광고하지 않아도 된다. 다만 시를 쓰고 있다면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도 충분히 시인이리라. 한국에서는 시인 김수영이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시인은 자기 스스로를 망각할 때 비로소 진정한 시인이 된다고 말이다. 시를 쓴다는 것, 그래서 시인이 된다는 것은 강렬한 열망인 동시에 한편으 로는 숨기고 싶은 공공연한 비밀 같은 것이다. 이러한 양가감정에 대한 이야기가 분명 시인만의 애로사항은 아니라고 본다. 지금도 방안에서 작은 등불을 켜둔 채 소설 속 연인과 사랑에 빠진 소설가가 있을 것이다. 무지갯빛으로 물든 들판 위를 구르며 말하는 조랑말을 만들어내는 중인 동화작가도 있다. 그뿐이랴, 황혼이 깃든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인생에 대한 한 줄 노래를 쓰는 작사가도 있을 것이고, 발톱이 빠져서 잠시 멈춘 그 길 위에서 여행의 마지막을 논하는 에세이스트도 있을 것이다. 이처럼 글은 다양한 자리에서 다양한 형태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현현하는 예술이라 할진대, 그렇기에 작가는 스스로를 작가라 칭하지 않아도 된다. 단지 각자만의 자리에서 묵묵히 쓰고 있으면 작가가 되는 것이다.


편집자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보통 책을 쓴다고 말하지 않고 만진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필자도 편집자가 되고 보니 글은 쓰는 것이 아니라 만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가령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예쁜 레이아웃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독자들의 흥미를 끌 수 있을까?”와 같은 궁리(혹은 강박)는 편집자들 사이에서는 거칠 수밖에 없는 의문 부호이다. 이때 ‘글’은 ‘원고’라는 곳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긴다. 글을 원고로 보기 시작하면 그것은 해결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절대로 향유해서는 안 된다! 오탈자를 발견하면 눈이 맑아지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작가와 피드백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혈사태는 불가피한 즐거움이다. 편집자의 입장에서 스타일을 강요하는 무례함 속에서도 꿋꿋하게 편집자는 편집자가 원하는 원고를 얻기에 이른다. 그럴 때, 작가들은 과연 가만히 있을까?
문제적 소설 『Lolita』(1955)를 쓴 소설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Vladimir Nabokov)가 이런 말을 한다. “거만한 친척 아저씨 같은 망나니도 몇 명 만났는데, 그들의 제안에 저는 결국 천둥 같은 목소리로‘다시 살립시다!’라고 받아치게 되더군요.” 무엇을 그토록 다시 살리고 싶었 을까? 아니 그 전에 작가가 편집자를 망나니라고까지 부를 수 있다니 그 심정을 이루 해석하기가 막막하기만 하다. 하지만 이해가 안 되는 말도 아니다. 예로부터 편집자와 작가는 애증의 관계가 아니었을까 싶다. 지면이 궁한 작가들에게 편집자는 그야말로 집을 내주는 착한 주인장이 다. 하지만 주인장의 횡포가 심하다 싶으면 손님들은 못 견디고 다시 길거리를 배회하게 된다.
지면을 편집자가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양측의 입장은 당연히 갑을관계로 설정된다. 현실에선 내용뿐만 아니라 저작권에도 편집자의 영향이 끼치는 악조건이 비일비재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들은 그저 자신의 작품이 온전히 세상 밖으로 걸어 나올 수 있기를 기대하며 투고 하고 기고한다. 그렇다면 이토록 순진무구한 작가들의 권리를 지켜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 까? 조심스러운 언급일 수 있으나 문학에 있어서 편집자의 가히 횡포에 가까운 언행을 살피고 있자면 씁쓸한 표정을 짓게 된다. 최근 이슈가 되었던 『이상문학상작품집』출간과 관련한 독소 조항 사태가 자연스레 떠오른다. 작가는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쓴다. 어쩌면 꿈에서도 쓰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기에 자신의 작품이 온전히 주목받지 못하고 들러리가 되는 지면을 흔쾌히 동의할 작가는 없을 것이라 본다. 그런데 이번 이상문학상 주관 출판사인 ‘문학사상’의 아쉬운 대처와 작가들의 작품 수록 거부 의사는 비단 이상문학상만의 문제가 아니라 소위‘권위 있는 문학상’과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되었다. 이에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는 ‘이상문학상은 문학사상의 전유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다. 따라서 문학사상은 이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과 양해를 구하라. 독자들이 작품집을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라고 사설에 밝힌 바 있다.
여기서 우리는 편집자와 작가 사이를 잇는 하나의 변수를 발견할 수 있다. 문학이라고 하는 예술을 둘러싸고 작가의 입장과 편집자의 입장은 종종 부딪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은 둘의 입장차가 적극적으로 화합하는 순간이 있으니, 바로 독자가 원할 때이다.
작가라면 독자가 원하는 글을 쓰고 싶고, 편집자라면 독자가 원하는 글을 만들고 싶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와 같은 일이 생겼을 때 독자들이 문학을 외면하지 않고 도리어 원해 주었으면 한다. 너무나도 훌륭한 소설가들이, 시인들이, 편집자들이 애써온 예술의 벽면이 자연스러운 색감으로 바래져 하나의 역사물이 된 과정에는 어디서 불어온 바람의 탓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독자가 그 벽면을 읽어내려 가고 또 거기에 기대어 온전히 하루를 보낸 덕분이라 하겠 다. 그러니 현대사회에 들어 문학과 관련하여 산재해 있는 수많은 문제를 외면하지 마시옵고, 함께 읽으며 동행해주었으면 한다. 제프리 유제니디스(Jeffrey Eugenides)가 이런 말을 했기에 문득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저는 그 독자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 독자를 신경 씁니다. ‘청중’이 아닙니다. ‘독자층’도 아닙니다. 그저 그 독자입니다. 방에 혼자 있는 그 독자. 저는 그독자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하는 중입니다.”

왜 글을 쓰십니까?

아직도 잠에 들지 못하고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그 이유야 천차만별, 처음부터 예술을 하려고 글을 쓴 건 아니라는 사람부터 어떤 믿음을 찾기 위해 글을 쓰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참 많고도 많다. 그중에서 딱 한 사람의 대답이 우문현답처럼 들려온다. “예술은 쉽습니다. 삶이 어렵죠.” 로렌스 더럴(Lawrence Durrell)이 한 말이었다.
필자는 항상 예술이 어려운 것이라 생각했다.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의 향연이 길게 이어 지면 그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예술의 한쪽을 문학이 떠받치고 있는 형국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미래도 희망도 없는 망국의 도시 같았다. 유령들이 떠돌아다니고 울음이 노래처럼 흘러나왔다.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알면서도 손바닥 뒤집듯 작품을 뒤집어 해석하면 항상 현실이 튀어나와서 힘들었다. 그래서 예술은 정말 어려운 것이라고, 이토록 유려한 거짓말을 보고 있자면 저절로 세상을 비웃게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예술은 쉽고 삶이 어렵다는 이 말이 가슴에 와 박혔을 때는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먹먹함이 느껴졌다. 오늘만큼은 이 말이 가장 정답이다. 예술을 한다는 것이 새로운 언어를 직조 해내는 일이라면, 삶을 산다는 것은 공동의 언어를 배우는 일일 것이다. 종종 예술의 장으로 침입해오는 반가운 얼굴이 있다면 그들을 우리는 필경 친구라 해도 좋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예술에는 즐거운 일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삶의 장을 빠져나가는 쓸쓸한 뒷모습을 보게 되는 일은 온전히 인생의 몫이다. 이러한 사실 때문에 우리는 이별에 대한 가장 정확한 언어를 공유하고 있어야 한다. 그러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문학은, 또한 예술은 인생의 대척 점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인생 안에 있는 것일까? 모를 일이지만 이런 구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소용없는 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다만 작가들의 로맨티시즘을 읽어낼 수 있는 밤마다 내려놓을 삶의 무게가 있다는 것을 동시에 눈치챌 수 있다. 이것이 어려운 인생과 쉬운 예술이 공존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김웅기 기자 | dndrl0314@khu.ac.kr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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