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호 영화비평: <벌새>(2019)] 1994년 서울에서 찾은 나의 이야기

연말이 되면 각종 시상식이 열린다. 매년 저런 시상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반문하면서도 결국에는 수상결과를 확인하게 된다. 이것이 상의 힘인 것 같다. 그 영화의 가치를 결정짓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그 영화를 다시 돌아보게 만드는 것. 이 글을 쓰는 11월 중에도 두 개의 한국 영화상에서 수상작을 발표했다. 작품상과 감독상은 모두 <기생충>(2019)에게 돌아갔다. 추측컨대 이후로도 <기생충>은 중요한 상을 받게 될 것이다. 물론 <기생충>의 크레딧에 영원히 소개될 타이틀은 ‘PALME D’OR (황금종려상)’이 유일하겠지만 말이다. 한국영화 100년이 되는 2019년에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이라는, 영화처럼 드라마틱한 사건을 기어이 이루어낸 것만으로도 <기생충>은 한국영화사에 반드시 언급되는 영화로 남을 것이다.

<기생충>의 해라고 불릴만한 2019년, ‘수상’이라는 사건과 관련해서 <기생충>만큼이나 주목해야 할 한국영화가 한 편 더 있다. ‘전 세계 34관왕’이라는 타이틀의 <벌새>다. <기생충>이 황금종려상이라는 한 방으로 우리에게 놀라움을 안겼다면, <벌새>는 ‘34’라는 숫자로 나의 궁금증을 자극했다. 도대체 어떤 영화이기에 그렇게 다양한 문화권에서 공감을 얻었을까?

특수한 시공간에서 보편의 이야기로

‘서울, 1994’. 영화 <벌새>를 여는 것은 시간과 장소를 명시한 이 간단한 자막이다. 자막이 알려주듯이 <벌새>는 25년 전인 1994년이라는 시간과 서울이라는 공간을 살았던 14살 소녀 은희(박지후)의 이야기다. 영화는 날카로운 초인종 울림과 굳게 닫힌 현관문을 두드리며 ‘엄마’를 애타게 부르는 은희의 모습으로 시작하는데, 열리지 않는 철제 현관문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울부짖듯 엄마를 외치던 은희는 자신이 9층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계단 한 층을 터벅터벅 오른다. 다시 초인종을 누르면 문이 열리고 은희는 엄마와 함께 문 안으로 사라진다. 은희가 애타게 엄마를 부르는 동안의 불안한 정서와 집을 제대로 찾은 후의 평상적 상황은 영화 <벌새>를 관통하는 구조다. 요컨대, <벌새>는 불안감과 평상성의 반복 속에서 14살 은희의 감정적 파고를 예민하게 포착하면서 독자적인 삶을 향해 한 걸음을 내딛는 중학생 소녀의 성장담을 써나가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 대개의 불안은 은희가 마주하는 크고 작은 폭력에 기인한다. 떡 가게를 운영하는 부모는 크고 작은 일로 싸우고 아빠는 식사 시간마다 권위적인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아빠로부터 절대적인 지지와 편애를 받는 한 살 많은 오빠는 은희를 함부로 대하는 것을 넘어 때리기까지 한다. 또래들은 공부를 못하고 경제적으로 충분히 풍족하지 않다는 이유로 은희가 나중에 자기 집 가정부가 될 거라는 말을 면전에서 한다. “우리는 노래방이 아니라 서울대 간다”라는 구호를 강제하는 담임 선생님은 ‘너희들을 위해’ 날라리 색출을 하겠다며 반 아이들에게 쪽지를 나눠주고 날라리 친구 두 명의 이름을 적어내라고 한다. 전체주의 사회나 공안 검사의 취조실에서나 볼 법한 이 말도 안 되는 일로 인해 은희는 날라리로 지목된다. 이와 같은 일상의 폭력에 어떤 보호망도 없이 노출되어 있는 은희가 빛나게 웃는 순간은 그가 사랑하거나 그를 사랑하는 사람과 있을 때이다. 영혼의 단짝 지숙(박서윤), 남자친구 지완(정윤서), 은희를 가족보다도 좋아한다는 후배 유리(설혜인). 이들과 있을 때 은희는 비로소 웃는다. 하지만 자신을 사랑한다고 믿었던 이들조차도 은희를 한 번씩은 배신한다.

글로 요약한 은희의 드라마틱한 경험과 비교해 볼때 그것을 보여주는 영화의 방식은 지나칠 정도로 담담하다. 격정적인 음악도, 요동치는 카메라 워크도 없을뿐더러, 갑작스레 찾아온 불안과 상실의 사건에서 평상적인 상황으로 넘어가는 무심한 편집은 영화의 표면을 건조하게 만든다. 하지만 표면적인 건조함과는 달리 영화의 정서는 팽팽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것은 영화가 외적 사건이 아니라 은희의 내면에서 일렁이는 감정의 파고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마주한 사건 앞에 멈춰선 채 그 사건을 이해하고자 애쓰는 은희처럼, 은희의 얼굴에 멈춘 카메라는 관객이 그의 내면에 다가갈 시간을 마련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은희에게 공감한다면 그것은 그와 똑같은 일을 겪었던 경험이 아니라 그와 똑같은 감정을 겪었던 경험 때문이다. <벌새>는 어린 여자이기 때문에 폭력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또 어른이 만들어놓은 제도 밖으로 나갈 수도 그렇다고 어른들의 이해와 보호를 받지도 못했던 수많은 ‘은희’들이 그들의 마음 깊이 묻어 두었던 고립과 불안의 추억을 끄집어낸다. 영화가 일으키는 이 정서적 파장이 <벌새>가 1994년 서울이라는 특수한 시공간에서 벗어나 누구나의 보편적 이야기로 이해받고 공감될 수 있는 이유가 되는 것이다. 은희를 주목하는 카메라가 관객들을 은희의 심연에 닿게 만드는 동안 이 영화에 사용된 또 다른 장치는 은희를 향한 공감을 프레임 바깥으로 확장시켜 나간다.

관객에게로 뻗어가는 공감과 이해의 응시

영화에서 중학생 은희와 지숙은 세상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오빠에게 맞아 입술이 찢어진 지숙은 “다들 우리에게 미안해하긴 할까?”라고 묻고, 선물을 보내온 영지 선생님(김새벽)에게 쓰는 편지에서 은희는 “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라고 묻는다. 지금까지의 한국영화 중에서 관찰자이자 화자, 그리고 주인공으로서 중학생 소녀를 전면에 세우고 그들이 목소리를 낼 기회를 주었던 영화는 없었다. 또 그들의 일상과 내적 성장을 이처럼 내밀하게 재현하는 영화도 없었다. 그런 점에서 <벌새>는 반갑고도 의외인 영화다. 내게 이 독보적인 영화를 성공적으로 만들어낸 감독의 연출만큼이나 놀랍게 보였던 건, 인물의 심연까지 포착해내려는 듯 위협적으로 응시하는 카메라를 꿋꿋이 견뎌내며 은희를 연기하는 배우 박지후의 대담함이었다. 일반적으로 영화의 카메라는 여러 인물들 사이를 오가며 반응 숏들을 담아낸다. 하지만 <벌새>의 카메라는 대부분의 러닝 타임 동안 은희를 향해있고 반응 숏은 제한적으로만 쓰인다. 이런 방식은 관객이 은희에게 집중하고 공감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지만 한편으로는 폭력적이기도 한데, 그 이유는 이러한 형식 속에서 결국 인물은 프레임에 외롭게 고립되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벌새>에도 주변 인물의 반응에 눈에 띄게 주목하면서 은희의 고립을 해소시키는 순간들이 있다.

어느 날 저녁 식사 시간, 은희는 오빠가 자신을 때린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부모에게 알린다. 하지만 이 얘기를 들은 엄마와 아빠는 “너희들 그만 좀 싸워”라며 그것이 형제들 간 보통의 싸움인 것처럼 취급하고 만다. 그때 카메라는 할 말이 있는 듯 은희를 가만히 바라보는 언니 수희(박수연)의 얼굴에 주목한다. 영화의 중반부에 은희와 찬구 지숙은 문구점에서 도둑질을 하다 들키는데, 아버지가 일하는 곳을 대라는 문구점 사장의 윽박질에 지숙이 그만 은희 아버지 가게를 말하고 마는 사건이 벌어진다. 믿었던 지숙의 배신에 울고 있는 은희를 위해 한문학원 선생님인 영지는 우롱차를 끓여주는데, 울음을 그친 은희는 집에 가면 오빠가 자기를 죽일 거라면서 “맨날 개 패듯이 때려요”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바로 이때 카메라는 은희가 아니라 마주 앉은 영지 선생님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우리는 감자전을 먹는 은희를 바라보는 엄마의 클로즈업을 만나게 된다. 영지 선생님의 죽음을 알게 된 은희는 집으로 돌아와 엄마에게 얼마 전 죽은 외삼촌이 보고 싶은지 묻는다. 등을 돌린 채 ‘그냥 이상해’라고 대답한 엄마는 다 익은 감자전을 접시에 덜어 은희에게 건네고는 옆에 앉아 감자전을 먹는 은희를 바라본다.

수희, 영지, 그리고 엄마, 이 세 인물의 반응 숏에는 공통점이 있다. 하나는 이 세 반응 숏에서 인물들은 아무 말 없이 은희를 응시하고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묵언의 응시에 은희를 향한 마음이 깃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들의 응시에는 은희를 향한 공감과 이해, 그리고 걱정과 응원이 담겨 있다. 이러한 세 인물의 반응 숏을 통해 은희는 자신을 고립시키던 프레임의 바깥으로 향하는 관계의 끈을 갖게 된다. 더 나아가, 이 세 사람의 숏은 그것을 보는 관객에게로 그 관계의 끈을 연장시켜 공감과 이해의 정서를 스크린 바깥으로까지 확장시킨다.

누군가는 ‘공감’이, 스릴, 흥분, 놀라움, 공포 등 영화가 관객에게 제공하는 여러 경험 중 하나일 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한국영화는 한때, 아니 여전히 공감보다는 다른 영화 경험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듯 보인다. 이런 가운데 등장한 영화 <벌새>는, 1994년 서울, 대치동에 살았던 작은 중학생의 이야기를 통해, 한국영화가 간과해 온 ‘공감’이 가진 넓은 확장력과 긴 여운의 크기를 우리에게 확인시켜 주고 있다.

성진수(영화평론가)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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