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9호 테마비평 : 이상과 이상문학상] 이상이라는 신화 다시 쓰기 – 「서울의 달빛 0장」에서「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까지 –

이상(1910~1937)

우리 문학의 신화, 이상

우리는 모두 신화를 원한다. 그리고 자신만의 신화를 가지고 있다. 현대의 신화는 현실의 부정성을 반영한다. 현실이 어둡고 고통스러울수록, 신화의 빛은 찬란해진다. 신화는 현실을 넘본다. 신화를 통해 현실 그 너머를 엿보며, 현실로부터의 탈주를 꿈꾼다. 때로 신화는 그 길의 한 모퉁이를 드러내 보여주기도 한다. 얼핏 드러나는, 한순간 빛났다가 사라지는 그길 때문에 신화는 살아남고 전해진다. 그러나 신화는 현실을 완전히 넘어설 수는 없다. 완전히 넘어서버린다면, 그것은 더 이상 신화가 아니라, 그냥 이야기일 뿐이다. 그래서 신화는 현실에 붙들려 있다. 매번 신화는 다시 쓰여지거나 다시 만들어져야 한다. 신화가 다시 쓰일 때, 반복되지만 똑같이 반복되는 것이 아닌 방식으로 신화가 다시 쓰일 때, 그 신화는 여전히 현실성을 갖는다. 그 신화가 현실성을 잃는다면, 현실이 더이상 ‘바로 그’ 신화를 요청하지 않는다면, 이제 다른 신화가 만들어질 것이다.

이상은 우리 문학의 신화다. 「오감도」(1934)를 연재하면서, 이상은 스캔들이 되었고, 「날개」(1936)를 발표하면서 현실에 끈을 묶었다. 문단에 평지풍파를 일으키고, 숱한 기행으로 자기 자신을 저 시궁창같은 세계 밑바닥으로 떨어뜨리면서 현실을 조롱하였고, 그리고 스물일곱에 식민 본국의 수도 도쿄에서 ‘후테이센진’(不逞鮮人)으로 구금되었다가 병보석으로 나와 “멜론을 먹고 싶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둠으 로써 신화를 만든다. 그는 오래 살지 못했고, 오래 살 수 없었다. 해방을 볼 수 없었고, 다른 세계를 살 수 없었다. 그러기에 이상은 철저하게 1930년대의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가 더 오래 살았다면, 해방을 맞았다면… 이라는 무수한 가능성들은 가능성들로 남는다. 철저한 1930년대의 존재, 그리고 현실이 되지 않은 무수한 가능성. 그것이 이상이라는 신화를 가능하게 한다. 그리고 해방 이후 이상은 신화가 된다. 막다른 골목이건 열린 골목이건 공포 속에서 질주하는 무섭고 무서운 아이로서, 거울 속의 또 다른 자신에게 총알을 발사하는 분열된 자아로서, 이카루스가 만들었던 인공의 날개로 지상을 떠나고자 했던 존재로서,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로서.

그래서 우리 교과서 속의 이상은 현대인의 ‘분열된 자아’로서만 존재 한다. 그는 현대인이었고, 현대인이어야만 했다. 그리고 분열된 자아로서의 이상과 이상의 문학은 고독하고 분열된 현대인의 표상이 되었다. 이상은 물론 현대인이었고, 철저히 현대를 살고자 했다. 그러나 현대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기괴한 기호나 ‘위트와 패러독스’로밖에 드러낼 수 없었던, 그가 살았던 ‘현대’란 어떤 존재였을까? 기교를 낳았던 그의 절망은 어디에 닿아 있는 것이었을까? 그것을 묻지 않는다면, 이상의 신화는 이상의 말처럼 ‘박제’된 신화일 뿐이고, 더 이상 의미있게 다시 쓰일 수 없다. 그러니까 이상의 다시 쓰기는 그의 절망을 물어야 하고, 절망을 낳았던 그의 현실을 물어야 한다. 그리고 그를 다시 호출하는 바로 지금의 현실을 묻지 않으면 안 된다.

이상이라는 신화 다시 쓰기, 이상문학상

이상문학상은 이상의 다시 쓰기이고, 이상이라는 신화를 다시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이상문학상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상이 여전히 우리의 신화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상 문학상의 수상작들은 이상의 신화를 다시 쓰는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떤 작품에 이상문학상을 수여함으로써, 이상의 신화가 다시 쓰이는 것이며, 그렇게 작품이 해석되는 것이다. 그렇게 이상문학상은 이상을 원한다. 그러나 1930년대의 이상은 1930년대에 묶여 있는 존재이고, 지금 반복될 수 없으며, 반복되어서도 안 된다. 이상이 필요하지만, 그 이상은 새로운 이상이다. 그렇게 이상을 다시 쓰면서 지금 우리의 시대를 해 독한다.

1977년도 제1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표지

이상문학상 1회 수상작이 김승옥의「서울의 달빛 0장」(1977)이라는 사실은 의미가 깊다. 여배우와 결혼하였다가 아내의 매춘으로 이혼한 시간강사 남편의 이혼 후 이야기인「서울의 달빛 0장」은 1970년대에 새로운 생명을 얻은 이상의「날개」이기 때문이다. ‘서울’이라는 공간 설정이나, 매춘녀/여배우라는 아내의 설정이 그러하다. 심사위원의 의도였는지, 아니면 기묘한 일치였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서울의 달빛 0장」은 이상문학상을 만나면서「날개」의 다시 쓰기가 된다. 「서울의 달빛 0장」은 철저하게 1970년대적이다. 여전히 남아 있는 ‘이혼’이라는 낙인, 여배우와 매매춘을 직선적으로 잇는 단선적 이해, 여성을 ‘음부’로 타자화하는 성의식까지 그러하다. 작가는 여성이 부분으로 쪼개지고 타자화되는 모습을 남자의 입을 통해 매우 직설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그러한 의식은 남자가 선의로 건네주는 통장을 통해, 새롭게 시작하고 싶어하는 남자의 욕망과는 다르게 이혼을 완성시킨다. 남자의 기대에 대한 배반은 남자가 갇혀 있는 한계를 드러낼 뿐만 아니라, 1970년대의 한계를 드러낸다. 작가는 작중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의 왜곡된 의식을 통해 당대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돈이냐, 사랑이냐’의 잘못된 이분법 안에 갇혀 있을 뿐만 아니라, ‘결혼’이라는 계약 혹은 그 제도에 대해서는 묻지 않고 있다.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품들의 반수 이상이 결혼과 가족을 묻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기본적인 체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암묵적으로 강제되는 결혼, 혹은 상식으로서의 결혼이 그러하다. 그러나 또한 어떤 존재들에게는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본값으로 주어지는 질곡이기도 하다. 부부간의 애정, 부모 자식간의 애정이라는 이름으로 어찌할 수 없는 기본값.

2019년도 제4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표지

그런 점에서 윤이형의「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2019)는 김승옥의「서울의 달빛 0장」과는 대척점에 놓인다.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가 문제로 제기하는 것은 ‘결혼이라는 제도’그 자체이다. 현대의 초기, 사랑으로서의 연애가 그 이전까지의 ‘결혼’이라는 계약에 의문을 던지기는 하였지만, 연애 그리고 결혼, 혹은 사랑과 결혼의 결합은 현대 사회의 재생산 조건으로서의 ‘가족’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방식이 되어 왔다. 이상이 「날개」에서 건드렸던 것은 안팎의 나의 의식에 대한 분열로 해석될 수 있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나아가서는 매춘-동거-결혼이라는 이질적으로 보이는 조합 속에서, ‘결혼’이라는 제도 그 자체였다. 이상은 「날개」를 통해 매매춘으로서의 결혼이라는 제도의 이면을 보여주었으며, 「지주회시」(1936)에서 이를 자본의 회로 속에 포섭된 존재로 드러냈던 것이다. 윤이형의 소설은 결혼 혹은 그로 인해 구성되는 ‘가족’이라는 제도를 억압적 기제로 드러낸다. 사랑과 결혼은 별개이고, 결혼과 가족 또한 실은 별개라는 사실을 확인함으로써 비로소 현대인은 ‘개인’이 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두 사람의 문제이지만, 결혼은 계약이고, 가족은 아이가 생김으로써 비로소 존재한다는 사실, 그리고 가족이란 그 안에 있는 모든 존재의 ‘희생’에 의해서만 유지될 수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뼈아픈 진실이다. 그리고 이 소설의 인물들은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남으로써 비로소 자기 자신의 삶을 산다. 이상이 그토록 원했던 현대적 개인이 이 소설에 와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신화 다시 쓰기

현대적 개인이 2019년의 소설에 와서 비로소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그것도 ‘가족 공동체’라는 관념을 벗어던지고서야 가능하다는 것은 어찌 보면 슬픈 일이다. 현대가 시작된 지 100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가능했다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라, 윤이형의 소설 속 홀로 선 개인이 소설 속의 환상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개인으로 돌아간 그들의 성취는 그들이 겪었던 고통에 비하면 너무나 안온하다. 작가가 거꾸로 ‘당신은 그 홀로 서기를 믿는가?’하고 묻는 듯하기조차 하다. 우리는 다시 물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성을 지닌, 자립적인 존재로서의 개인의 추구와 그것을 억압하는 제반 제약 조건들에 대한 싸움이란 정말로 여전히 우리의 바람이어야 하는 것일까? 그 바람의 시작 자체는 의미 있었지만, 그러나 그 바람 자체가 우리를 또 다른 질곡 속에 집어넣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이제 다른 존재를 꿈꾸며, 이상이 아닌 다른 신화를 써야 하는 것은 아닐까?

채호석 / 2019년 이상문학상 심사위원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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