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호 영화비평: <조커>(Joker, 2019)] 조커의 광기는 왜 고담 시민의 분노와 뒤섞일 수 없는가?

영화 <조커>(Joker)가 개봉 열흘 만에 320만 관객을 넘어섰다고 한다(10월 12일 현재).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이 320만을 넘어섰다니 놀라운 일이다. 이 말은 역으로 DC 코믹스와 워너 브러더스가 창조한 대중영화가 어떻게 세계 3대 국제영화제(도대체 이런 건 누가 정하는 걸까?)에서 최고상을 받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더러 ‘할리우드’ 메인스트림이 아닌 ‘미국’ 인디영화가 칸, 베니스, 베를린 등에서 최고상을 받는 경우는 있다. 그러나 주류 중의 주류인 할리우드 영화, 그것도 슈퍼히어로 영화의 외전 격인 영화가 상을 받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물론 3대 국제영화제는 언제나 할리우드에 러브콜 해왔다. 블록버스터급 영화들이 개막작이나 폐막작으로 상영된 적은 부지기수다.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할리우드만한 것은 없다. 출연 스타들의 레드카펫이 없는 축제가 무슨 축제이겠는가? 따라서 할리우드는 축제를 빛내 줄 들러리로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이번엔 들러리가 아니다. 메이저 스튜디오가 관여한 대중영화가 경쟁작에 오르는 것도 쉽지 않은데 무려 황금사자상이란다. 이것은 <조커>가 주류 대중영화 그 이상의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다는 것, 아니면 그 이상을 지닌 것처럼 보이기 위해 어떤 현란한 장난질을 했고 그것이 성공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자인지 후자인지 솔직히 난 아직 판단이 안 선다.

조커, 상징계에 진입하지 못한 광대

확실히 <조커>는 놀라운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국내 개봉 포스터는 “상상 그 이상의 전율”이라는 홍보 문구를 쓰고 있는데 결코 과장이 아니다(여기에는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같은 문구는 없다. 이런 문구는 관객의 관람의욕을 꺾어버릴 것이란 판단이었을 것이다). 영화는 조커가 어떻게 광적인 악당, 희대의 아나키스트가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을 흥미롭게 담아낸다. 조커라는 별명을 갖게 되기 전, 아서(호아킨 피닉스)는 어머니와 살고 있는 외로운 남자다. 그의 어머니 페니는 고담시의 거부로 시장 출마에 나선 토마스 웨인의 집에서 일했는데, 그가 아서의 아버지이며 자신과 아서를 버렸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전에 아서를 입양했다는 입양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이는 페니의 망상일 가능성이 높다. 페니가 망상장애를 앓고 있다는 것은 영화에서도 제시된다(만약 망상이 아니라면 토마스 웨인의 아들인 브루스 웨인/배트맨이 아서/조커와 이복형제란 얘긴데 이는 너무 막장 아닌가?).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서의 친자 여부가 아니라 그가 ‘아버지’에게 버림받았다는 결핍의 감정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대타자(the Other)로서의 아버지가 부재할 때, 아들은 오이디푸스 궤적(Oedipal trajectory)에 장애를 일으킨다. 그는 어머니와의 애착관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상상계에 머문다. 그래서 아서가 보여주는 자아도취적 행동, 즉 과장된 몸짓이나 춤, 혼잣말, 누군가에 대한 모방은 광대라는 그의 직업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에 진입하지 못한 유아적 행동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을 온전히 심리적 요인으로 돌릴 수는 없다. 여기에는 사회적 요인들도 있다. 광고판을 빼앗아 달아난 불량청소년들을 쫓아갔다가 몰매를 맞는다든가, 버스에서 자신을 쳐다보는 아이에게 재밌는 표정을 지었다가 아이 엄마에게 제재를 당한다든가, 국가에서 무료로 하는 심리 상담에서 사무적이고 냉정한 취급을 받는 것 등이다. 그에게 따뜻한 온기를 불어넣는 감정이나 기억이란 오직 그의 상상으로 만든 것일 뿐이다. 어느 누구도 그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가 웃음을 참지 못하는 장애를 앓고 있다는 것은 그에게 가해지는 폭력의 원인이 된다. 그는 지하철에서 자신들을 비웃었다고 여긴 금융회사 직원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하는데 분을 참지 못하고 그들을 쏴 죽인다. 그런데 이때부터 그는 고담시의 소외받는 사람들의 영웅이 되고, 그가 쓰고 있었던 광대 가면은 시위와 폭동의 상징이 된다.

찌질한 일베 영화? 계급 갈등에 대한 영화?

영화는 한 인간이 왜 폭력에 전염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캐릭터에 의존한다. 사실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다. 영화 제목부터 캐릭터의 이름이고 보면 너무 당연해 보인다. 팀 버튼의 <배트맨>(Batman, 1989) 시리즈, 크리스토퍼 놀란의 <다크 나이트>(The Dark Knight, 2008) 시리즈에서도 각각 조커를 연기한 잭 니콜슨과 히스 레저는 주인공인 배트맨 캐릭터를 넘어서는 놀라운 흡입력을 보여주었다. <조커>에서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그 이상이다. 그는 차별받고 소외된 ‘광대’의 좌절과 분노를 광기어린 연기로 전달한다. 홍보 문구처럼 그것은 상상 이상의 전율이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혼란은 이러한 광기가 왜 고담 시민들의 폭력적인 분노와 맞닿아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영화에서 고담시는 슈퍼 쥐가 들끓고 부패와 비리, 폭력과 폭동이 난무하는 곳이다. 이것은 이미 주어져 있다. 즉, 이러한 장치는 사회의 현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장르적 관습을 지칭한다. 고담 시민들은 “부자들을 죽여라!”같은 과격한 구호를 외친다. 브루스 웨인이 시민들을 광대 가면을 쓴 비겁한 겁쟁이로 치부하는 것을 보면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는 소외된 자들을 구원할 구세주로 자처하지만 사실 시민들을 벌레 취급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아서/조커가 당하는 차별, 혹은 시민들의 좌절과 분노가 그들이 발 딛고 서 있는 실제의 현실에서 비롯한다고 생각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이것이 장르영화로서의 <조커>와 예술적 자의식 혹은 사회적 리얼리티로 포장하려는 영화 <조커> 사이의 분열적 면모라고 생각한다.

<배트맨>과 <다크 나이트>의 조커가 그토록 매려적인 이유는 잭 니콜슨과 히스 레저의 뛰어난 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캐릭터의 내적 완결성을 추구하는 영화의 장르성 때문이다. 예술영화와 달리 장르영화는 캐릭터의 내적 심리를 예술적 자의식(예술영화에서 어떤 동기나 욕망도 없는 캐릭터의 모호성)이나 사회적 리얼리티(장르적 관습을 넘어서는 리얼리즘의 구체성)와 결부시키지 않는다. 이는 <조커>가 영화사적으로 오마주하고 있는 마틴 스콜세지의 영화들로 쉽게 설명 가능하다. 미국영화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이라면 <조커>에서 아서가 혼잣말을 하며 총을 겨누는 시늉이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 1976)의 트래비스 비클 캐릭터를 모방한 것이라는 것을 눈치 챌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서와 그가 동경하는 TV 토크쇼의 코미디언 머레이 플랭클린(로버트 드니로)의 관계에서 <코미디의 왕>(The King of Comedy, (1983)의 루퍼트 펍킨과 제리 랭포드의 관계를 떠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머레이 역으로 트래비스 비클과 제리 랭포드를 연기한 로버트 드니로를 캐스팅한 것은 감독이 의도한 바일 것이다.

<택시 드라이버>에서 트래비스는 ‘사회의 쓰레기들’을 청소하고 싶어 하며 이를 실천에 옮긴다. <조커>의 폭력성이 사회에 끼칠 해악을 걱정하는 이들도 있지만 <택시 드라이버>의 폭력성은 실제의 폭력을 유발(여배우 조디 포스터를 짝사랑한 광적인 팬이 레이건 대통령을 저격한 것)시킬 만큼 강렬했다. 그러나 <택시 드라이버>에서 트래비스의 폭력은 그가 베트남 참전 군인으로 폭력에 감염돼 있다는 어렴풋한 추정만 가능할 뿐 그 이유와 동기가 모호하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미국식 예술영화로서 이 영화가 갖고 있는 미덕이다. 반면, <코미디의 왕>에서 제리 랭포드를 납치‧감금하고 그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TV쇼에 오르는 루퍼트의 광기어린 유머는 이것이 블랙 코미디라는 장르의 틀을 유지하고 있기에 매력적인 것이다.

그러나 <조커>는 어떠한가? 이 영화가 아서/조커를 그리는 방식, 이를테면 스콜세지 영화 속 캐릭터와의 상호텍스트성, 슬로우 모션의 미학, 서사의 흐름을 끊어내는 과잉화 된 리듬과 편집은 예술적 자의식으로 가득 차 있다. 아마도 이러한 점이 베니스의 심사위원들을 매혹시켰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장르영화로서 <조커>의 폭력이나 사회적 갈등은 영화 밖의 현실에 기반을 두기 보다는 장르적으로 주어져 있다. 그런데 영화는 그러한 설정에 만족하지 않고 조커의 폭력과 갈등을 고담 시민들이 처한 사회적 리얼리티와 연관시키려 한다. 하지만 고담 시의 사회적 리얼리티란 무엇인가? 왜 고담시가 그토록 폭력과 부패가 만연한 곳인지 구조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에(이는 DC코믹스의 완결된 세계로서 이미 주어져 있다!) 이러한 연결은 설득력을 잃는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찌질한 일베들이 판치는 영화, 폭력을 부추기는 영화라는 가혹한 혹평에도 동의하기 어렵지만, 미국 사회의 구조적 폭력과 계급 갈등에 대한 저항 에너지로 가득 찬 영화라는 것에는 더더욱 동의하기 어렵다. 이것은 장르영화의 관습과 예술적 자의식, 사회적 리얼리티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기묘하게 파생된 한 편의 매혹적이고 분열적인 영화일 뿐이다.

정영권(동국대학교 대학원 영화영상학과 강사)

작성자: khugnews

이글 공유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