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호 테마비평] 사적(Private) 흔적에서 공적(Public) 기억으로 “<오발탄>과 <장마> 다시 보기”

고전영화를 다시 보노라면 시간여행을 하듯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절감하게 된다. 유사하게 지속되는 관습적 일상 속에선 느끼지 못했던 시간의 흐름, 또는 그 파장을 타고 무심히 지나쳐온 현재진행형인 현상들 속에 스며든 과거 흔적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거의 반세기 전에 만들어진 두 편의 한국영화, 유현목 감독 연출의 <오발탄>(1961)과 <장마>(1979)를 이어서 보노라면 반세기 전 분단의 아픔과 이데올로기, 전쟁이 낳은 고달픈 삶의 풍경이 그 시절 이야기로만 끝난 것이 아니란 점을 깨닫게 된다. 물론 두 편의 영화 모두 소설을 각색한 허구이지만, 오히려 시간이 지나고 나면 역사적 상징기호처럼 작동하는 것을 새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맥락 속에서 모든 인간이 동일한 현재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나 각자가 저마다의 시대 속에 존재함을 가리키는 블로흐 (Bloch Ernst, 1885~1977)의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개념을 문화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그것은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말미암은 이데올로기적 갈등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오 발탄>과 <장마>를 보고 우리가 오늘날 겪고 있는 좌우대립의 양상을 체험하고 그로부터 찾을 수 있는 공존의 길을 모색해보자.

어디로 가야하는가? 오발탄의 기억


2019년 현재, 한 세기를 기념하는 한국영화사에서 유현목의 <오발탄> 은 1959년 《현대문학》에 발표된 이범선의 단편소설 『오발탄』을 각색한 한국영화 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4·19 학생운동과 5·16 군사 쿠데타가 연이어 발생한 1960년과 1961년에 걸쳐 13개월간 제작된 이 작품은 기득권과 정치권의 부패를 고발하는 리얼리즘 특유의 효과를 보여준다.
그러나 현실을 매우 암울하게 그려냈다는 이유로 5·16 군사정권의 검열로 상영금지를 당했던 아픈 기록도 갖고 있다. 게다가 당시에는 영화텍스트를 문화유산으로 여기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영화상영 후 그 물적 근거인 프린트가 밀짚모자 장식이나 재활용 고물로 팔려나가던 시대였으니, 이 영화 프린트도 소실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다행히도 샌프란시스코 영화제 출품용 영어 자막본이 남아있어 오늘날 상영 가능한 복원본이 만들어졌다. 이런 상황을 통해 우리는 반세기에 걸쳐 이루어진 영화 매체에 대한 시대 인식의 변화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서울의 야경과 ‘가자!’란 외침은 수미상관 구조로 영화의 시작과 끝을 하나로 봉합시킨다. 창틀에 갇힌 무늬진 유리창 넘어 명멸하는 도시 야경을 배경으로 하여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 동상에 초점을 맞춘 크레딧으로 영화는 시작된다. 요란하게 자지러지는 여자들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오는 술집은 전후 황폐한 일상적 스트레스를 푸는 공간으로 제시된다. 군복 차림의 상이군인 무리가 외상술을 마시며 유리창을 깨면서 울분을 해소하는 도입 부는 개인과 가족생활 곳곳이 침투된 비관적 정서와 이후 전개될 극적 상황을 예시한다.
서울 도심과 남산자락 해방촌을 오가며 펼쳐지는 내러티브는 철호를 중심으로 그의 가족 구성원들의 남루한 일상을 따로 또 같이 짜나간다. 계리사 사무실에서 서기로 일하며 쥐꼬리만 한 봉급으로 대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는 철호는 과부하된 가장으로서의 경제적 책임을 감당하지 못해 의욕 상실에 빠진 고뇌의 인물이 다. 치통에 시달리며 열심히 근무한 후 귀가해도 실성한 어머니(노재신)가 “가자! 가자!” 외치는 소리로 진동하는 집은 빈곤해도 가족이 모여 살기에 훈훈한 안식처가 돼주지 못한다. 월급봉투를 주고받으면서도 대화는 물론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하는 부부관계, 상이군인으로 2년 전 제대한 동생 영호는 실업 상태에 낙담한 채 군시절 동료 들과 술집을 전전하며 강도질이라도 해서 돈을 벌어야 한다는 궁리에 골몰한다. 상이군인으로 제대한 애인과 헤어진 후 낙담한 동생 명숙은 미군 상대 양공주로 돈벌기에 나선다. 궁핍한 일상에 피폐해져 가는 가족 어른들 사이에서 아이 특유의 재롱을 부리는 딸의 대사 속에도 “돈 많이 벌어 올 꺼지”와 같은 식의 궁핍에 대한 욕구불만이 반복된다.
가난해도 정직하게 살아가려는 철호는 퇴근 후에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부조리한 고뇌를 치통보다 더 심하게 앓는다. 그는 밤거리 매매춘으로 경찰에 잡혀간 명숙의 보호자 자격으로 신원보증을 서고 그녀를 데리고 나올 때도 제대로 말 한마디 못 건네고 시선조차 마주치지 못한다. 드디어 그간 아파도 참으며 돈을 아끼려 못갔던 치과에 가 사랑니를 뽑은 날, 둘째 아이 해산 중 벌어진 아내의 죽음, 은행강도로 경찰에 체포된 동생의 면회……. 이 모든 상황을 연이어 겪으며 그는 택시를 타고 어디로 가야 할지 그 목적지를 모른다. 택시 기사에게 처음에는 해방촌에 가자고 했다가, 병원으로 바꾸고, 다시 중부경찰서로 바꾸는 그에게 기사와 그의 조수는 오발탄 같은 골치 아픈 취객을 만났다고 푸념한다. 그 순간 그는 택시 안에서 지겨워했던 노모의 그 “가자! 가자!”란 주문을 반복한다. 해방촌의 집도, 죽은 아내와 갓 태어난 아이가 있는 병원도, 동생이 잡혀간 경찰서도 삶의 목적지가 될 수없는 공허함은 제목처럼 잘못 발사된 ‘오발탄’과 같은 부조리한 존재로서 철호를 전후 빈민의 자화상으로 조명해낸다.

가족 비극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데올로기


<장마>는 <오발탄>보다 시기적으로 더 앞서 한국전쟁에 휩쓸린 전라도 농촌 지역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1973년 《문학과 지성》에 발표된 윤흥길의 중편소설 『장마』를 각색한 이 작품은 당대 국책성 우수영화 특혜를 받았던 ‘반공영화’의 기능을 가늠하게 해주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유신정권 시절 영화정책은 국가정책의 일환인 선전매체로 활용되었는데 그런 차원에서 외화수입권으로 보상하는 ‘우수영화’ 제도를 통해 문학작품을 원작으로 한 ‘문예영화’와 반공을 주제로 한 ‘반공영화’란 비장르적 호칭이 통용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원작에 비해 이 영화는 반공 이데올로기와 그로 인한 갈등에 초점을 맞춘 영화 내러티브는 공산주의 좌파와 애국적 우파의 부조리한 대립을 극적 구성으로 전개시켜 나간다. 그런 이데올로기 갈등을 보다 근원적인 전통적 · 무속적 제의를 통한 화해적 결말로 종교적 기능을 증명해내는 것이다.
어린 동만의 시점에 초점을 맞춘 내러티브는 외가인 외할머니와 이모, 외삼촌이 서울에서 동만이 사는 시골로 피난 내려가 함께 지내는 일상을 중심 으로 내러티브를 짜나간다. ‘ 우르릉∼ 쾅쾅∼’ 하는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장맛비 속에서 외할머니는 이가 빠지는 악몽을 꾼다. 무속신앙에 기대 아픈 세상사를 풀어가는 그녀의 불길한 직감처럼 곧이어 국군으로 전쟁터에 나간 외아들의 전사 통보가 전해진다. 이런 불상사를 겪은 후, “ 빨갱이는 다 죽어 라!”라는 탄식은 그녀의 일상을 풀어가는 주술처럼 작용한다. 피난 온 사돈 가족을 따뜻하게 보살펴주며 사랑채를 내준 친할머니와 외할머니의 관계는 사돈 가족 간의 갈등으로 점철돼나간다.
처음에는 외삼촌을 서울에서 온 대학생 엘리트라며 동경심을 갖고 대접하던 친삼촌은 마을에 들어온 인민군에 휩쓸려 빨간 완장을 찬 빨갱이가 되었다. 따라서 외할머니의 주문은 전쟁 상황이 바뀌어 인민군이 퇴각 하면서 빨치산으로 떠난 친삼촌을 저주하는 주술처럼 들려온다. 국군 아들을 둔 외가와 빨치산 아들을 둔 친가, 서로 원망하며 한 집에 살게 된 이들의 부조리한 갈등을 풀어주는 무속적 제의가 결말로 작동한다. 빨치산 아들이 돌아올 것이라고 점쟁이가 예언한 바로 그날, 커다란 구렁이가 집안에 들어온다. 그 예언에 따라 아들의 혼령이 구렁이로 집안에 들어온 것이라고 믿는 친할머니는 실신해 버린다. 그러나 빨갱이 저주를 입에 달고 살았던 외할머 니가 오히려 구렁이를 사돈 아들로 대접하며 머나먼 저승길 잘 가시라는 제의를 정성껏 올린다. 외할머니가 자신의 아들을 위해 두 손 모아 비는 소리를 멀리서 들은 친할머니는 그간 뿜어냈던 증오를 후회하며 용서를 구한다. 이데올로기 대립의 광기가 허물어지는 화해의 결말이기도 하다.

개인의 텍스트에서 우리의 텍스트로


내러티브를 지배하는 대표적인 이미지인 장맛비가 내리는 집의 처마 아래에서, 완두콩을 까며 서글픈 세상사를 읊조리는 외할머니의 모습은 <오발탄>에서 노모의 “가자! 가자!”라는 외침을 연상시킨다. 한국전쟁의 참상이 낳은 트라우마가 그들을 통해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오발탄>과 <장마>를 연이어 보노라면, 제작년도와 극적 배경인 시대 차이를 넘어 실향민과 피난민의 아픈 존재감은 좌우갈등에 말려든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의 메카니즘 속에서 오늘날 우리가 가진 이데올로기적 갈등을 극복하고 공존 상생의 길을 모색하게 해준다.


유지나 / 동국대학교 교수, 영화평론가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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