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호 인문학술] 판소리 문학, 연희에서 예술로

과거와 비교했을 때 공연 관람의 환경이 너무도 달라진 오늘날, 청중의 역할이 가장 중요한 연희의 한장르였던 판소리는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까? 판소리에서 청중이 가지는 의미에 대해 고찰해보고 그것이 오늘날에는 어떻게 변화하여야 할지 생각해보자.

판소리는 어떻게 즐기는 것인가?


판소리 연행의 구성 요소는 크게 3가지다. 소리꾼, 고수 그리고 청중. 널리 알려진 것처럼 소리판에는 1고수 2명창이란 말이 존재한다. 그런데 숨겨진 표현이 하나더 있다. 1청중(귀명창), 2고수 3명창이 그것이다. 귀명창이란 소리를 제대로 듣고 평가할 수 있는 수준 높은 청중을 의미한다. 사실 어떤 예술에서든지 창작자만큼 중요한 것은 그 예술을 제대로 이해하고 평가해 줄 수 있는 존재다. 판소리에서는 귀명창의 존재가 더 없이 소중하다. 왜냐 하면 판소리는 청중의 추임새를 통한 적극적 개입 없이 연행될 수 없기 때문이다. 추임새는 객석에서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목소리다. 장단의 빈 곳을 ‘얼씨구’라는 추임새가 메꾸어줄 때, 창자는 더 힘을 받는다. 그 추임새가 크고 많을수록 명창은 자신의 소리에 자 감을 더 얻게 된다. 좋은 소리가 아니면 추임새가 제대로 나올수 없기 때문이며, 기막힌 빈 장단에 추임새를 넣을 수 있는 청중은 귀명창이 아니고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판소리 공연에서 추임새를 넣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귀명창의 수가 급격하게 줄어서이기도 하지만, 공연 환경의 변화 때문이기도 하다. 가만 생각해보자. 서구식 극장 형태의 공연장, 그것도 객석이 어두컴컴한 가운데, 모두 숨죽여 무대 위 공연자만 쳐다보고 있는 와중에서 누가 감히 ‘얼씨구’를 외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부터 판소리가 서구식 무대에 오르게 되었을까? 더 나아가 민중예술이라던 판소리는 언제부터 이런 ‘고급예술’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을까? 판소리를 즐기는 ‘청중’의 입장에서 판소리를 살펴보면 이런 궁금함을 해결할 수 있는 많은 단초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이는 박제된 판소리의 또 다른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방향을 찾을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연희로서의 판소리: 즐기는 청중


처음 판소리는 커다란 연희판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공연 종목 중 하나였다. 큰 놀이판을 구경 가는 사람들은 무슨 이유로 그곳을 찾아갈까? 당연히 즐기기 위해 찾아간다. 특정 공연을 보면서 예술적 감동을 느끼기 위해 공연장을 찾는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인지도 모른다. 물론 사람마다 예술을 즐기는 방법은 다르다.
초창기 공연 형태가 하나의 ‘즐길거리’였음은 판소리가 향유되던 조선 후기 사회나 서구의 18세기나 비슷한 모습이다.
지금은 매우 우아하고 고상해 보이는 감상 태도로 점철되어 있는 서양 고전음악의 청중들 역시 처음에는 음악회를 ‘즐기기’ 위해 오는 경우가 많았다. 18세기 서구 유럽의 연주회는 기본 적으로 사교의 장이었다. 거기에는 음악을 진지하게 듣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저 공연장에 ‘놀러’ 오는 사람이 더 많았음을 부인하긴 어렵다. 하이든(Franz Joseph Haydn)의 《놀람 교향곡 (The Surprise)》이 공연장에서 졸고 있는 사람 들을 깜짝 놀라게 해주려고 작곡되었다는 일화만큼 더 구체적인 기록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1784년 독일 에르푸르트에서는 음악회장 내에서 맥주와 담배가 용인되었을 뿐만 아니 라 딱히 음악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기분 전환을 위해 카드놀이를 하고 있었고, 부인들이 차츰 그쪽으로 쏠렸다는 기록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초창기 판소리 공연 현장도 이와 비슷 했다. 큰 연희판 내의 다양한 공연 종목 중 하나가 판소리였으 니, 연희판의 모든 청중이 창자의 소리공력 하나하나에 집중했을 가능성은 만무하다. 어디 그뿐인가? 초창기 판소리 공연을 묘사한 자하 신위의 관극시 12수를 살펴보면, 공적 장소에서 교제할 수 없었던 청춘남녀들이 몰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있는 공간을 제공했다는 기록도 확인 가능하다. 서구의 극장이 사교의 장으로 기능했다면, 초창기 판소리 공연장은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수많은‘즐길거리’들을 핑계로 서로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초창기 판소리 청중은 판소리를 즐기기도 하지만 사실은 공연이 주는 다양한 층위의 ‘즐거움’을 ‘즐기기’ 위한 청중이었음은 분명하다.

명창의 탄생: 판소리의 대중화


처음 다양한 연희 종목 중 하나였던 판소리는 수많은 판소리 광대들의 예술적인 노력에 힘입어 독자적인 연행으로 발돋 움하기에 이른다. 소위 명창의 탄생이 판소리의 예술성을 높이는 동시에 판소리의 대중화에 앞장 선 셈이다.
정노식의 『조선창극사』(1940)를 살펴보면, 조선 후기 판소리 명창들의 다양한 일화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일화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전설 같은 이야기들이 대부분임을 확인할 수 있다. 송흥록이 진주 촉석루에서 <춘향가> 중 옥중 춘향 대목을 부르니, 음습한 바람이 불어 수십 대의 촛불을 꺼뜨리고, 반공에 귀곡성이 나는 듯 싶었다는 기록이나, 모흥갑이 평양 연광정에서 소리를 하니 십 리 밖에서도 그 목소리가 들렸다 하고, 이날치가 ‘새타령’을 부르면 진짜 새가 따라 울었다는 이야기들은 당대 명창들의 높은 소리 공력을 반증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들 명창들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입증 하는 기록일 수도 있다. 전설 같은 이야기들은 사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이야기가 더 풍부해지기 때문이다.
판소리는 실제로 19세기에 들어와 명창의 시대를 맞는다. 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들의 소리 공력은 ‘전설’ 처럼 전국을 떠돌게 되고, 이들은 당대의 스타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특정 예술이 인정받 기 위해서는 그 예술 부문을 대표할만한 스타의 탄생이 반드시 필요하다. 현대의 뮤지컬을 생각해보자. 지금과 같은 뮤지컬의 높은 인기에는 뮤지컬계의 스타가 존재 하기 때문은 아니었던가? 천만 흥행의 영화들에 이름 없는 배우가 주인공을 맡은 경우는 얼마나 될까? 그리고 이러한 모습은 서구 음악사와도 유사하다. 19세기 서 구 음 악 계 에 는 소 위 비 르 투 오 소 (Virtuoso)라 불리는 기교 중심의 연주가 들이 등장한다. 바이올린에는 파가니니 (N.Paganini), 피 아 노 에 는 리 스 트 (F.Liszt)가 비르투오소의 대표적 인물들 이다. 판소리 명창들도 이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감히 주장해 볼 수 있다. 파가니니와 리스트는 다른 연주자들에게서는 절대 볼 수 없는 소위‘초절기교(超 絶技巧)’를 통해 서양고전음악사의 새로 운‘스타’의 탄생을 보여주었다. 판소리 명창들도 이와 비슷한 데, 조선후기 8명창은 소위 자신들만의 독특한 더늠(판소리의 특정한 부분을 자신만의 것으로 다듬은 것)을 통해 더 큰 명성을 얻어냈기 때문이다.

연희에서 예술로: 진지한 청중의 등장


하지만 남이 흉내 낼 수 없는 독창적인 기교만으로 예술성을 획득할 수는 없다. 판소리가 독창적인 예술로 자리 잡은 데에는, 판소리를 단순한 ‘즐길거리’로 여기지 않고 판소리를 진정으로 애호하는‘진지한 청중’의 등장이라는 새로운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중적인 ‘스타’로 자리매김했던 판소리 명창들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자신들만의 독창적인 더늠을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 더늠의 등장 시기는 역설적으로 판소리 12마당이 6마당에서 다시 5마당으로 축소 되는 시점과 비슷하다. 전체적인 판소리 레퍼토리는 축소되었으나, 각각의 독창적인 더늠의 개발로 말미암아 전승되는 판소리 내에서는 다양한 유파의 분화와 아울러 판소리 연행의 예술성 확대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던 판소리 전승 5가(<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수궁가>, <흥 보가>)는 그 인기에 힘입어 명창들에 의한 끊임없는 재해석으로 말미암은 새로운 더늠의 생산으로 더 높은 예술성을 획득하게 된다. 즉 전승 5가는 판소리 레퍼토리 내에서 하나의 ‘고전’ 의 위치를 선점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는 분명히 양반이라는 새로운 청중의 등장이 놓여있다. 양반들은 판소리를 하나의‘즐길거리’로 보지 않았다. 이들은 판소리를 하나의‘취(趣)’ 와 ‘벽(癖)’으로 여기면서 판소리 명창들의 후원자, 즉 패트론(Patron)을 자처하며 판소리의 새로운 예술성을 확보하는데 앞장서게 된다. 특히 이때부터 판소리 연행의 공간은 넓은 야외나 누상(樓上)에서 방 안으로 축소되기에 이른다. 방 안이라는 공간은 주목을 요한다. 방 안에서 불리는 판소리는 큰 발성을 요구하기 보다는 세세한 소리 공력에 집중하게 된다. 즉 소리 하나하나의 변화와 목구성의 다양한 쓰임이 판소리의 예술성을 판단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잡게 되는 셈이다.
양반들은 이렇게 판소리의‘집중적 청취’를 통해 판소리에 대한 ‘진지한 청중’으로 새롭게 그 위치를 설정하게 되고, 이들의 후원을 통해 판소리는 대중화된 예술에서 수준 높은 고급 예술로 그 위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를 맞는 다. 즉 판소리는 이 시기에 이르러 진정한 ‘판소리만의 청중’을 만들어 낸다. 소위 지금 ‘귀명창’이라고 불리는 수준 높은 청중은 이 시기에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제 판소리는 더 이상 연희판의 볼거리 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명창’이라 불리는 전문적인 가객에 의해 공연되는 전문 예술 혹은 고급예술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특히 ‘방 안’이라는 새로운 연행 공간을 획득하여 소위‘성음놀이’를 통한 ‘집중적 청취’가 가능한 예술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에는 판소리에 대한 ‘진 지한 청중’의 등장이 그 궤를 함께함은 분명하다.

오늘날 판소리 공연의 모습

판소리 청중의 분화 : 또 다른 대중성과 예술성 취향의 청중들


19세기 말 대원군의 애호로 말미암아 궁중에까지 진출한 판소리는 20세기 초반 국권의 침탈과 아울러 서구식 극장의 등장 이라는 새로운 연행환경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극장의 등장은 그간의 판소리 연행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게 되며, 판소리를 대하는 청중의 태도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20세기 초반 판소리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판소리가 창극이라는 새로운 형태로 분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창극은 원각 사라는 서구식 근대 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극장은 당대 도시인 들에게 새로운 장소로 기능하고 있었다. 일상의 여유를 확인할수 있는 문화 공간으로, 동시에 사교의 공간으로, 그리고 새로운 연예 담론의 생성 공간으로 활용되었던 것이다. 극장을 통한 판소리 혹은 창극의 연행은 당대 청중들에게 판소리를 새로운 의미로 다가서게 했다. 극장을 통한 판소리의 향유는 양반 사대부와 중인을 중심으로 하는 진지한 청중의 확대 양상과는 다른 청중의 확대를 불러왔다고 볼 수 있다. 즉 근대적인 극장 공간은 극장 주변의 도시인들에게 새로운 일상을 제공했던 것이다. 어느 정도 상설되는 공연은 더 대중적인 청중들을 포섭하게 된다. 앞서 살핀 것처럼 극장은 일상의 문화공간으로 자리매김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판소리는 앞선 시대에 진지한 청중의 요구로 높아진 예술성을 극장이라는 대중적 무대에 맞게 다시 변화시켜야 하는 문제를 가지고 있었다. 즉 판소리는 극장의 다양한 연희물 중 하나로 기능하면서 다시 대중적인 청중들의 요구에 대응하게 된다.
20세기 초반 《대한매일신보》의 당대 극장 풍속에 대한 다양한 관계기록을 살펴보면, 이 당시 극장의 판소리 청중은 판소리를 ‘즐기기’위한 모습이 대부분이다. 극장 내에서 먹을 것을 파는 아이는 분리된 남녀 객석을 오가며 쪽지를 전달하기 바쁘 고, 소리 공연에는 관심 없이 웃고 떠드느라 정신이 없다는 불평과, 분리된 남녀 객석에서 서로 손가락질 하느라 정신없다는 지적은 18세기 서구 극장에서 벌어진 서양고전음악 공연에서의 청중과 다를 바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극장에서 판소리를 ‘즐기기’위한 청중의 반대편에는 판소리를 ‘진지하게’ 대하는 청중의 존재도 분명했다.
1907년부터 취입된 소위 유성기 음반의 향유를 통해 진지한 청중들은 판소리를 음반이라는 매체로 향유하기에 이른다. 축음기를 통해 판소리를 ‘진지하게’ 향유하고자 했던 청중들이 분명 ‘양반’과 같이 높은 경제적 지위에 오른 이들이었을 것임은 분명하다. 1945년 이전까지 발매된 국악 음반 6,000여종 중에서 판소리 음반이 차지하는 비율은 20%가 넘는다. 주목을 요하는 것은 음반이라는 매체가 음악의 선별적 청취를 가능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 진지한’ 청중은 더 이상 ‘즐기는’ 청중에게 방해받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명창의 좋아하는 소리 대목을 아무런 방해 없이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청중 취향의 분화는 1930년대에 이르러 소위 이전 세대의 전설적인 명창들의 소리를 재현한 명창제 음반의 등장으로 확연하게 드러난다. 일제강점기 판소리는 슬픈 정서가 강한 계면조가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는데, 판소리 음반은 이러한 취향을 반영 하면서도 동시에 예전 소리를 재현한 명창제 음반의 발매를 통해 판소리의‘진지한’청중의 취향 분화에도 적절한 반응을 보여준 셈이다.
따라서 일제 강점기 판소리 향유층은 극장을 통한 대중적 속성을 지닌 예전의 ‘즐기는’ 청중과 판소리의 ‘성음놀음’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진지한 청중으로 분화될 뿐만 아니라, 유성기 음반의 향유층도 대중적인 판소리에 관심을 가지는 청중과 고제(古制)소리와 같은 수준 높은 판소리를 애호하는 소위 귀명창과 같은 청중으로 분화되기에 이른다.

이제 예술에서 연희로


청중의 다양한 분화는 그 자체로 판소리가 높은 예술성과 대중성을 함께 확보했다는 증거가 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판소리가 보여주었던 이러한 모습은 지금 찾기 어렵다. 판소리는 21세기 화석화된 전통예술의 하나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즐기는 청중, 진지한 청중, 대중적 취향의 청중, 전통적 취향의 청중으로 분화되는 다양한 모습 하에서도 판소리는 예전과 같은 생명력을 지닐 수 없다. 이는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일제 강점기, 새롭게 등장하는 온갖 ‘신문물’ 속에서 판소리는 그저 소위 ‘전통’의 모습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실 전통예술이 그 형식을 변화시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판소리가 당대의 시대 상황을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데 있다. 판소리가 민중예 술로 사회상을 반영하면서, 즉 청중의 취향에 밀접히 호응하면서 발전해 나간 것과는 전혀 다른 길을 걸은 셈이다. 실제로 1930년대 판소리 명창들은 판소리가 당대의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살아 숨 쉬는 예술로 기능하지 못하고 있음을 이미 눈치 채고 있었다. 즉 판소리는 일제강점기 하에서 그 시대에 알맞은 시대정신을 예술로 보여주는 데 실패하고 있었다. 그저 전통으로 회귀하는 볼거리는 사람들의 관심 에서 잊히기 마련이다. 그렇게 판소리는그 명맥이 끊길 위기에 놓이게 된다. 판소 리가 그나마 지금과 같은 모습을 보존하게 된 것은 ‘무형문화재’라는 제도 안에서 보호받았기 때문이다. 판소리를 즐기는 청중이 거의 사라진 이상 제도의 보호 외에는 그 명맥을 보존하기 어려웠음이 분명하다. 예술이 제도 안에서 기능하게 되면, 이는 올바른 예술의 장(Field)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판소리의 남은 생명력은 ‘무형문화재’ 제도 하에서 더 약화되었다. 제도 안에서 판소리는 스승의 소리를 오롯이 보존하는데 그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무형문화재 제도를 무조건 비판할 수만은 없다. 무형문화제로 보호받는 동안 판소리는 그나마 그 형태를 온존히 보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화석화된 판소리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 넣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판소리에는 새로운 청중이 필요하다. 하지만 현대의 수많은 공연예술들과 경쟁하기에 판소리가 가지고 있는 예술성의 한계는 분명하다. 판소리의 현 위치는 명맥을 보존하고 있는 ‘전통고급예술’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도 판소리의 ‘진지한 청중’은 남아있다. 소위 귀명창이라고 불리는 극소수의 존재들이 그것이다. 하지만 판소리가 이들만을 위한 예술로만 남아야 할까?
앞서 살핀 바와 같이, 1930년대 명창들은 판소리가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지 못하고 있음을 스스로 깨닫고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판소리가 민중예술에서 고급예술로, 더 나아가 전국의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대중예술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판소리가 당대 사회의 시대정신을 반영한 예술성을 확보했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보자. 춘향은 기생이다. 기생에게 정절은 요구되지 않는다. 요구되지 않는 윤리를 춘향 스스로 지켜낼 때, <춘향가>의 예술성은 빛을 발한다. 하지만 지금의 <춘향가>에 씌워져 있는 굴레는 낡은 정절의 가치뿐이다. 춘향의 가치를 다시 해석해 낼 수 있다면, 이 시대에 맞는 의미를 새롭게 부여할수 있다면, 판소리는 다시금 우리 주변에서 함께 즐길 수 있는 예술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판소리 사설만이 아니라 그 연행에도 생명력을 부여하는 방법은 판소리를 ‘고급전통예술’이라는 위치에서 다시 ‘일상의 연희’라는 장소로 내리는 데 있다. 이 시대의 일상에서 찾을 수 있는 이 시대의 정신을 반영할 때 판소리는 진정한 의미의 생명력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서 유 석 /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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