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호 특강취재: 다중지성의 정원, <질 들뢰즈의 영화 철학과 포스트 시네마의 시간>] 디지털 시대의 리얼리즘

매체의 변화는 세계의 변화이다. 스탠리 큐브릭(Stanley Kubrick)의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 2001 A Space Odeyssey> (1968)에서 유인원이 공중으로 던진 뼈가 다음 순간 우주선으로 변하는 장면은 매체 변화의 형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매체의 변화는 뼈에서 우주선으로의 변화처럼 순간적이고 전복적이다.

이번 특강취재는 디지털 영화의 시간성을 주제로 한 장미화 강사의 <질 들뢰즈의 영화 철학과 포스트 시네마의 시간> 강좌를 매개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구어에서 문자로, 그 후 인쇄를 거쳐 사진, 영화까지,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시대의 급진적 사유변화를 이끌었다. 그리고 현재 우리는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다.

디지털, 매체인가

디지털은 그것을 하나의 매체로 인정할 것인지의 논의부터 시작해야 할 만큼 전복적이다. 인쇄물, 회화, 사진, 필름영화는 모두 인간의 시각적 경험을 모방하여, 빛의 분산이라는 자연법칙에 따라 탄생한 결과물이다. 회화에서 사진으로 매체의 변동이 일어났을 때 사진은 디지털과 같은 기계적 산물로 인식되었으나, 빛의 조절에 의한 형상추출이란 점에서 사진은 자연법칙을 따르는 아날로그 장치였다. 하지만 디지털에서 빛은 모두 수학적 부호로 변환된다. 디지털에선 ‘적정한 지분의 자외선’ 없이도 픽셀을 통해 이미지를 나타낼 수 있다.

초기의 디지털 기술이 기존의 프린트와 시각 작품들을 디지털로 재처리하는 것에 불과할 때 디지털은 새로운 매체로 인정받지 못했다. 기존의 매체를 통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매체 보완적 위치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번역가의 지위가 작가의 보완적 위치에 있었던 것과 같이 디지털 기술은 기계적 테크닉으로 과소평가 되었다. 하지만 현재 디지털 기술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창조력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 <프로메테우스 Prometheus> (2012)의 오프닝 시퀀스에서 인간을 창조한 태초의 생명체는 정체불명의 검은색 유기체를 마시고 온몸이 부서진다. 이때 관객은 태초 생명체의 혈관으로 들어가 그의 세포가 파괴되고 DNA 구조가 무너지는 광경을 본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처리된 이 장면은 디지털 영화에서 이미지는 더는 실재하는 이미지의 빛의 기록이 아님을 보여준다. 실제와 애니메이션 사이의 경계는 무너지고 카메라 뒤엔 컴퓨터가 있다. 이제 디지털은 매체로 인정할 것인지의 논의를 넘어 매체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필요를 만든다. 물질세계의 이미지를 매개하지 않고 이미지를 만들어냄으로써 디지털 기술은 그 자체로 원본 이미지가 된다.

디지털 시대의 리얼리즘

디지털 시대에 원본의 문제, 리얼리즘의 문제는 실제적 진실의 여부를 심판하지 않는다. 디지털 시대의 리얼리즘은 매체의 창을 통해 여과된 ‘실제’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실제보다 더 실제적인 이미지를 위해 거짓 이미지를 만드는 일이다. 로도윅은 이를 ‘지각적 리얼리즘’이라 부른다. 지각적 리얼리즘에선, 물질적 현실과의 일치 여부가 아니라 무에서 이미지를 창조하는 상상의 자유로운 통치가 핵심 기준이 된다. (로도윅, 2007) 장미화 강사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그래비티 Gravity> (2013)에 나오는 13분가량의 롱테이크를 예로 들며 디지털 합성 이미지에 의한 관객의 관람성 변화를 설명한다. 로왈스키의 우주 유영을 따라 움직이는 카메라는 속도를 조절하며 망원경을 수리하는 스톤박사와 엔지니어 셰리프, 그리고 지구를 비춘다. 카메라는 목표 대상에 포커스를 잡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산보하듯이 미끄러진다. (벤야민은 19세기 도시의 변화에 따라서 등장한 새로운 도시인의 존재 양식을 나타내는 말로써 이들을 산보자(flaneur)라 이름 붙였다) 강사의 말에 따르면, 합성 이미지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지속은 이미지의 변용된 간격과 틈새들을 나타내서 인간적 지각, 즉, 우리가 살면서 길들여온 지각을 넘어서는 비인간적 지각을 부상하게 한다. 컴퓨터 그래픽 픽셀의 틈새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미지를 구현해낸다. 흑백 브라운관을 통해 달착륙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암스트롱 옆에서 흔들리는 깃발에 이미지 조작을 의심했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의 흔들리지 않는 카메라는 그 자체가 틈새가 되어 조작을 전제한다. 부유하는 픽셀들은 수학적 부호로 변환되어 매끄러운 이미지가 되고 이제 누군가는 흔들리지 않는 깃발에서 리얼리즘의 문제를 제기한다.

0과 1로 구성된 기계적 부호들은 선명하고 생생한 이미지로 우리 눈앞에 나타난다. 카메라 렌즈를 시간에 노출시켜 실제 세계의 이미지를 기록하는 아날로그 방식과 달리 디지털에서 시간은 지속의 개념이 아니다. 인과관계의 굴레에서 벗어난 디지털은 현재를 나타내기 위해 과거를 노출시킬 필요가 없다. 그저 숫자를 입력하기만 하면 그에 맞는 정확한 이미지가 해당 시간에 추출된다. 들뢰즈가 인과론으로 환원되지 않는 시간-이미지를 운동-이미지와 구분한 것은 오직 디지털 영화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었지만 시간-이미지의 개념은 디지털 이미지를 일정 부분 설명해준다. 들뢰즈는 “문제는 더 이상 이미지들의 연합을 통한 내러티브의 전달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이미지 사이의 틈새, 즉 각각의 이미지들이 공허로부터 잡아 뽑혀져서 다시 그리로 떨어지게 하는 간격이다”라고 시간-이미지를 설명한다. 필름영화 <거울 Zerkalo> (1975)에서 거장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는 현재와 과거를 뒤섞어놓고 인과관계에 의존하는 내러티브를 거부함으로써, 영화 안에 기존의 물리법칙과 다른 시간관념을 창조하는데 두려움이 없다. 디지털 이미지를 허구의 이미지라고 말하는 것은 틈새에 대한 인간의 원초적 두려움이다.

지구와는 다른 물리법칙이 적용되는 우주 공간에서 디지털 기술은 그 진가를 발휘한다. 그것은 제작자가 직접 우주로 나가 영화를 제작할 수 없는 현실성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기존의 물리법칙을 따르지 않는 디지털의 새로운 존재 양식 때문이다. 중심적 정향성(time orientation)이 없는 부유하는 픽셀들 사이에서 기준이 되는 고정좌표는 존재하지 않는다.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유인원이 던진 뼈가 공중에서 회전하며 중력에 의해 다시 떨어질 때 카메라는 솟구치는 뼈를 따라 올라가다 대상을 잠시 놓친다. 그리고 몽타주를 통해 카메라는 놓친 뼈를 찾아 그 또한 급격히 솟아 다시 대상을 포착한다. 곧바로 이어지는 우주 이미지에서 카메라는 대각선, Z축으로 이동하며 어느 방향으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유영하는 우주선과 그 옆에 떠 있는 지구를 매끄럽게 잡아낸다. 이 우주 장면은 디지털로 구현한 것이 아니라 미니어처를 이용해 아날로그로 찍은 이미지였기 때문에 여전히 필름의 시간성을 가지고 있지만, 카메라의 이동과 몽타주의 이용방식은 아날로그와 구별되는 디지털의 특징을 묘사한다.

디지털 영화에서 시간성과 지속성은 몽타주를 통해 나타나지 않는다. 디지털 합성기술은 컷과 컷을 이어 붙이는 몽타주 대신 이미지 내에서 요소들을 결합해 나타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이미지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그것이 물질적 대상에 대한 지시적 형상이 아닌 디지털 부호로 이루어진 추상적 상징 구조라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한다. 공간적 유사성의 힘 때문에 우리는 디지털 기록이 상징적 형식이라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다. (로도윅, 2007)

디지털 매체는 사진과 같은 기계적 기록시스템이 아니다. 디지털은 실제를 매개하는 가교역할을 넘어 시각 이외의 영역에서 세계를 인지하는 포스트-휴먼적 존재양식의 형상이다. 매체논의에서 이미지의 재현은 현실의 제시가 아니고, 디지털은 상상적 현실을 제시하며 가상 이미지를 재현한다. 실제가 틈새로 이루어져, 지시 대상이 항상 의미를 비껴가는 상징 구조라면 비물질을 통해 물질세계를 나타내는 디지털은 실제를 표현하는데 더 알맞은 리얼리즘적 매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중지성의 정원에서 열린 ‘질 들뢰즈의 영화 철학과 포스트 시네마의 시간’ 강좌는 지난 4월 16일부터 매주 화요일 디지털 매체론을 연구한 장미화 강사가 진행했다. 들뢰즈의 시간-이미지 개념을 디지털 영화에 적용해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하며 강좌는 6월 18일까지 이어질 예정이다.

허승모 | suam3480@khu.ac.kr

작성자: khugnews

이글 공유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