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호 테마서평: 매체이론] 매체와 인간: 매체에 대한 또는 매체에 의한 사유


『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사진의 작은 역사 외』 (발터 벤야민, 길, 2007)
『기록시스템 1800 1900』 (프리드리히 키틀러, 문학동네, 2015)
『 20세기의 매체철학』 (심혜련, 그린비, 2012)

디지털 원주민의 등장

얼마 전 수업시간에 ‘매체와 사유의 변화’라는 주제로 학생들이 발표하고, 그 내용을 중심으로 토론을 한 적이 있다. 이들은 미셸 세르(Michel Serres)의 말처럼, 머리를 손에 들고 다니는 새로운 세대인 것이다. 이들에게 디지털 매체는 더 이상 새로운 매체가 아니다. 그저 매체일 뿐이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디지털 매체에 익숙하다. 디지털 공간에서 자료를 검색하고, 이를 토대로 사유하는 세대다. 한 마디로 말해서 ‘디지털 시대의 이주민’이 아니라, ‘원주민’인 것이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원주민 안에서도 또 구별이 진행된다는 점이다. 이들은 수업시간에 자신과 ‘요즘 아이들’을 구별한다.

그들에 따르면, 자신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지식인에서 검색한 ‘지식인 세대’였다면, 요즘 아이들은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찾는 ‘유튜브 세대’라는 것이다. 요즘은 유튜브에서 동영상을 찾아보지, 자료를 검색해서 읽지 않는다. 그것도 영상의 길이가 5분이 넘으면 보지 않으려고 한다. 내가 많은 시간을 TV와 영화를 보며 많은 시간을 보낼 때, 나는 나의 부모에게 전형적인 요즘 아이였을 것이다.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기 보다는 주로 검색하는 세대는 나에게 요즘 아이이다. 그런 요즘 아이들에게도 또 다른 요즘 아이들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 이렇게 요즘 아이들은 항상 존재한다. 늘 존재하는 요즘 아이들을 규정할 때, 그들이 살고 있는 매체환경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왜냐하면 매체는 단지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방식, 사유방식, 지각방식, 소통방식 등등을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매체로 구성된 일종의 ‘매체 생태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매체에 대한 이해와 평가는 야박하다.

특히, 새로운 매체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낡은 매체를 중심으로 형성된 세계가 새로운 매체에게 쉽게 문을 열어주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움은 그 이전의 것들을 낡음으로 만들어야 가능하다. 새로움을 새로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 않다.

낡은 매체와 새로운 매체

새로운 매체는 항상 경계의 대상이었고, 낡은 매체를 소멸시킬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등장했다. 구어가 지배적인 매체였을 때, 문자의 등장은 기존의 기억과 학습 체계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다. 인쇄의 등장도 마찬가지다. 그 이후, 사진, 영화, 텔레비전 그리고 현재의 디지털 매체에 이르기까지 그 시대에서의 새로운 매체는 늘 양가감정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새로운 매체는 단지 새로운 매체의 등장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기존의 지배적인 권력, 지식과 정보 그리고 예술문화 영역에서의 변혁을 의미하기도 한다. 매체에 의해 매개되는 다양한 영역에서 새로운 매체를 중심으로 이전과는 다른 양상들이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반적인 변화에 철학적인 사유를 전개했던 이론가들은 매체를 단지 매체로만 인식하지 않는다. 이들은 매체를 넘어 그것이 매개하고 있는 사유, 예술 그리고 결국 인간 그 자체에 대해 사유를 확장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이 그 예다. 그는 현재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는 매체미학(Medienästhetik)의 선구자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매체미학을 직접 주장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사유 체계가 현대 매체미학이 지향하는 지점과 다르기 않기에 그를 매체미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기술복제 시대에서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snischen Rerproduzierbarkeit), 1936) 은 거의 80년 전의 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현재성을 갖는다. 그 이유는 단지 기술복제 시대에서만 해당되는 변화를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매체와 감각 그리고 매체와 예술 등을 둘러싼 전반적인 변화와 그것을 바라보는 이론적인 틀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매체의 등장을 두 가지 측면에서 분석했다. 하나는 새로운 매체가 어떻게 낡은 매체의 세계를 해체 그리고 보완하는지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새로운 매체가 만들어내는 새로움은 무엇인지를 분석했던 것이다. 그는 낡은 매체와 새로운 매체 간에 성립될 수 있는 ‘매체적 변증법’을 정확히 사유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사진과 영화를 중심으로 전통예술과 새로운 예술관계를 분석한 그의 글들은 가장 중요한 매체미학적 텍스트가 되었다. 그의 사유방식은 이후 매체미학 또는 매체철학에 이론적 출발점이 된 것이다.

벤야민 이후의 매체담론

아쉽게도 벤야민 이후 매체에 대한 논의는 인문학적 담론에서 치열하게 전개되지 못했다. 사유를 다루는 학문들은 그것을 전달하는 매체를 내용보다는 이차적인 것이며 또 도구로 파악했을 뿐이다. 예술문화 영역에서의 상황은 더 좋지 않았다. 대중매체의 등장을 기존 예술문화의 몰락으로 또 기존 예술문화의 몰락은 교양의 몰락으로 받아들이는 경향들이 강했기 때문이다. 마샬 맥루언(Marshall McLuhan)의 매체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이러한 일반적 경향 속에서 그는 매체가 전달하는 내용이 아니라, 매체 형식에 주목했으며, 더 나아가 이를 인간의 감각과 연결시켰기 때문이다. 매체의 확장을 감각의 확장으로 말이다. 비록 많은 부분에서 벤야민과 맥루언은 다르지만, 이 지점에서는 맥루언은 벤야민과 마찬가지로 매체미학자라고 볼 수 있다. 맥루언 이후 매체의 상황도 디지털 매체로 전환되었다. 그 이후 매체와 인간을 둘러싼 상황은 극적으로 변했다. 많은 사상가들이 이에 대해 사유하기 시작했다. 이제 더 이상 매체를 단지 도구나 수단으로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매체를 둘러싼 사유들은 이전과 달리 좀 더 정교해졌으며, 매체의 영향력에 대한 논쟁도 테크노피아적 관점과 테크노디스토피아적 관점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동일한 현상에 대해 진단과 전망은 너무도 다른 경우들도 있었다.

축소와 확장, 소멸과 생성 등등의 용어로 이들 현상에 대한 진단들은 양립 불가능하게 전개되기도 했다. 이러한 논쟁들은 매체담론들을 풍요롭게 만들기도 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프리드리히 키틀러(Friedrich Kittler)의 작업이다. 키틀러는 문학사를 매체사로 전환시켜, 기존의 문학사를 재조명하는 작업을 시도했다. 그 결과물이 『기록시스템 1800-1900』(Aufschreibesysteme 1800-1900, 1985)과 『그라모폰, 필름, 타자기』(Grammophon Film Typewriter, 1986) 이다. 그는 『기록시스템 1800-1900』에서 기존의 문학사 서술의 방식을 뒤집었다. 내용중심이 아니라, 전달되는 매체에 의해서 변화되는 문학의 역사를 서술함으로써 말이다. 문학사가 매체사로 정신과학은 매체과학으로 대체된 것이다. 키틀러의 이러한 시도들은 그 이후에도 많은 논쟁을 일으켰고, 그 결과 매체담론은 학문적으로 깊어지고, 이를 다루는 영역 또한 넓어졌다.

이렇듯 서구에서는 매체를 둘러싼 담론이 매우 치열하게 그리고 다양하게 전개되었고, 여전히 그렇다. 상호학문적인 ‘매체학(Medienwissenschaft)’의 등장이 바로 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매체학이라는 이름으로 다양한 분과들이 보여 함께 연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상황은 어떠한가? 아쉽게도 한국에서의 매체미학과 매체철학적 담론들은 여전히 시작 단계에 머무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관련된 자료들을 검색해 봐도 알 수 있다. 이 주제로 책들을 검색하면, 몇 권 검색되지 않는다. 이게 현실이다. 부족하다고 그리고 늦었다고 생각하는 지금, 더 이상 늦지 않게 상호학문적인 매체학을 위한 논의가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20세기의 매체철학을 넘어 지금과 여기에서 진행되는 21세기의 매체철학이 필요한 때인 것이다.

심혜련 / 전북대학교 과학학과 교수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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