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호 인문학술] 한국 대중음악의 작은 역사

이번 인문학술 지면에서는 이제껏 본보에서 다룬 적 없던 한국 대중음악사를 소개하고자 한다. 대한민국의 음악이 세계적으로 알려진 오늘날. K-POP 이전 한국에서의 대중가요라는 것이 무엇이었고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살펴보겠다.

단번에 읽는 한국 대중음악의 작은 역사

대중과 한국 대중음악의 탄생1)

대중음악은 언제부터 였을까? 대중음악의 탄생은 대중의 탄생을 전제로 한다. 다시 말해, 대중이 있어야 대중음악도 형 성될 수 있다. 그런데 대중이라는 것이 분명한 실체가 있는 것 이 아니다. 즉 어떤 사람이 어제까지는 대중이 아니었다가 오 늘부터 대중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대중이라고 할 때, ‘대체로 지위·계급·학력·재산 등의 사 회적 속성을 초월한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1894년에 있었던 갑오경장과 동학혁명은 중요한 사건이 된다. 갑오경장으로 신분제가 철폐되면서 혈통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는 신분제가 힘을 잃거나 소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동학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민중혁 명 운동인 동학혁명은 아래로부터의 혁명을 보여주었다는 점 에서 매우 중요하다. 요컨대 두 사건 모두, 이후에‘대중’이 출현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되었다고 본다.

1894년을 전후로 해서 유행했던 노래로는“새야 새야 파랑새 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로 시작하는 ‘새야 새야 파랑새야’와 ‘(구)아리랑’을 들 수 있다. 전자는 동학혁명 이후, 지도자 전 봉준이 처형되자 이를 안타까워한 민중들이 불렀던 노래이다. 후자는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나운규의 영화 <아리랑>(1926) 속 주제가 ‘아리랑’ 이전에 유행했던 ‘(구)아리랑’이다.

1894년경에 유행한 ‘(구)아리랑’은 도쿄(東京) 하쿠분간 (博文館)에서 간행한『신찬 조선회화(新撰朝鮮會話)』에 소개 되었다. 일본『유우빈호우치신문(郵便報知新聞)』1894년 5월 31일자 3면에「조선의 유행요(朝鮮の流行謠)」라는 제목의 기 사에서도‘산간벽지의 아이들이나 포구의 아이들까지도’부 르는 노래라며 ‘아리랑’을 소개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구)아리랑’과 다르지만 1890년대 전후에‘아리랑’이 크게 유행했던 정황만은 확인할 수 있다.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1863~1949)는 1896년에 발 간된「The Korean Repository」2월호에‘Korean Vocal Music’이란 글에서‘(구)아리랑’을 소개한 바 있다. 헐버트 는 한국인을 대표하는 노래인 ‘(구)아리랑’이 하나의 선율에 즉흥적인 사설을 무한히 얹어 부를 수 있는 노래이면서 한국 인에게 가장 인기 있는 밥과 같은 노래라 하였다. 이처럼 1894 년을 전후로 유행한 노래들에서 불특정 다수의 대중이 향유하 는 대중음악 내지 대중가요의 초기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본격적인 의미의 대중음악 내지 대중가요가 등장하 려면 조금 더 시간이 필요했다. 특히 ‘작사자와 작곡자가 자신 의 이름을 내걸고 음반 등의 대중매체를 통해 대중에게 유통 할 목적으로 만든 작품이자 상품이며, 전문적인 가수가 부르 는 것을 특징으로 하는 음악’을 의미하는‘협의의 대중가요’ 는 음반 산업의 시작과 더불어 언급할 수밖에 없다.

유성기의 등장과 음반 산업의 발달은‘대량 생산’과‘대량 소비’를 가능하게 하였다. 즉 마셜 매클루언(Herbert Marshall McLuhan, 1911~1980)의 표현처럼, 유성기가‘장 벽이 제거된 음악당’을 낳았다. 우리나라에서는 1907년부터 상업 음반이 발매되면서 본격적인 의미의 대중음악이 형성되 고 전개될 환경이 조성되었다.

한국 대중음악사의 시기 구분 및 양상2)

어떤 대상을 놓고 그 통시적 흐름을 살펴보는 일은 쉬운 일 이 아니다. 시기 구분에서부터 어려움에 봉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시기 구분을 하여 특정 대상의 흐름을 살펴보는 것 은 그 대상을 온전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제까지 한 국 대중음악사의 시기 구분은 보통 10년 단위로 하는 것이 일 반적이었다. 하지만 10년 단위로 흐름을 살펴보는 것이 편리 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온전하게 대중음악의 시대적 변천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대중음악 자체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 시기를 구 분하기 위해 고려할 것은 무엇일까? 많은 것들이 있겠으나, 양식(style)의 변화, 기술의 변화, 산업의 변화, 매체의 변화, 음 악 관련 제도의 변화, 정치 상황의 변화, 감수성의 변화 등을 고려할 수 있다. 각 기준은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보다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다. 이 모든 기준을 포괄하지는 못하더라도 음반 산업과 기술의 변화 및 제도의 변화 등을 중심으로 편 의상 대중음악사의 시기를 구분하면 다음과 같다.

▲ 한국 대중음악사의 시기 구분 ⓒ필자제공

태동기는 우리나라에서 첫 상업 음반이 발매되었던 1907년 부터, 서양 음악이나 일본 음악의 번안곡이 유행하고 전통 가요가 대중가요로 변모하기 시작한 1929년까지로 하였다. 이 시기에는 서양 음악, 일본 음악, 전통 음악이 공존하면서 근대 적인 의미의 대중가요가 형성될 수 있는 초석이 마련되었다. 본격적인 의미의 대중가요라 하기는 어려우나 이 시기에 대중 가요의 여러 조짐을 볼 수 있다. 비록 장르에 대한 인식이 명 확하지는 않았으나, 이후 대중가요 장르가 출현할 수 있는 바 탕이 되는 노래들이 이 시기에 대거 등장했다. ‘이 풍진 세월 (탕자자탄가)’, ‘카추샤의 노래’, ‘학도가’, 나운규의‘아리 랑’등이 모두 그러한 예이다.

다음으로 1930년부터 1940년까지는 대중음악의 ‘형성기’라 할 수 있다. 광복 이전 대중가요만 놓고 보면, 이 시기는 당시에 이른바 ‘레코드의 황금시대’로 통했다. 음반 산업이 성장 하고 재즈송, 만요, 유행가(트로트), 신민요 등의 장르가 형성 되어 본격적인 의미의 대중가요라 할 만한 노래들이 향유되었 다. 이때부터 기존의 전통 가요와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다른 질감과 유형의 대중가요가 등장하여 당대인의 호응을 얻었다. 서양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재즈송, 당시 새롭게 만들어진 일본 유행가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트로트’3), 자생적인 대중가요인 신민요, 그리고 해학과 풍자의 노랫말로 이 루어진 만요가 공존하였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는 대중음악의 역사 전체를 통해 볼 때, 일종의 ‘암흑기’라 명명할 수 있다. 1941년에 태평양전쟁 이 발발하면서 일본은 전시 체제에 돌입하였다. 그에 따라 모든 음반의 생산과 유통을 대폭 축소했다. 그리고 소위 ‘친일가요’라 할 수 있는 군국 가요만을 생산하게 하였는데, 그 때 문에 진정한 의미의 대중가요라 할 만한 것들은 나오기 어려웠다. 요컨대 엄밀한 의미의 대중가요가 생산되지 못했던 이 시기를 대중가요 역사에서 ‘암흑기’라 칭할 수 있다.

다음으로 1945년부터 1957년까지는 ‘재건기’라 할 수 있다. 대중가요가 생산되거나 유통되지 못한 상황은 1945년에 광복 을 맞이해서도 한동안 지속하였다. 그 이전까지 음반 산업 자 체가 일본에 의지한 측면이 많았기때문에 일본이 떠나고 음 반 산업이 자립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열악한 상황에서도 1945년 8월 하순에 나온 ‘인민의 노래(사 대문을 열어라)’(박영호 작사, 김용환 작곡)는 비록 음원은 남아있지 않으나 해방 가요 1호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어서 순 수한 국내 자본과 기술로 음반을 제작하고 생산한 고려레코드 가 처음으로 음반을 발매한 것이 1947년이다. 이때부터 음반 산업은 다시 시작되었다. 비록 1950년에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그러한 노력이 좌절되었으나, 그 와중에도 음반을 제작하고 발매하기 위한 노력은 계속되었다. 도미도레코드, 오리엔트레 코드 등은 전쟁 중과 전쟁 후에 음반을 발매하였고, 여러 인기 곡이 나와 대중의 호응을 얻으며 음반 산업의 재건이 이루어졌다.

1958년부터 1974년까지는 ‘부흥기’라 할 수 있다. 1958년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LP 음반이 제작되었는데, 이는 대중가요 역사에서 획기적인 기술의 발달이었다. 음반의 앞뒷면을 합쳐 겨우 두 곡을 실을 수 있었던 SP 음반이, 이제 음반 하나 에 노래 10곡 정도가 들어가는 LP 음반으로 변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서양 대중음악의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팝 경향의 대중가요와 기존의 트로트 계열 대중가요가 서로 양립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또한 신중현이 결성한 ‘에드 훠 (Add 4)’와 같은 밴드가 등장하여 록과 사이키델릭 음악 등도 선보였던 시기이다. 이전 시기와 비교하여‘부흥기’에는 다양한 대중음악이 출현하여 대중음악 시장도 상대적으로 안 정을 찾았다.

다음으로 1975년부터 1979년까지는 대중음악‘수난기’라 할 수 있다. 1975년은 이른바‘가요 정화 운동’이 있었던 해이다. 말은 가요‘정화’운동이나, 실상은 대중가요의 사전 검열 이자 대중가요에 대한 규제 조치에 가까웠다. 같은 해, ‘대마초 파동’이 일어나면서 가수, 배우, 연주자 등 약 50여 명의 연 예인이 붙잡혔다. 그리고 윤형주·이장희·신중현 등 약 20명이 구속되기에 이르면서 연예인의 활동 정지로 인해 그야말로 대중가요계는 폐허가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를‘수난기’라 명명할 수 있다.

1980년부터 1991년까지는 ‘분화기’라 할 수 있다. 수난기를 거쳐 이 시기는 다양한 대중음악이 등장하여 대중음악 시장이 활발하게 돌아가던 시기였다. 특히 조용필이라는 국민 가수가 다양한 장르를 섭렵하면서 대중에게 사랑을 받았고, 공중파에 서는 발라드, 트로트 그리고 댄스 음악을 중심으로 삼파전의 양상이 나타났다. 아울러, 이른바 ‘언더그라운드’음악도 상 당한 인기를 얻었다. 들국화·김현식·조동진·봄여름가을겨울·신촌블루스·시인과 촌장·푸른하늘·김현철 등이 모두 ‘언더그라운드’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공중파 방송과 다른 대중음악의 장을 형성했다.

1992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면서 대중음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우리나라 말도 얼마든지 랩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면서‘서태지 와 아이들’은 새로운 형식의 노래 와 춤 등으로 대중음악의 지형도를 바꿔 놓았다. 이들의 등장을 계기로 대형 팬클럽도 생겨났다. 그전까지 팬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이때부터 팬들이 ‘대형화’내지 ‘조직화’하 면서 대중음악 문화를 이끌어가는 구실마저 하였다. 아울러 ‘서태지 와 아이들’과 유사하면서도 다양한 그룹들이 등장해서 많은 인기를 얻었다. 따라서 1992년부터 1996년까 지를‘전환기’라 할 수 있다.

1997년부터 2003년까지는‘도약기’라 붙여 보았다. 1997년은 우리 나라에서 이른바‘한류’열풍이 시 작되었던 해이다. <사랑이 뭐길래 >(1991)라는 드라마가 중국에서 상 당한 인기를 얻으면서 시작한 한류 열풍은 점차로 대중음악계 로 번졌고, 대형 기획사를 통해 양성된 다양한 아이돌 그룹들 이 해외에서도 인기를 얻으면서 단순히 국내에서가 아니라 해 외 각지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다. ‘케이팝(K-POP)’이라는 이름으로 소비된 한류 열풍을 이끈 이 시기의 대표적인 가수로 는 H.O.T·클론·NRG·안재욱·베이비복스·S.E.S.· 비·보아 등을 들 수 있다. 이전 시기에 조용필·김연자·계은 숙 등이 주로 솔로 가수로 해외에서 활동했다면, 이 시기에는 이른바 아이돌 그룹의 활약이 두드러진 시기이다.

마지막으로 2004년부터 현재까지는 ‘약진기’라 할 수 있다. 기술의 발달 등으로 음악 향유 방식이 달라지면서 음반 소비 자체는 현저하게 감소하였다. 하지만 음반이 아닌 음원을 통 한 대중음악의 소비가 이루어지고, 도약기에 이어 약진기에도 아이돌 그룹의 해외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특히 한류 스타들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그 시작을 알리는 것이‘동방신기’였다. 동방신기를 비롯한 빅뱅·원더걸스· 소녀시대·카라 등이 활발한 활동을 하는 와중에 2012년, 싸 이의‘강남스타일’이 한류의 열풍을 불러왔다. 이후에도 BTS(방탄소년단)·엑소·세븐틴·아스트로·비투비·여자 친구·트와이스·레드벨벳·아이즈원·블랙핑크 등에 이르 기까지 아이돌 그룹을 중심으로 한류 열풍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2019년 현재, BTS(방탄소년단)는 한국 대중음악의 역 사를 새로 쓰고 있다. 1964년에 비틀즈가 미국에서 데뷔한 것 을 두고‘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라 했었는 데, 현재 BTS(방탄소년단)의 미국 인기를 두고‘코리안 인베 이전(Korean Invasion)’이라 표현하기도 한다. 이 글을 쓰고 있는 2019년 현재, BTS가 2019년 4월 12일에 발매한 새 앨범 「맵 오브 더 소울 : 페르소나(Map of the soul : Persona)」가 빌보드 앨범 차트 ‘빌보드 200’1위에 오를거란 소식이 들려 온다.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 BTS의 새 앨범「맵 오브 더 소울 : 페르소나(Map of the soul : Persona)」(2019년 4월 12일 발매)
ⓒ네이버뮤직

다시 한국 대중음악사 100년을 기약하며

시대별로 우세한 대중음악 장르가 있기 마련이다. 형성기 에서부터 갈래 인식 내지 장르 인식이 나타났다. 당시에‘유행가’라 불렀고, 오늘날‘트로트’라 칭하는 대중음악 장르는 당 시는 물론 오늘날까지 향유되고 있다. 그리고 이미 형성기에 서부터 서양 대중음악과 일본 대중음악이 영향을 끼쳤다.

재건기에는 트로트와 팝 계열의 음악이 양립했다. 이 시기 에 오면 트로트가 토착화에 성공하였다. 물론 한편에서는 왜 색이라며 트로트를 비판했지만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난과 휴 전 속에서 트로트는 일제강점기와 마찬가지로 핍진하게 당대 를 반영하여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한편으로 전쟁과 휴전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만국(萬國)을 경험한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미8군 무대를 중심으로 출현한 팝 계열의 가수들이 이후 TV로 진출하여 팝 계열의 음악을 선보였다. 부흥기에는 청년 중심의 포크 음악이 우세를 보였다. 하지만 수난기에 이르러 포크 음악이 잠잠해지자 그 자리를 록과 트로트가 결합한‘트로트 고고’내지는‘록 트로트’가 채웠다. 록을 기반으로 해서 등장했던 김훈·최헌·최병걸·조경 수는 이른바 ‘록 트로트’의 4인방으로 불리기도 했다.

분화기에는 다양한 장르가 출현했다. 그 모습을 가장 잘 보 여주는 것이 조용필이다. 조용필은 어느 한 장르에 국한하지 않고 음악을 통해 다양한 장르를 보여주었다. 그는 민요, 록, 트로트, 디스코, 발라드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적 실험 을 선보이며 우리나라 대중음악을 다채롭게 하는데 일조했다. 이 시기에 있었던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은 대중음악을 위시한 대중문화 변화의 동력이 되기도 했다. 전환기부터는 이른바‘X세대’로 불린 신세대 문화가 등장 하였다. 이 시기부터는 청소년들을 위시한 젊은 세대가 본격 적으로 대중음악의 소비 주체가 되었다. 그러면서 음악의 모 습과 판도도 달라졌다. 전환기의 수혜를 받은 도약기에서는 ‘K-POP’이란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대중음악이 세계 시장에 서 소비되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은 음악 향유 방식도 변화 시켰는데, 유튜브(YouTube)를 통한 음악의 향유가 그 단적 인 예이다.

단지 이것만이 아니다. 이른바 언더그라운드의 음악을 잇 는 인디 음악도 다양한 방식으로 생산되고 소비되고 향유되고 있다. 또한 국악도 국악가요나 퓨전국악 등의 이름으로 대중 음악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다.

오늘날 BTS를 비롯한 다양한 가수와 그룹 등이 어느 날 갑 자기 나타난 것은 아니다. 우리의 길고 긴 한국 대중음악사의 역사 속에서 오늘날의 다양한 노래들도 등장할 수 있었다. 물 론 거기에는 단순히 우리나라 음악만의 영향이라 말할 수 없 는 것들이 많다. 대중음악은, 그 특성상 동시대 세계 음악과 영향을 주고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한국 대중 음악의 역사를 이식과 단절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새로운 문화는 외래문화의 도래에서 시작한다. 외래문화가 유입되어 기존 문화와 만나 섞이면서 새로운 문화로 자리 잡기도 하고 아예 사라지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대중음악도 외 래문화 내지 외래음악과의 만남과 혼종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과정에서 새로운 대중음악 장르가 출현하기도 하고 소 멸하기도 한다.

애초에 단번에 읽는 한국 대중음악의 작은 역사라고 하였으나, 이 짧은 글을 통해 100년이 넘는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 를 정리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단번에 읽을 수 있어도 단번에 쓸 수는 없는 것이다. 나름대로 시대 구분을 하며 대중 음악 역사의 흐름을 살펴보려 하였으나 사실상 많은 이야기가 빠져 있다. 당대의 작사자·작곡자·연주자·가수·음반 산 업·악기·노래·소비자 등등 한 시기마다 무수히 많은 노래 와 작품과 연주가 존재했다. 어찌 보면 대중음악이 존재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의 삶과 마음을 위로해주기 위해서이다. 때로 힘들고 괴롭고 슬 프고 팍팍한 삶 속에서 대중음악이 있어 우리는 위로 받고 살 힘을 얻는지도 모른다. 그랬다. 우리의 삶 굽이굽이 대중가요 가 없던 때는 없었다. 때론 웃음으로, 때론 눈물로 우리 곁에 서 웃음과 눈물로 우리를 위로해 준 대중가요가 있었기에 우 리는 사랑의 슬픔을, 삶의 고통을, 세상살이의 지난함을 모두 견딜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의 대중음악도 부디 그러 하기를 바란다.

장유정 / 단국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각주

1) 이 글은 장유정·서병기, 『한국 대중음악사 개론』, 성안당, 2015와 장유정, 「불러 보자 <귀국선>, 춤춰 보자 <강남스타일>: 가사로 본 한국 대중가요의 변천」, 『새국어생활』제25권 제4호, 국립국어원, 2015 년을 참조하고 발췌하여 작성했음을 밝혀둔다.

2) 이 글에 소개한 한국 대중음악사의 시대 구분 및 명명은 필자 고유의 것임을 밝혀둔다. 음반 산업이 시작 되기 전의 노래들은‘맹아기(1894~1906년)’로 명명할 수 있다.

3) 일제강점기에는‘트로트’가 장르명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트로트’는 후대에 만들어진 용어이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에 처음 나와서 지금까지 향유되는 일련의 노래들을‘트로트’라고 명명하는 바, 이 글에서‘트로트’를 일종의 메타 장르명이나 집합 명사로 사용하였다.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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