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호 문화비평: 국민청원] 국민청원은 무엇인가

국민청원은 한국에 있는 독특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정치학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국민청원은 ‘미숙한’ 한국 민주주의의 현실을 보여주는 방증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국민청원은 대통령 직선제라는 1987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 체제에서 기인하는 증상이다. 증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 장치 자체는 쾌락에 기반을 두고 있다.

알베르토 토스카노(Alberto Toscano, 1977~)가 언급한 ‘광신’의 문제를 여기에서 환기할 수 있다. 토스카노가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를 인용하면서 지적하듯이, 광신은 ‘재현된 실재를 의심하는 것’에 따른 결과이다. 왜냐하면 재현은 언제나 이미 실재를 놓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현은 실재의 닮은꼴이지 결코 실재 자체는 아니다. 이런 까닭에 국민청원은 자유민주주의라는 제도를 통해 포섭할 수 없는 정치 욕망의 현신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일본 우익의 천황제처럼 이 절대적 소외의 상태를 극복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일본 우익의 ‘광신’을 낳는다. 미시마 유키오 같은 일본 우익의 대표 인물은 현실에 포박되어 있는 천황이 아니라, “모든 후궁과 프리섹스를 하는 고대의 천황”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 ‘고대의 천황’은 모든 향락을 독점한 최초의 아버지를 다르게 부른 것이다.

국민청원은 이런 맥락에서 팬덤 정치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의 자유민주주의라는 ‘문명’은 이 절대적 아버지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다. 자유민주주의의 목표는 합리적인 통치 이론을 수립하는 것이지 실재에 대한 충동을 용인하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를 죽여서 ‘병든 쾌락’을 제거하고 그 무덤 위에서 아들들이 공평하게 쾌락을 나눠 가져야한다는 것이 이른바 ‘문명’의 원리이다. 이 과정에서 과잉은 제거되어야 하고, 윤리적 규범에 따라 쾌락은 절도 있고 질서 있게 분배되어야 한다. 자유주의적 공리주의의 목적이 궁극적으로 쾌락주의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는 비판은 이런 맥락에서 설득력을 얻는다. 쾌락주의는 정치의 이념을 부담스럽게 만든다. 제 아무리 자유주의가 스스로를 ‘정치철학’이나 ‘정치학’이라고 부르더라도 그 기저에 놓여 있는 것은 쾌락주의의 아포리아이다.

경제학을 떠난 자유주의를 상상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런 논리라면 정치체의 목적은 공평하게 모두 경제적으로 잘 먹고 잘 살아야 한다는 먹고사니즘의 발양에 지나지 않게 된다. 먹고사니즘을 위배하면서 토론과 논쟁을 유발하는 행동이나 발언은 곧잘 과잉으로 치부 당하기 일쑤다. 이른바 ‘문빠’라고 쉽게 불리는 행동들을 이렇게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대체 로 ‘~빠’라는 지칭은 대중문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팬덤을 조롱하기 위한 용어였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처럼 대중문화의 현상을 가리키던 말이 정치 영역으로 유입되었다는 것이고, 더불어 팬덤은 ‘비정상적인 정치 행태’로 간주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무엇이 ‘비정상적인 정치’이고 무엇이 ‘정상적인 정치’인지 구분해야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팬덤 정치

국민청원은 팬덤 정치를 빨아들이는 장치이다. 그래서 ‘정상’정치학의 관점에 따르면 ‘비정상적인 정치’의 전형일 것이다. 국민청원을 가장 쉽게 정의할 수 있는 용어는 포퓰리즘이다. 그러나 특정한 지지자를 포퓰리즘의 행위자로 호명한다는 것은 그 지지자를 무지한 자로 낙인찍는다는 의미이다. 이런 ‘무지한 대중’은 말 그대로 특정할 수 없고, 그래서 존재한다고 말하기 어렵다. ‘포퓰리즘’이란 말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재현하기 위해 불러낸 명칭일 뿐인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행위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무리 부정해도 국민청원은 엄연히 눈앞에 있지 않은가. 이 사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현시하고 있는 증상에 대한 평가 또는 판단을 문제 삼아야 할 것이다.

특정한 정치적 행위 또는 행동이 일어나면 자연스럽게 이에 대한 평가와 판단이 따른다. 이 평가와 판단은 서로 중립적인 척하지만 사실상 편견을 내재하고 있다. 한국에서 이 편견은 어떤 정치적 입장을 취하든 ‘대중은 무지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편견은 ‘대중’을 통제하 기 어려운 광신 집단으로 규정하는 논리로 이어진다.

이 일련의 과정이 보여주는 것은 정치적 입장이나 지지하는 정치후보에 상관없이 발생한다. 누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입장이고 누구를 지지하는지 이 사 실이 중요해진다. 이런 입장과 지지에 반하는 모든 이들은 ‘무지한 대중’으로 분칠된다. 따라서 이 문제는 정치 일반의 원리이지 특정 지지집단만의 특성이라고 단언하기 어렵다. 민주주의의 아포리아는 광신의 출현을 방기할 수밖에 없다. 독재는 바로 이런 민주주의의 결락을 해소하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다. ‘직접적 정치행위’인 것처럼 보이는 국민청원은 제대로 작동할수록 더욱 선명해지는 민주주의의 아포리아에서 작동하는 정념의 장치이다.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 1588~1679)가 말한 ‘리바이어던’은 바다의 괴물이다. 플라톤의 말처럼, 바다는 육지의 위계를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바다의 괴물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표상인 것이다. 홉스가 말한 강력한 참주는 리바이어던 자체가 아니라, 그 괴물을 탄생하게 만드는 구심점이다. 이 참주에게 중요한 것은 그를 강력한 권력으로 만들어줄 인민의 지지이다.

인민의 지지가 강할수록 참주의 권력은 강해진다.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권력은 인민의 단결을 흐트러뜨리는 ‘데마고그’의 선동을 막기 위해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자 한다. 홉스에게 이런 권력의 기동은 민주주의를 지키려는 지당한 시도였다. 그러나 오직 참주의 ‘인격’만을 신뢰해야하는 이런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민주주의를 제한해야 한다’는 역설에 휘말릴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는 무한하게 확장될 수 없다. 참주를 거부하고 모두가 주권을 나눠가진 통치자가 된다고 해도 누군가는 그 통치의 대상이 되어야한다. 그래서 결국 합의하게 되는 것이 견제와 균형을 통한 현상 유지이다. ‘대안은 없다’는 자유주의의 유일사상은 이렇게 설득력을 획득한다.

자유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완벽한 견제와 균형의 원리는 ‘상호 감시’라는 ‘피어 리뷰’의 방식을 채택한 것이다. 칸트의 말처럼, 인간은 동물이기에 주인을 필요로 하지만, 그 주인도 동물에 지나지 않는다. 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인간이라는 동물들끼리 서로 감시하는 것 이다. 이 감시의 기술이야말로 근대 민주주의의 원리인 셈인데, 자유주의는 이 감시를 전문가의 몫으로 설정하고 있다. 선거는 권력을 선출하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독재자의 딸’이든, ‘인권 변호사’든 선거라는 절차를 통과해야 정당한 권력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권력은 결코 안정적이지 않다.

근대의 원리로서의 감시

이 안정적이지 않은 권력을 ‘감시’하는 것이 이를테면 근대의 원리이다. 국민청원은 바로 이 ‘감시’의 장치이다. 국민 개개인이 테크놀로지의 발전 덕분에 판옵티콘의 눈을 보유하게 된 것 이다. ‘감시’의 민주주의는 결국 투명성을 의미한다. 바디우가 말하듯이, 일반적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하나의 국가 형식일 따름이다. 이런 맥락에서 민주주의는 정치적인 것의 정점으로 지시 될 때, 그 반대편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전체주의와 쌍을 이루게 됨으로써 의미를 획득한다. 이처럼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와 대립적 관계에서 정립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의 반대라기보다 그것의 위기를 드러내는 증상에 가깝다. 전체주의는 민주주의라는 상대가 없으면 의미를 갖지 못한다.

민주주의의 역설

민주주의가 하나의 국가 형식으로 붙잡혀 있을 때, 전체주의는 항상 불려나와 유령처럼 그 주변을 배회하게 된다. 민주주의가 공동체의 연결에 고착되어 버린다면, 정치는 폐색의 운명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정치는 언제나 비재현적이고 그래서 제도로서 얼어붙은 민주주의를 항상 빠져나간다.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어떤 형식은 그러므로 정치적인 실천을 통해 남겨진 화석 같은 것이다. 전체주의는 이 화석으로 정치를 완전하게 현시하게 만들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루소가 말한 ‘일반의지’를 낱낱이 국가로 재현하고자 했을 때, 전체주의가 도래하는 것이다. 이념으로서 작동하는 민주주의와 국가 형식으로 실현되는 민주주의를 착각해서 후자를 민주주의 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그 결과는 나치즘 아니면 스탈린주의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국가 형식을 통해 완전한 민주주의를 달성하겠다는 야망은 실현 불가능하다. 정치는 미리 던져진 가설이고, 합법적으로 실행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결과로서 출현할 뿐이다. 게다가 이 결과는 정치적 사건의 성격상 검증할 수 없다. 검증할 수 없는 증거를 통해 우리 는 정치의 결과를 규정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주체는 결단을 전제한다는 점에서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정반대이다. 정치적 주체는 자유의지보다도 ‘타자의 욕망’에 자신을 기탁하는 히스테리적 주체이다. 국민청원은 바로 이 히스테리적 주체가 끊임없이 정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는 행위인 것이다.

이택광 /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작성자: khugnews

이글 공유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