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호 책지성] 심보선,『 그을린 예술』- “적어도 그렇게”살아나는 예술

현대사회에서 예술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인가? 오늘날 예술적 행위들은 그것이 전문적이든 비전문적이든 공동체적 성격을 가지고 발현된다. 가령 분야를 가리지 않고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것, 낭독회와 북콘서트를 주관하는 것, 독서모임 또는 예술 동호회를 만드는 것? 사실 이러한‘모임’의 구성원들은‘예술을 한다’ 라는 취지로 모였을지 몰라도, 진짜 목적은 진지한 예술 활동이나 심미적인 가치 찾기 등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구성원 간에 친목도모, 예술의 진지성 깨부수기, 미학적 엘리트주의 타파하기 등에 주안점을 둔다. 이러한 현상은 큰 틀에서 보면 일종의 부조리극 같다. 그렇다면 그것은 충분히 정치적 의미를 갖지 않는가? 여기서 정치란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지켜주는 식의 치안으로서 정치가 아니다. 랑시에르(Jacques Ranciére, 1940~)에 따르면 그것은 문학을 통해 경계를 허물고 현실을 교란시키는 어떤 작업이 실행될 때 일어나는 정치를 말한다.


문학의 평등


우리는 흔히 문학을 정치와 구분된 것으로 생각한다. 한국문학에 있어서 문학과 정치 논쟁은 문학이 정치적인 것으로 활용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문학 내에서 전위성을 담보로 한 그것이 정치적이라는 문제를 놓고 대립해왔다. 그러나 이 두 문제는 모두 문학과 정치를 구분한다는 전제를 가진다. 이에 대해 랑시에르는 문학과 정치는 분리될 수 없는 일이며, 문학 자체가 정치적인 것이라 설명한다. 즉, 문학이 만들어내는 현실과 상상의 접점 사이에서 일어나는 교란을 통해 인간은 교훈을 얻거나 비판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 그러한 행위 일반이 정치에 속한다고 본 것이다. 또한 문학을 위해 모인 사람들이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것 역시 일종의 정치라 볼 수 있다. 주목해 볼 것은 오늘날의 문학 공동체의 모습이 예전의 엘리트주의적인 그것과 사뭇 달라졌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적인 변화와 과학적 기술이 가져온 진화한 삶의 모습 등이 영향을 미친 면이 없잖아 있다.
최근 각종 커뮤니티가 활성화되고 있고 SNS를 통해 독서모임이나 합평회 등의 모임이 늘고 있다. 개인의 삶에 주어진 그 몇 시간만큼을 문학을 통해 변화시키려는 작은 움직임. 이러한 모임의 특징은 구성원에 있어 제한을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학을 사랑하거나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다. 또한 그렇게 모인 사람들은 친목을 유지하면서 함께 공모전을 준비한다거나 책을 펴내는 등 다양한 문학적 활동을 병행하면서 스스로를 작가 혹은 글쟁이로 칭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은 문학만의 고유한 순수성을 고양하는 태도에서 오지 않으 며, 문학을 정치적인 수단으로 고용하기 위한 단결된 전략에서도 오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문학을 좋아하거나 그런 이유가 아닐지라도 자신의 삶을 조금이라도 바꿔보려는 노력, 취미 활동의 일환으로 생각하는 데서 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문학의 가치가 떨어졌다고 이해하는 것은 곤란해 보인다. 랑시에르가 주장한 문학의 정치의 가장 핵심은‘평등’에 있기 때문 이다. 예술 혹은 문학이 고고한 미학의 보살핌 아래에서 지식인층 혹은 귀족층의 전유물이 되면서 양산한 불평등은 이제 옛날 얘기다. 국어국문학과를 나오고 문예창작학과를 나와야만 문학을 얘기할 수 있을 것 같고, 창작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대는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람들은 이제 휴대폰 하나로 모임을 만들 수 있고, 공동 관심사에 따라 문학을 할 수도 있고, 음악을 할 수도 있고, 미술을 할 수도 있게 되었으므로.


예술 민주주의, 프로와 아마추어

심보선 시인의 책『그을린 예술』에 소개된 홍대의‘두리반’칼국수집 일화와 할머니 시인 일화를 살펴보자. 전자는 문학가이지만 삶의 투쟁자로서 문학의 정치를 실현하고 있고, 후자는 문맹의 노인이지만 시를 씀으로서 문학의 정치를 보여주고 있다. 즉, 문학과 정치라는 두 개의 영역 사이를 가로지르던 굵직한 국경의 철조망이 현대사회로 오면서 허물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런 것이다. 앞으로의 예술은 순수를 꿈꿀 수 없는가? 전문적인 테를 벗어던진 현대사회의 예술은 과연 예술이라 할 수 있는가?
홍대‘두리반’칼국수집 일화는 철거 위기에 놓인 식당의 사장인 유채림 소설가가 예술을 통해 두리반을 지켜낸 이야기이다. 두리반을 지키기 위한 일환으로 그가 신문에 사설을 실은 것이 도화선이었다. 이야기는 홍대의 음악가들과 각종 분야의 예술가들에게 전해졌다. 그들은 두리반을 하나의 예술 공간으로 승화시켜 그곳에서 각종 공연을 하고 낭독회를 기획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예술적 행위들이 지속되면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고, 마침내 홍대의 명물이 되어 철거 계획을 취소시키기에 이른다. 처음에는 어둡기만 한 분위기의 농성장이었던 두리반이 예술 공간으로 거듭나면서 재개발로 죽어가던 홍대에 살아있는, 젊은 분위기를 다시금 만들 어낸 것이다. 필자는 이 일화를 접했을 때, 가슴 속에서 어떤 뜨거움을 느꼈다. 그것은 정치로서 의 뜨거움이 아닌 문학의 정치로서의 뜨거움이 분명했다. 두리반은 문학의 순수함을 고집하는 예스런 공간도 아니었으며, 정치적인 색을 띠는 선동의 수단으로 문학과 음악, 예술을 이용하는 공간도 아니었다. 그저 곳곳에 공연할 무대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 글을 읽을 곳이 없는 사람 들, 그림을 전시할 곳이 없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 공간이 그들의 땀과 열정으로 가득 채워져 장소가 된 것뿐이었다. 자연스럽게 예술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장소 말이다.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여기에는 구성원에 대한 어떤 제한도 없었다는 사실이다. 두리반 칼국수집 일화는 예술에 대한 평등한 시선이 하나의 공론장을 만들어낼 때 그것이 가장 정치적인 사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작가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국에서는 신춘문예에 당선되거나 각종 문예지를 통해 작품을 발표해야만 프로 작가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식의 체계가 존재한다. 우리는 그것을 등단제도라 부른다. 하지만 오늘날, 문학의 생산 양상을 보면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에만 문학이 국한되지는 않는다. 독립출판이라는 새로운 플랫폼이 급부상하고 있고 SNS 작가, 할머니 시인 등 어쩌면 색안경의 범주 바깥에서 문학이 더욱 가시적으로 생산되는 느낌이다.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나타나는 걸까? 랑시에르 논의를 통해 심보선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문학의 진정한 평등은 프로와 아마추어의 경계를 허무는 것, 아니 오히려 아마추어의 작품으로부터 문학의 새로운 지표를 찾으려는 노력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문학은 주변인의 소산이다. 그들의 목소리나 몸짓 자체는 문학이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심보선 시인은 진은영 시인이 말한‘지게꾼-되기의 시’와‘지게꾼의 시’라는 구분마저도 지우고 그 자리에 지게꾼만 두려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문학을 삶 속에서 꿈을 꾸는 자들의 몫으로 남겨두는 것이 문학의 정치의 최종적 의미가 되는 것은 아닐까? 앞서 말한 독립출판의 증가와 SNS 작가, 할머니 시인의 등장이 보여주는 것은 문학의 예술성의 잣대로 그 가치를 환산할 수 없는, 문학의 평등성의 예다. 이러한 예시들이 예술 민주주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그렇게 당하진 않겠습니다

전문가들이 문학의 정치에 대해 이야기한다. 또 문학의 평등성을 강조한다. 문학의 평등이 가져오는 자율성을 피력한다. 그러나 우리는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해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문학의 정치에 대한 의미가 어떠하든, 그것이 얼마간 유효하든 무효하든 그래서 그것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엘리트주의적 경계를 허문다고 해서 문학의 정치가 강조하는 평등이라는 가치는 포퓰리즘적 비판을 피할 수 있는가? 이것이 문학의 정체성에 진정으로 도움이 되는 것인가? 하지만 심보선 시인은 이야기한다.“ 적어도 그렇게 당하진 않겠다”고. 문학으로할 수 있는 일은 미미하다. 애초에 문학은 주변부의 것이었다. 작은 목소리였고 개인의 상상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한 개인이 거대한 폭력 앞에 서서 자신의 초라한 인권을 생각해볼 적에, 적어도 그렇게만은 당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비판적 시각은 생겨난다. 비판적 시각은 풍자로, 풍자는 공감으로, 공감은 힘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가진 예술적 행위 중 하나가 문학이라면, 문학은 누구나의 것이 되어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시무시한 폭력에 대항하는 단 하나의 작은 손짓에서 문학이 시작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문학의 정치는 의미를 가지므로.

김웅기 | dndrl0314@khu.ac.kr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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