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5호 테마서평: 토니 모리슨 소설의 서사적 윤리] “말할 수 없고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기”

  • 『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저, 문학동네, 1987)
  • 『재즈』 (토니 모리슨 저, 문학동네, 1992)
  • 『파라다이스』 (토니 모리슨 저, 들녘, 2001)

1996년, 흑인 여성 비평가 앤 두실은 흑인 여성에게 쏠린 비평적 관심을 언급하며 이런 지적을 한 바 있다. “오늘날 흑인 여성은 너무도 극진한 관심을 받고 있어서 나는 종종 나 자신이 신성한 텍스트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물론 이런 비평적 관심은 한 개인으로서의 내가 아니라 ‘흑인 여성’으로서, ‘타자’로서 나에게 보이는 관심이다. 현재 미국학계에서 성적 · 인종적 타자성은 ‘핫한’ 상품이 되었고, 흑인 여성은 이 상품의 주요 기표가 되었다.” 두실의 진단에 따르자면, 미국 학계에서 흑인 여성은 정치적으로 올바르고, 지적으로 인기가 있으며, 상업적으로도 돈이 되는 ‘이상화된 타자’가 되었다.

1970년 첫 소설을 펴낸 후 유수의 문학상을 석권한 뒤 1993년 미국 흑인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은 미국 비평계의 이상화된 타자의 전범이라 할 수 있으며, 그녀의 소설은 ‘신성한 텍스트’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두실이 정치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거머쥐기 위해 흑인 여성성을 전유하던 당시 문화현상을 지적하던 때가 1990년대 후반이지만,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이런 현상이 사라졌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 모리슨은 왕성한 집필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현역작가로서뿐 아니라 흑인여성을 대변하는 존재로서 여전히 높이 추앙받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모리슨 추앙작업이 그녀가 이룩한 문학적 성취에 대한 정당한 평가인 측면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속에는 흑인 여성작가를 이상화된 타자의 위치에 묶어두려는 기획도 분명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기획의 음험함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는 사람이 모리슨 자신이다. 모리슨은 자신이 미국사회의 인종적 타자이자 소수자의 ‘아이콘’으로 활용되는 것을 경계한다. 미국적 성공신화의 사례로 선전되거나 피해자 정체성으로 고착되기에는 선조들의 삶에 대한 그의 사랑과 애착이 너무 깊고 크다. 모리슨에게 글쓰기는 미국 역사에서 흑인들이 겪어온 참담한 고통을 예술적으로 증언하는 일이다. 미국 흑인들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끌려와 민주주의를 국가이념으로 선포한 나라의 한복판에서 가장 잔혹한 비인간성을 겪었다.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헌법 전문에 명시한 나라에서 그 가치를 부정당해온 사람들이 미국 흑인들이다. 그 흑인 선조들이 백인 지배하의 미국 땅에서 살아온 굴곡진 삶과 얼룩진 내면을 드러내는 것, ‘토큰’으로도 ‘피해자’로도 고정되지 않고 그들 내면의 “말할 수 없고 말해지지 않은 것을 말하는 것”이 모리슨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작가적 임무이다.

거슬러 올라가는 진실

이 임무를 수행하려면 역사에서 망각되고 지워진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 “미국은 이민자들이 건너와 새로 시작할 수 있는 빈 서판 같은 나라라서 과거가 부재하거나 낭만화되어 있다. 이런 문화는 과거의 진실과 화해하기는커녕 과거를 생각하도록 만들지도 않는다.” 모리슨이 한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 미국적 아담의 눈은 미래를 향할 뿐 좀체 과거를 보려고 하지 않는다. 하지만 모리슨의 시선은 반대로 움직인다. 흑인들이 처해있는 현재 상황을 이해하려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어디서 무엇이 어긋난 것인지 들여다봐야 한다. 역사는 지층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발터 벤야민은 현재의 요청에 의해 과거의 지층으로부터 죽은 자들을 소환하는 것을 ‘역사적 인용’이라 부른 적이 있다. 이런 역사적 인용을 위해서는 역사의 선조적 진행방향을 거스르는 시간감각을 배울 필요가 있다. 모리슨 소설은 현재의 시간 축 너머에 있는 역사적 타자들의 경험과 감각을 공유하는 문학적 아나크로니즘을 실천한다. 그의 소설을 통해 과거 속에 묻혀있던 억압된 것들이 미래적 가능성을 품고 돌아온다.

모리슨의 문학적 시선이 향하는 과거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확립되기 이전 식민지 건설시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를 망라한다. 모리슨의 역사소설 삼부작이라 할 수 있는 『빌러비드』, 『재즈』, 『파라다이스』는 노예시절부터 재건기 해방된 흑인 노예들이 북부와 서부로 이주하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이 세 소설에서 모리슨은 새로운 형태의 역사소설을 시도한다. 여기선 ‘사실’보다는 사실 뒤에 숨겨진 ‘진실’이, 역사 속에 있지만 역사적 사실로 환원되지 않는 ‘주체의 내면’이 더 중요한 관심사다. 살인을 동반하는 격렬한 사랑이 작품의 중심 모티브로 설정된 것도 역사적 상황 속에서 개체적 존재로서 흑인 남녀들이 느끼는 감정적 진실과 그들이 내리는 윤리적 선택이 모리슨의 문학적 시선이 가닿는 곳이기 때문이다. 『빌러비드』는 딸의 목을 도끼로 내려치는 노예 어머니를, 『재즈』는 연인의 가슴에 총구멍을 내는 전(前) 노예 남자를, 『파라다이스』는 수녀원의 여자들을 쏘아 죽이는 흑인남자를 그린다. 이들이 이런 파괴적 사랑에 이르게 된 원인을 찾기 위해 소설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빌러비드』, 역사가 앗아간 사랑

노예 어머니의 존속살인은 언어적 재현이 불가능한 사건이다. 왜 어머니의 사랑이 이런 식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설명하려면 노예 시절 전체를 문제 삼아야 한다. 어머니의 손에 죽임을 당한 딸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그 딸을 죽음에서 불러내 빼앗긴 사랑을 돌려주어야 한다. 『빌러비드』는 노예제도가 어떻게 인간을 짐승으로 만들고 짐승이 된 인간이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위해 어떤 끔찍한 선택을 내리는지 보여준다. 노예 어머니가 딸을 지키기 위해 내린 죽음의 결정은 딸에 대한 책임을 포기하지 않는 윤리적 행위이다. 그러나 이 행위의 주체인 어머니는 자신이 내린 결정의 책임을 홀로 감당하며 죽음 같은 삶을 살아간다. 그런 어머니를 과거의 트라우마에서 건져 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죽은 딸이다. 작품의 2부를 구성하는 삼 모녀의 내적 독백은 역사가 앗아간 사랑을 표현한다. 여기서 산 자와 죽은 자는 역사가 끊어놓은 사랑의 유대를 복구한다. 이 잃어버린 사랑을 회복한 후 빌러비드는 흑인 여자들이 거행하는 엑소시즘에 의해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진다. 과거가 현재를 집어삼키지 않게 하려면 과거의 유령을 떠나보내야 한다. 그러나 빌러비드를 완전히 떠나보낼 수는 없다. 개인의 삶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집단적 삶에서는 트라우마의 기억을 간직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 부정적 역사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재즈』, 생의 리듬

『재즈』는 흑인의 대이주가 일어났던 20세기 초 한 흑인 남자가 십대 연인을 살해하고, 그의 아내가 죽은 연적의 얼굴에 칼자국을 남기는 난동을 벌이게 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이 치정살인과 폭력난동의 비밀을 풀려면 노예 해방 이후 남부에서 가난한 소작농으로 살았던 한 흑인 부부가 할렘에 정착하기까지 육십 년에 이르는 흑인 역사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한다. 『재즈』는 1920년대 미국사회를 휩쓴 재즈 음악을 미학적 모델로 삼아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모성 상실의 심리적 외상에 시달리면서도 삶의 상처를 삶의 율동으로 전환해냄으로써 자신을 새롭게 구성하는 새로운 인종주체의 내면을 드러낸다. 재즈 음악은 해방된 노예들이 즉흥적으로 자신을 발명해나갈 생의 리듬과 멜로디를 제공해주는 거대한 문화자원이다.

『파라다이스』, 내 안의 타자와의 공존

『파라다이스』에서 모리슨은 흑인 사회 내부로 시선을 옮긴다. 작품은 남부사회의 재건 프로젝트가 실패로 돌아간 1898년 한 무리의 흑인들이 오클라호마 주에 건설한 공동체(헤이븐)와 제 이차 세계대전에서 돌아온 이 공동체의 차세대들 중 일부가 더 깊은 오지로 들어가 만든 새로운 공동체(루비)가 어떻게 부패와 타락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추적한다. 흑인만의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노력이 실패로 돌아간 이유는 무엇인가? 모리슨은 미국의 꿈의 흑인 버전이라 할 수 있는 이 역설을 추적한 끝에 백인사회의 인종주의를 역으로 내면화한 흑인중심주의, 흑인피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이물질을 배제하는 순혈주의, 여성을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도구로 취급하는 남성주의를 찾아낸다. 흑인들의 낙원 건설이 성공하려면 이질적 존재들이 공존하는 여성공간을 대안공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실패한 파라다이스의 가능성은 백인여성들과 흑인여성들, 그리고 브라질 출신의 혼혈여성이 어울려 살아가는 이질 혼성공간, 그곳에서 상처 입은 존재들이 서로를 보살피고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평등한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타자로 내몰린 존재들이 또다른 타자를 낳는 악순환을 끊어내려면 타자성을 자신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모리슨이 흑인들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찾아낸 잠정적 결론이다.

*이 글의 일부는 필자의 글, 「토니 모리슨: 문학의 고고학, 종족의 역사학」 , 『문학동네』(2014가을)의 몇 대목을 맥락에 맞춰 재구성하였음을 밝힌다.

이명호 /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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