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호 테마서평: 문학으로 다시 바라본 페미니즘]가장 아름다운 자본 앞에서 가부장제의 支柱로서 ‘노라’? 

『인형의 집』(헨릭입센 저, 민음사, 2010)
『안데르센 교수의 밤』(다그 솔스타 저, 문학동네, 2016)
『노라가 남편을 떠난 후 일어난 일 또는 사회의 지주』(엘프리데 옐리네크 저,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3)

문학의 밤으로의 여정에서‘노라’의 의미는?


『안데르센 교수의 밤』에서 독신인 폴 안데르센은 50대 중반으로 입센(Henrik Ibsen)을 전공한 문학 교수다. 그는 크리스마스이브에 혼자 성찬을 즐긴다. 그러다가 맞은편 집 창문에 비치는 남녀의 모습을 보게 된다. 남자가 여자를 뒤에서 포옹하고 있는 낭만적인 장면이다. 그러나 한순간 낭만은 경악으로 바뀐다. 남자가 여자를 포옹하듯 목을 졸라 죽인다. 그런데도 안데 르센은 경찰에 신고조차 하지 못한다. 온갖 핑계를 대면서 주저한다. 신고는커녕 범인과 레스 토랑에서 마주치지만 서로의 세련된 취향에 관해 경쟁하듯 이야기한다. 일본 문화를 즐길 줄아는 범인은 아시아로 떠날 것이라고 말하고, 여자는 소멸된 채 소설은 끝난다. 그리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폴 안데르센은 입센 작품의‘위대성’을 학생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고귀한 사명 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런데 요즘 그는 심히 불편하다. 입센의 위대성은 과연 뭘까?『 인형의 집』은 노르웨이의 국민문학이고 노라의 가출은 세계사적인 사건이었다. 노라를 미학적으로 재해석한 덕분에 자신이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든다. 그럼에도 21세기 노르웨이 여학생들에게 입센의 노라, 혹은 헤다 가블러의 삶을 어떤 방식으로 참조하라고 할수 있을까? 살인사건 이후 그에게는 문학의 불멸성, 위대성에 회의가 무럭무럭 자란다.
문학의 위대성은 개뿔, 그는 좌파 지식인인 척했지만 지적으로 마비된 교수일 뿐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1879년 노르웨이에서 나온 희곡 한편이 21세 기를 사는‘우리’의 상상력을 여전히 사로잡고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로 입센의『인형의 집』자필 서명원고는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 일단 19세기 말 북유럽의 부르 주아 가정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여기서 나는『인형의 집』이 얼마나 불멸의 고전이며, 위대한 작품인가에 주목하려는 것이 아니다. 시대적 맥락에 따라서 어떤 범주들(젠더, 민족, 계급, 국가, 자본 등)이 어떻게 노라의 의미를 구성하게 되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인형의 집』에서 노라는 곧 은행장이 될 남편 핼머, 사랑스러운 자녀 3명과 살고 있는 부르주아 가정의 전업주부다. 남편 핼머에게 노라는 약간의 낭비벽을 제외하면 완벽한 집안의 천사이자, 사랑스러운 종달새, 귀여운 다람쥐다.
핼머가 은행장으로 승진하려는 찰나 노라의 불법행위가 탄로나고 그의 승진은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한다. 노라가 위조 사인으로 은행대출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핼머는 노라에게 당장 이혼하자면서 분노한다. 노라가 불법을 저지른 이유는 직업도 경제력도 없는 여성에게는 신용대출, 신용카드 등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녀가 남편 몰래 대출한 돈은 남편의 치료비였다. 이런 사건을 경험하면서 노라는 남편과 자녀를 버리고 과감히 가출을 선언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이 전부 모이는 크리스마스이브 에…….


신여성 나혜석, 노라의 인권선언에 매료되다


그 당시 부르주아 가정주부에게 가장 신성한 제1의무는 남편과 자식에 대한 의무였다. 하지만 노라는 자신에 대한 의무, 자아실현이 가장 먼저라고 말한다. 그런 맥락에서 노라의 가출은 근대적인 인권선언의 상징이었다. 그동안 노라는 새장 속의 종달새 같은 존재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가정은 사랑으로 맺어진 두 영혼의 결합이 아니라 강자가 약자에게, 주인이 노예에게 보이는 보호와 시혜에 바탕을 둔 불평등하고 비대칭적인 장소임을 그녀는 깨닫게 된다. 가정 에서 엄마, 아내, 딸 이외에 여성의 자리는 없었다고.
『인형의 집』이 바다를 건너 일제 강점기 조선으로 들어왔을 때 신여성들은 환호했다.
“나는 인형이었네/아버지의 딸인 인형으로/남편의 아내 인형으로/그네의 노리개였네…… 나는 사람이라네/남편의 아내 되기 전에/자녀의 어미 되기 전에/첫째로 사람이라네”
『인형의 집』에 영향을 받은 나혜석의 시『人形의 家』는‘삼종지도’,‘ 삼강오륜’이 지엄했던 시대에 여성도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받고 싶다는 열망의 표현이었다. 나혜석에게 노라의 가출은 근대적인 여성주체의 탄생을 알린 일대 사건이었다.‘ 자유주의’신여성들이 보기에 일제 강점기 조선에서 봉건유교가부장제는‘만병의 근원’이었고, 여성해방, 신분해방의 걸림돌이었 다. 이렇게 노라는 자아해방, 여성해방, 계급해방의 투사로 전유되었다.
다른 한편 노라의 근대적인 인권선언에 회의적인 이론가들도 많았다. 루쉰과 비슷하게 채만식 또한 가출한 노라의 선택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거나, 몸을 팔거나, 자살을 하는 세 가지 밖에 없다고 보았다.


‘아름다운 자본’아래서 노라의 자리는?


그렇다면 가출한 노라가 자유연애를 통해 자아실현을 하고 사랑을 찾는 것은 어떨까? 오스트리아의 극좌파 페미니스트 작가인 엘프리데 옐리네크(Elfriede Jelinek)의『노라가 남편을 떠난 후 일어난 일 또는 사회의 지주』는 이런 물음에서부터 출발한 다. 이 물음에 대한 옐리네크의 상상력은 가혹하다 못해 잔인하다.
이 희곡은 사랑에 대한 노라의 낭만적 환상을 조롱한다. 자유주의자들이 자유연애, 자유, 자아실현과 같은 소리를 열심히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가부장적 자본주의 아래서 물신화되어 살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 계급, 젠더가 자연현상처럼 굳어져 있는 상황에서 노라가 인형의 집을 벗어난다고 하여 자아실현을 할 수 있겠는가? 노라는 인형의 집을 뛰쳐나와 공장에 들어간다. 하지만 전업주부로 살았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다시 낭만적 사랑에 빠지지 않는 한 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때마침 노라는 공장 시찰을 나온 기업 회장 봐이강의 눈에 띄게 된다. 그는 거대한 글로벌 기업 총수다. 노라는‘진정한’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노라가 사랑에 매달리는 순간 그녀의 매력은 사라져버린다.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매달리지 않을 노라의 자유와‘독립성’을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봐이강은 그녀를 철저히 활용하고 버린다. 그녀에게 남성동성 사회의 시멘트 역할을 하도록 만든다. 봐이강은 기업의 인수합병 과정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정치 권력자들에게 성 접대용으로 그녀를 상납한 다.
옐리네크에 의하면 노라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결국은 자본 주의를 유지시키는 사회의 지주(支柱)로 공모한다. 가부장제적 자본과 공모하거나 타협하지 않은 노라들에게는 행려병자로 방랑하 거나 자살하거나 미치거나의 길만이 남아 있다는 것일까? 옐리네크가 보기에 페미니즘이 가족과 사랑담론에 머물러 있는 한 결코 여성 해방은 가능하지 않으리라는 진단이었다. 아무리 비대증식되어도, 세계를 집어삼켜도 아름답다고 간주되는 것이 자본이다. 자본주의‘세상 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본’이고 여성도 그런 자본의 하나다.
노라가 가출하지 않고 살았더라면 앞집 창문에 비친 여자처럼 숨이 막혀 죽지 않았을까? 안데르센 교수가 그처럼 심기가 불편했던 것은 여자의 무덤 위에서 시체장수로 살고 있는 자신에 대한 회의는 아니었을까? 재계, 정계뿐만 아니라 학계까지 가세하여 여성교환을 정당화하는데그 역시 한몫하고 있다는 반성 때문은 아니었을까? 남성동성사회는 여성을 정복대상으로 보는 상징적, 미학적, 현실적 페미사이드 위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처럼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공모하면서도 그것에 균열을 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재해 석의 공간을 열어주고 있다는 점에서 노라의 현재성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닐까 한다.

임 옥 희 /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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