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호 과학학술: 주기율표]세상을 그리는 원소지도, 주기율표

국제연합(UN)은 올해를 ‘세계 주기율표의 해’로 지정했다. 2019년은 지난 1869년 러시아의 화학자 멘델레예프가 원소주기율표를 만든 이래 제정 150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이에 본보는 물질의 성질을 알려주는 ‘보물지도’인 주기율표의 탄생배경과 역할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2017년 제72차 유엔 총회는 2019년을“세계 주기율표의 해(IYPT, International Year of the Periodic Table of elements)”로 선포하였다. 유엔은 2011년을“세계 화학의 해”로 선포한 바 있는데, 9년 만에 화학에 관련된 주제를 다시 찾아 전 세계가 기념하자고 한 것이다. 특별히 올해를 세계 주기율표의 해로 선정한 이유가 있다. 지금으로부터 150년 전인 1869년 3월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예프(Dmitri Ivanovich Mendeleev, 1834~1907)가 당시까지 알려진 원소를 분류한 주기율표를 처음 제안했기 때문이다. 각 원소의 질량(원자량)과 화학적 특성에 기초해 정리한 이 분류표는 오늘날 널리 사용되고 있는 주기율표의 기초가 되었다.

▲ 드미트리 이바노비치 멘델레예프(Dmitri Ivanovich
Mendeleev, 1834~1907)의 모습 ⓒ images-of-elements.com

원자론과 주기율표

세상에 많은 물질이 존재한다. 인류는 모두 몇 가지의 물질을 알고 있을까? 그 숫자를 어림하기 위해서는 화합물에 분류 번호를 붙여 세어 보면 될 것이다. 미국화학회가 운영하는 화학 문헌 초록 데이터베이스 서비스(CAS, Chemical Abstract Service)는 1957년 이후 문헌에 나오는 모든 화합물과 1900년 이후 발견된 다양한 물질에 고유 번호를 붙이는 이 지루한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CAS 등록번호(registry number)라고 불리는 화합물 고유 번호는 2016년 말에 9,480만 개 화합물과 6,700만 개의 단백질 서열을 망라하고 있다. 세상에는 최소한 일억 개가 넘는 다른 물질이 존재하는 셈이다.

자연은 일억 개의 화합물을 어떻게 만들었을까? 이렇게 많은 물질을 좀 더 단순하고 쉽게 이해하는 방법은 없을까? 기원전 500 년경부터 고대 그리스의 과학자(당시에는 철학자)들은 이 질문을 고민해왔다. 레우키포스(Leuki, ?~?)와 그의 제자 데모크리토스(Dēmokritos, B.C.460?~B.C.380?)는 물질이 더 이상 자를 수 없는 극한 단위인 원자(atomas)와 진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원자는 너무 작아 눈으로 볼 수 없고, 더 이상 변화나 파괴할 수 없으며, 이 원자들이 충돌과 재배열하여 우리 눈에 보이는 모든 물질을 형성했다고 보았다. 한편에는 눈에 보이는 물이나 불, 흙, 공기 같은 물질이 만물을 이루는 기본 요소라고 믿는 엠페도클레스(Empedoclēs, B.C.490?~B.C.430?)도 있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4원소설을 받아들이자 중세 시대까지도 정설로 이어졌다. 하지만 기체의 부피나 질량(밀도)을 정확하게 측정할 수 있는 장치들이 발명되고 실험과 관찰에 기초한 과학적 연구 방법이 태동하면서, 과학자들은 4원소설이 실험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해내기 시작하였다. 보일의 법칙으로 유명한 로버트 보일(Robert Boyle, 1627~1691)은 1661년 출간된 그의 저서『의심하는 화학자: 물리, 화학적 의
심과 모순(The Sceptical Chymist: or Chymico-Physical Doubts and Paradoxes)』에서 기존의 4원소설에 반대하는 입장을 공식적으로 표명한 최초의 과학자였다. 그는 기체가 아주 작은 입자로 이루어져 있고, 기체 입자 사이에는 빈 공간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4원소설이 무너지자 유럽의 많은 과학자들은 화합물을 이루고 있는 원자를 분리하고 새로 찾아낸 물질에 이름을 붙이는 작업을 해나갔다. 많은 기체들이 분리되어 성분이 밝혀졌고, 온도계까지 발명되면서 가장 설명하기 어려웠던 열과 연소의 관계도 오늘날과 같은 개념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영국 맨체스터의 퀘이커 교도의 아들로 태어난 존 돌턴(John Dalton, 1766~1844)은 1803년 현대적 원자론을 주장하였다. 원자라는 물질의 기본단위를 가정하고, 원자가 일정한 비율로 결합하여 분자를 만들어내며, 분자가 다르면 다른 물질이 된다는 이론이었다. 기원전 478년 레우키포스로부터 시작된 원자론이 다시 불려와 현대 화학의 기초가 되는 순간이었다. 특히 돌턴은 원자들 간의 상대적인 질량을 제시하였는데, 과학자들로 하여금 원자의 상대적 질량이나 밀도가 원자 연구의 중요한 기초가 되리라는 것을 깨닫게 하였다. 현대의 과학자들이 입자 가속기를 가지고 원자나 소립자 연구에 열을 올리는 것처럼, 당시에는 보다 좋은 저울을 확보하여 원자의 상대적 질량을 밝혀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당시 물리학자들에게 돌턴의 원자론은 너무나 엉성하고 빈틈이 많아 보이기도 하였다. 뉴턴의 물리학적 모델과도 잘 맞지 않았고, 물질의 전기적 성질을 잘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원자론에 숨어있는 물리적 기초를 완전히 이해하려면 원자를 좀 더 파고들어야만 했다. 결국 19세기 들어 물리학자들은 당시 새로운 실험 기법이었던 진공과 전기, 방사선을 써서 원자의 내부를 규명해 내기 시작했다.

조지프 존 톰슨(Joseph John Thomson, 1856~1940)은 물질에서 음전하를 띤 매우 가벼운 입자가 방출될 수 있다는 것을 실험으로 보여주고 전자의 존재를 증명하였다. 어네스트러더포드(Ernest Rutherford, 1871~1937)는 알파선을 금박에 쪼이는 실험을 통해서 원자핵은 양전하를 띠고 있고 그 크기는 원자 크기의 십만 분의 일에 해당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축구 경기장만한 수소 원자가 있다면 운동장 한가운데 탁구공만한 원자핵이 있고, 관중석에 전자 하나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세상 모든 물질은 대부분 진공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레우키포스가 제안한 “원자와 진공”으로 세상이 이루어져 있다는 말이 연상되지 않는가? 원자가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알게 되고, 양자역학이 등장하자 드디어 물리학과 화학은 원자와 물질의 관계를 만족스럽게 이해할 수 있었다.

리차드 파인만은 그의 저서『파인만 물리학 강의 1권』에서 다음과 같이 원자론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만약 어떤 대재앙이 닥쳐서 세상의 모든 과학적 지식이 사라져야 하고 한 문장만 후손에게 전해질 수 있다면 어떤 말을 해야 가장 중요한 정보를 전하는 것이 될까? 나는 모든 것들이 원자로 되어 있다는 원자론이라고 생각한다.”그의 말대로 원자론을 하나의 표로 정리해서 후손에게 줘야 한다면, 그것이 주기율표가 될 것이다.

멘델레예프와 주기율표

멘델레예프는 제정 러시아 시대 시베리아 토볼스크(Tobolsk) 외곽에서 태어났다. 짐나지움 교장이었던 아버지는 멘델레예프가 태어나던 해 시력을 잃어 사직하였고 가족의 생계는 어머니 마리아 드미트리에브나의 책임이 되었다. 경제적으로 최악의 상황이었지만 마리아는 총명한 막내아들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켜주고자 멘델레예프와 어린 누이 리자를 데리고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까지 2,400㎞를 넘는 거리를 마차로, 말로 여행하였다. 멘델레예프를 모스크바 대학에 입학시키려 하였지만, 시베리아에서 온 시골뜨기 소년에게 모스크바 대학은 입학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에 좌절하지 않고 마리아는 다시 두 아이를 데리고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갔지만, 상황은 같았다. 다행히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교사양성대학(나중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 대학으로 바뀜)의 장이 죽은 남편과 친분이 있어 입학이 가능할 수 있었다. 마리아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멘델레예프가 대학교에 들어갔지만 마리아는 입학 후 10주만에 병환으로 58세에 사망하고, 함께 온 여동생도 일 년 뒤 사망하고 만다. 고아가 된 멘델레예프는 본인의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고학으로 학업에 전념하여 학교를 우등 졸업한다. 후에 그는 “허황된 것을 멀리하고 힘들어도 고결한 과학적 진리만을 찾아라”라는 어머니의 유언을 따라 평생 살아갔다고 회고하며 어머니에 대한 효심을 표현하였다.

1855년 멘델레예프는 대학을 졸업하고 크림반도 지역의 고교 교사가 되었지만 크림 전쟁으로 정상적인 수업이 쉽지 않았다. 그는 1857년 다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22세의 젊은 나이에 대학 강사가 되었다. 그는 강의와 연구에 몰두하며 러시아가 아직 유럽과 같은 연구 여건이 조성되지 않아 불만스러워하고 있었다. 다행히 1859년 멘델레예프는 국가로부터 2년짜리 유럽 연수 장학금을 받게 되고, 프랑스 파리에 있는 콜레주 드 프랑스(College de France)의 앙리 빅터 행뉴 (Henri Victor Regnault, 1810~1878) 교수 밑에서 일한다. 행뉴 교수는 당시 기체 관련 측정 실험으로 세계 최고였는데, 이상 기체의 법칙에 나오는 기체 상수 R은 그의 성 첫 글자를 딴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파리에서 연구를 마친 멘델레예프는 이번에는 독일 하이델베르크로 가서 구스타프 키에르쇼프(Gustav Kirchhoff)와 로베르트 분센(Robert Bunsen)과 함께 일하였다. 키에르쇼프와 분센은 분광학이라는 최신 기법을 이용하여 새로운 원소를 찾아내고 있었다. 연수 중 1860년 독일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국제 화학 학술대회인 카를스루헤 학회(Karlsruhe Congress)에도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이탈리아의 화학자 스타니슬라오 카니자로(Stanislao
Cannizzaro, 1826~1910)로부터 아보가드로 법칙, 원자량 결정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큰 도움이 되었던 유럽 연수를 하고 1861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멘델레예프는 러시아에서는 촉망받는 화학자가 되었다. 그는 기술 대학에서 강사 자리를 얻어 화학의 최신 지식을 강의하여 유명해졌고, 1866년 32세의 나이에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일반화학교수가 되었다. 1869년 자신의 강의를 바탕으로 일반화학 책을 집필하였는데 이 책은 학계에서 인정받아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20세기 초까지 화학 교과서로 많이 사용되었다. 이 책을 집필하는 과정에서 멘델레예프는 원소를 분류하는 방법을설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고, 사흘 낮과 밤을 고민하고 주기율표의 초기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

▲ 멘델레예프의 주기율표 초기 메모
ⓒ commons.wikimedia.org
▲ 표준 주기율표 ⓒ new.kcsnet.or.kr

주기율표의 역사

원소를 분류하고자 한 것은 멘델레예프가 처음은 아니었다. 프랑스의 화학자 앙투앙 라부아지에(Antoine-Laurent de Lavoisier, 1743~1794)는 1789년에 그의『화학개론』에 실은 표에서 최초로 30여 개의 원소를 분류하였다. 화학적으로 비슷한 원소들 사이에서 원자량을 비교하려는 노력도 많은 과학자가 시도하였다. 1816년 독일의 화학자 요한 볼프강 되베라이너(Johann Wolfgang Döbereiner, 1780~1849)는 비슷한 원소를 세 개씩 묶어 분류하는 것이 가능하고, 두 원소를 알면 아직 발견되지 않은 세 번째 원소의 원자량을 예상할 수 있다고 하였다. 예를 들어 염소와 요오드의 원자량 사이에 해당하는 원소(나중에 발견된 브롬)가 있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식이었다. 원소를 상대 원자량이 증가하는 순서로 배열하고 규칙성을 찾은 사람은 화학자가 아닌 프랑스의 지질학자였다. 알렉상드로-에밀 베귀예 드 샹쿠르토아(Alexandre-Emile Beguyer de Chancourtois, 1820~1886)는 카니자로와 아보가드로 이론을 받아들여 원자량을 새롭게 결정하고, 개정된 원자량을 이용하여 원소들을 나열하면 원자량이 16씩 증가하는 규칙이 있다는 것을 1862년 논문으로 발표하였다. 그러나 그는 원통 표면에 나선형으로 원소들을 배열하여 규칙성을 찾았고 화학보다는 지질학 이론을 사용했으며 원통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그림까지 빠뜨려 화학자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같은 시기에 영국의 화학자 존 뉴랜즈(John Alexander Reina Newlands, 1837~1898)도 원소의 배열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원자량이 커지는 순서로 원소를 나열하면 8번째 원소의 성질이 비슷한 옥타브 규칙(1865)을 발견하였다.
영족 기체들이 아직 발표되지 않아 음악 이론으로 원소의 규칙성을 설명할 수 있었지만, 원자량이 커지면서 규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었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들을 건너뛰지 않고 배치하여 주기성을 놓치기도 하였다. 당시 과학자들은 옥타브 이론을 비과학적이라고 믿어주지 않으며, 옥타브 이론이 맞다면 원소 이름의 알파벳 순서로도 규칙을 볼 수 있다고 조롱하였다. 독일의 화학자 줄리어스 로타르 마이어(Julius Lothar Meyer, 1830~1895) 역시 1864년에 출간한『화학에 대한 새 이론(Die Moderned Theorien der Chemie)』에서 원자량을 이용하여 원소를 분류하였고, 논문으로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개정된 원자량을 이용하여 원소들을 분류한 표를 작성하고 있었다.

올해가 “멘델레예프의 해”가 아니고“주기율표의 해”라고 이름 붙인 것을 기억하자. 150년 전 화학자들은 원소들을 원자량으로 배열하다 보면 분명히 어떤 규칙성이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 규칙을 알아내려고 애쓰고 있었다. 아마도 멘델레예프가 아니었다면 마이어가 주기율 규칙을 찾아내었을 개연성이 가장 크다. 그러나 멘델레예프는 원자량의 기준이 아직 정의되지 않았을 때, 양성자나 중성자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때, 알려진 63개의 원소만을 가지고 아직 발견되지 않은 원소를 아우르는 분류표를 만들었다. 주기율표 발표 당시에 아직 발견되지 않았지만, 반드시 존재해야 할 것 같은 원소(갈륨, 스칸듐, 게르마늄)을 예측하고 주기율표에 빈칸을 남겨 놓았는데, 몇 년 후 이들 원소가 발견되고 원자량이나 성질이 멘델레예프의 예측과 잘 맞았다. 이런 이유로 과학계는 멘델레예프의 기여도를 높게 인정하였다. 오늘날 주기율표에는 인공 합성 원소 26종을 포함해 모두 118종의 원소가 배열되어 있다. 지난 150년 동안 주기율표는 알려진 원소를 규칙적으로 분류하고, 새로운 원소를 예측하고 발견하면 빈칸을 메워나가며 계속 수정되어 왔다. 새로운 과학적 발견이 반영되기도 하였다. 양성자와 중성자가 발견되자 원자량 대신 원자핵의 양성자 수, 즉 원자번호를 분류 기준으로 사용하였고, 양자역학이 발전하자 원소의 주기성을 전자 오비털에 전자가 배치된 상태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주기율표는 새로운 원소를 만드는 지도 역할도 했다. 그 결과 주기율표의 7번째 주기를 완성하면서, 2015년 IUPAC (International Union of Pure and Applied Chemistry)에서 113, 115, 117, 118번 원소에 각각 니호늄(Nh), 모스코븀(Mc), 테네신(Ts), 오가네손(Og)의 이름을 부여한 바 있다. 이처럼 새로운 원소를 찾는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얻은 과학적 성과도 상당하다. 방사성동위원소를 인공적으로 만들어 의료용이나 산업용으로 이용하고, 실험에 사용되는 입자가속기를 구성하는 진공 기술이나 전자 공학 같은 요소 기술이 첨단 산업에서 다양하게 활용된다. 매우 독특하고 유용한 성질을 지닌 안정한 미지의 원소가 존재할지 모른다는 기대를 가지고 주기율표 8주기, 원자번호 119번 이상의 원소를 찾는 21세기 연금술도 진행 중이다.

주기율표는 우주를 이루고 있는 원소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하였고 중요한 화학적 물리적 성질을 표시하여 하나의 표로 압축해 보여준다. 인간은 복잡한 세상을 쪼개고 나누어서 이해하고, 숨겨져 있는 질서와 패턴을 발견하면서 새로운 법칙을 찾아내는 동물이다. 150년 전 처음 등장한 주기율표는 여기 저기가 비어 있는 표에 불과했다. 그동안 과학자들은 주기율표의 빈자리를 채워가며 현대 과학 문명의 튼튼한 기초를 만들어 주었고, 미래에도 우리는 주기율표를 계속 활용하게 될 것이다. 이 글을 마치며 문득 바라본 주기율표에서 수 많은 과학자들의 노력과 좌절, 그리고 자연의 규칙적 아름다움을 느끼게 된다. 세계 주기율표의 해에 모두가 그 감동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영 식 / 경희대학교 응용화학과 교수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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