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호 영화비평: <스윙키즈>(2018)] 이데올로기적 중립이라는 판타지

강형철 감독의 <스윙키즈>(2018)는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포로들이 북송을 원하는 이들과 전향을 원하는 이들로 갈라져 또 다른 전선이 형성되었다는 내용의 뉴스릴로 시작한다. 이어지는 것은 이 뉴스를 심각하게 바라보는 수용소장(로스 케틀)의 모습이다. 그는 전쟁의 후반부는 이데올로기가 지배한다면서 북송 포로보다 자유송환 포로가 더 많아야 승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그는 반공 포로들로 구성된 댄스단이 자유세계의 춤을 추는 모습을 기자들 앞에 전시할 계획을 세운다. 이처럼 <스윙키즈>는 전쟁의 스펙타클을 전시하기보다는 전쟁 속에서 인간이 이데올로기의 도구로 활용되는 지점을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표면적으로 볼 때, <스윙키즈>는 여기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서로 다른 배경과 이념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초월해 예술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이념이 개인의 삶을 비극으로 이끌고 있는지가 주인공인 잭슨(자레드 그라임스)과 기수(도경수) 등을 통해 진술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의도와는 달리 서사의 방향은 그들의 진술을 배반하고 만다. “빌어먹을 이념 따위”라고 외치며 춤을 추는 잭슨과 기수처럼 영화는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롭게 날아오를 수 있을까?

공정성을 향한 강박과 불협화음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하나의 선언으로 시작하고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영화는 뉴스릴 화면으로 시작하고 있는데, 여기에는 “공정성을 최우선으로 제작되었습니다”라는 자막이 삽입되어 있다. 뉴스릴은 이념의 전쟁터가 된 거제도의 상황 다음에 평화로운 북한의 유엔군 포로수용소의 모습을 이어 붙인다. 공정성이라는 자막이 무색할 정도로 의도적인 화면의 연결은 인간을 이데올로기의 수단으로 활용하는 소장의 결정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이러한 편집은 영화의 의도를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 의도와 다르게 점차 순수한 춤의 열정에 빠져드는 이들의 서사가 영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우연히 목격하게 된 잭슨의 탭댄스에 매료된 기수는 인민군 영웅의 동생이자 북송 포로들의 희망인 자신의 위상 때문에 남들 몰래 춤을 연습한다. 전직 브로드웨이 댄서인 잭슨은 댄스단을 성공시키면 사랑하는 이가 있는 일본으로 보내준다는 소장의 말에 이 계획에 뛰어든 상태이다. 다른 이들의 사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전쟁통에 헤어진 부인을 찾기 위해 댄스단에 합류한 병삼(오정세)과 춤에 대한 열정과 간식을 준다는 말에 합류한 중공군 포로인 샤오팡(김민호),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통역으로 참여했다가 춤을 추기 시작한 판래(박혜수)는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춤에 대한 이끌림으로 댄스단에 합류한 이들은 시종일관 이데올로기의 벽에 부딪히고 만다. 영화는 댄스단이 춤을 연습하며 성장하는 과정에 주목하는 동시에 춤과 이데올로기에서 갈등하는 기수의 고민을 서사의 골격으로 세우고 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관객이 보게 되는 것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짓밟힌 개인의 재능과 삶이 아니라 이데올로기가 모든 것을 지배하는 풍경이다. 때문에 전쟁 속에서도 춤을 향해 나아가려는 인물들의 행동은 목표를 잃어버린 화살처럼 보인다. 그들의 모습을 재현한 카메라가 상투적인 것과 어울리지 않는 성분의 조합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잭슨이 판래의 집을 찾아간 장면을 잠시 살펴보자. 거기서 잭슨은 배가 고파 음식을 훔쳐 먹은 이를 마을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아 집단적인 린치를 가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공산주의, 자본주의 그것만 몰랐으면 안 죽고 안 죽일 수 있었다. 빌어먹을 이념 따위… 춤을 추는 순간만큼은 전쟁이건 생계건 불행한 상황이건 아무 걱정 없어져”라고 말하며 춤을 추기 시작하는 판래의 모습이다. 이때 영화는 “빨갱이들을 잡아라”라고 외치며 시위하는 사람들의 사이를 거꾸로 달리는 판래의 모습과 잠겨 있는 문을 발로 차며 질주하는 기수의 모습을 데이빗 보위의 음악과 함께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이 장면은 즉각적으로 레오 카락스 감독의 <나쁜 피>(1994)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든다. <나쁜 피>의 이 장면은 자유를 향한 비상으로 통용된 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스윙키즈>가 이 장면을 오마주한 이유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사실 <나쁜 피>가 이런 식으로 해석되는 것은 90년대 시네필들의 영향이 크다. 전수일 감독의 <새는 폐곡선을 그린다>(1999)의 한 장면은 <나쁜 피>의 이러한 해석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댄스단이 기수를 괴롭히던 미군들과 댄스배틀을 펼치는 장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장면은 정수라의 <환희>를 배경음악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들은 이 음악에 맞춰 서로의 실력을 겨루어 본다. 이 장면의 조합이 춤 그 자체에 빠진‘환희’를 보여주기 위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스윙키즈>가 사용하고 있는 영화적 장치와 요소들은 치밀한 고증대신 상투적이고 일차원적인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영화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시대적 배경과 공간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지만 그것이 영화의 전체적인 균형과 어울리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스윙키즈>의 고증은 특화된 공간과 시대에 주력해 영화적 흐름을 자연스럽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에 의해 취사선택된 요소들의 조합과 배치에 불과한 것이다. 이로 인해 사상보다 춤에 대한 열정에 매료된 인물의 모습에 주목하고자 했던 <스윙키즈>의 야심찬 의도는 힘을 잃고 만다.

이데올로기적 중립이라는 판타지
<스윙키즈>의 불협화음이 절정에 이르는 곳은 카메라가 인민군 포로들을 재현하는 순간이다. 탭댄스에 매료된 기수는 동료들의 시선을 피해가며 연습에 매진한다. 여기서 영화는 행복한 표정을 짓는 기수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해 영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다. 하지만 광국(이다윗)이 포로수용소로 새로 전입해 오자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기수와 함께 춤을 배웠던 그는 전투 중 한쪽 팔과 다리를 잃어 국군과 유엔군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수용소의 안락한 나날들을 개탄하며 전선의 동지들과 합류하기 위해 반동분자 처단을 주장하며 포로들을 선동한다. 영화는 김일성과 인공기가 그려진 커다란 벽화 앞에서 연설하는 광국의 모습을 붉은색 조명이 가미된 로우앵글로 포착한다. 그의 선동으로 인해 포로수용소는 혼란에 빠지게 되며 인민군의 영웅이자 기수의 형인 기진(김동건)까지 수용소로 전입해 오자 폭동은 절정에 이르고 만다. 하지만 기진을 재현한 카메라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수상하다. 기진은 키가 크고 다부진 체격을 갖고 있지만 오랜 전쟁으로 인해 정신이 온전치 못하다. 그는 인간이라기보다 인민군 리더의 명령대로만 움직이는 사상의 노예에 더 가까운 상태이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영화가 공산주의 사상에 충실한 이들의 모습을 인간성을 상실한 것과 동일한 모습으로 그린다는 점이다. 그들은 광기에 휩싸여 주위를 선동하거나 로봇처럼 움직일 뿐이다. 이순간 이데올로기를 짓밟힌 개인의 삶과 재능을 표현하고자 했던 이 영화의 의도가 무색해진다. 개인의 삶은 오로지 공산주의에 의해 망가지며 반대진영에 의해 구원받기 때문이다. 영화는 기진과 포로들을 통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익숙한 이미지를 재생산하고 있지만,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구체적인 재현은 거의 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드러나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소련춤’을 배운 유능한 댄서였던 기수는 잭슨의 ‘미국춤’에 단숨에 매료되며 병삼의 애인은‘빨갱이’로 몰려 집단 린치를 당하지만 그런 상처를 감싸 주는 것은 판래의 인간성이다. 중공군인 샤오팡은 ‘미국춤’을 추면서 비로소 허기를 채우게 된다. 소장의 댄스단 계획은 적들의 수단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지만 영화는 이미 그 수단을 보이지 않게 자연화하여 실천하고 있을 뿐이다. <스윙키즈>는 이데올로기에 짓밟힌 개인의 삶과 시대의 비극을 표현하려고 했지만 다른 사상으로의 전향을 품고 있어 자신이 공언했던 공정성과 중립성을 무색하게 만든다. 마지막 장면은 댄스단의 크리스마스 공연이다. 여기서 잭슨은 전쟁과 이념이 아니라면 이들은 재능을 펼치며 다른 삶을 살았을 거라고 “빌어먹을 이념 따위”라고 외친다. 카메라는 공연 장면을 이들의 모습에 상당 부분 할애하지만 서사는 인물의 운명을 비극으로 이끈다. 기수가 끝내 이념에 사로잡혀 로봇처럼 변한 자신의 형을 버리지 못한 까닭이다. 기수가 그랬던 것처럼 <스윙키즈> 또한 끝내 이념을 포기하지 못한다. <스윙키즈>의 ‘댄스’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며, 춤을 향한 이들의 열정과 다른 삶은 ‘자유주의’에 복무할 때만 행복한 것이라는 교훈을 관객들에게 던져준다.

백 태 현 / 동국대학교 국제학생센터 강사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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