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호 테마서평: 필립 로스의 문학세계] 단독적 파국의 윤리

『전락』(필립 로스 저, 문학동네, 2014)
『에브리맨』(필립 로스 저, 문학동네, 2009)
『울분』(필립 로스 저, 문학동네, 2011

파국은 늘 갑자기 찾아온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평온하던 세계가 느닷없이 무너져 내리고 그 밑에 도사리던 시커먼 어둠이 뜻하지 않은 불행이 되어 자신을 찾아왔다고. 이 정체불명의 손님은 진실로 자신과 무관한 존재이며, 자신은 다만 결백할 따름이고 아주 작은 부주의 하나로 귀찮은 일에 연루된 거라 생각한다. 아주 조금만 더 견디면 지나가줄 거라고 지금껏 잘 해냈던 것처럼 이 불편한 계절도 곧 떠나가 줄 거라 믿는다. 그러나 필립 로스(Philip Milton Roth)에 따르면 파국은 애초부터 우리가 함께 태어나 우리의 표정과 자세를 결정하고 시간과 삶과 기억을 씹어 삼키며 무서운 속도로 살을 불려간다. 마치 삶의 모든 지점이 오직 단 하나의 파국을 위해 계획이라도 된 듯이.

작년 5월. 필립 로스의 작고 소식이 알려지면서 그의 문학세계가 다시 주목을 받았다. 코맥 매카시(Cormac McCarthy), 토머스 핀천(Thomas Ruggles Pynchon), 돈 드릴로(Don DeLillo)와 함께 미국 현대문학의 4대 작가로 손꼽히는 그는 퓰리처상, 전미도서상, 전미비평가협회상, 펜/포크너상, 맨부커상 등 노벨문학상을 제외한 주요문학상은 모두 거머쥔, 말 그대로 성공한 작가였다. 폴란드계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유대인 이민자들이 미국의 중산층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겪은 상실감과 회의감을 밀도 높은 문제의식으로 그려낸 그는 거창한 윤리의식을 내세우는 작가는 아니었다. 그는 아메리칸드림의 한복판에서 성장한 인물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장밋빛 성공이 함께 품고 있었을 부패와 몰락의 징조를 투명하고 정확하게 그려낸 작가였다.

필립 로스의 파국적 상상력은 불현듯 돌이킬 수 없는 속도로 찾아와 인간의 마지막 존엄까지 앗아가는 운명의 절대적 폭력성에 대한 상징에 다름 아니며, 그의 문장은 그와 같은 폭력 앞에서만 자신의 진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나름의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만 지극히 평범한 인물들을 위해 바쳐진다. 그들은 반성하지 않는다. 자신의 몰락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운명이 마련해 놓은 마지막 추락을 향해무심히 나아간다. 이 단독적 파국의 윤리는 타협을 모른다. 자신의 거짓과 화해하지 않으며, 세상이 만들어 놓은 희망 속으로 투항하지도 않는다. 그들은 그저 그렇게 몰락을 맞을 뿐이다. 변명도 후회도 없이 미련도 망설임도 없이 자기 생의 대가를 온몸으로 치른다.

『전락』, 어느 날 갑자기

“그는 마력을 잃고 말았다.”『전락』은 이 단순하고도 해명불가능한 사건으로 시작되어, 다시 이 한 문장으로 돌아온다. 마력을 지닌 배우였던 액슬러는 본능적으로 연기를 할 수 있었던 뛰어난 배우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결코 돌이킬 수 없는‘상실’을 선고 받는다. 그는 더 이상 연기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나이가 들어서라거나 심한 정서적 장애를 겪게 되어서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된 것이다. 어떤 이유도 없었다. 대신 그는 연기를 할 때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자의식을 갖게 되었다. 연기를 하고 있는 나를, 사기를 치고 있는 나를 너무도 적나라하게 들켜버리는 무능을, 그 무능 앞에 지나치게 민감해져 버리는‘나’를 갖게 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전부였는지 모른다.

이 ‘무능’은 매우 상징적인데, 액슬러는 바로 이‘할 수 없음’덕분에 주어진 역할과 대사로만 유지돼 왔던 거짓 삶의 울타리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아내는 그가 정신병원 에 한 달 남짓 입원하고 나자 그를 떠났고, 그는 자신이 모든 행위를, 심지어 연기를 할 수 없게 된 상황마저도‘연기’처럼 이해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깨달음’으로 인해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액슬러는 자신의‘무능’을 깨닫고 개과천선하는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배우로서 더 이상 연기할 수 없음을 현실에서 연인이라는 역할의 연기를 수행함으로써 감당하려 했고(“당신한테 난 연기 대신인 존재예요! 연기를 못하는 것에 대한 보상이었다고요!”), 모험과 같았던 연애의 불안을 섣불리 아이를 갖는 계획으로, 정확히는 아이가 있는 부부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해소하려 했다. 심지어 자살은 그의‘마지막 연기’가 된다. 물론 전과 같은‘무능’한 연기는 아니지만 말이다. 가까스로 자신의 연기에 온전히 하나가 되어버린, 그래서 온전히 그역 자체가 되어버린 그가 자신의 머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긴다. 이 마지막 연기로 그는 온전한 배우가 된다. 그 자신이 된다.

『에브리맨』, 죽음이라는 불립문자

‘그’는 광고업계에서 성공한 사람이었고, 때로는 다정다감한 남편이자 아버지였지만 수차례에 걸친 외도와‘성적 모험’의 대가로 가족을 잃어버린, 그리고 이젠 노화로 인해 건강마저도 잃어버린 퇴락하고 몰락한 노년의 남자일 뿐이다. 파렴치한 변명이나 내뱉는 추악한 성욕에 둘러싸인 남자. 사람들은 아마 이런 식으로 그를 기억할 것이다. 어떤 해명으로도 그를 이러한 스캔들로부터 구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는 이미 묘지 속으로 들어갔고, 사람들의 인생으로부터 사라져 잊혀질 테니까.『 에브리맨』은 이 남자를 옹호하려는 소설이 아니다. 그는 너무도 태연하게 아무 ‘생각’도‘경각심’도 없이 욕망을 택한다. 자신에게 소중했던 사람들이 입은 상처의 무게를 잘 알지만, 그에 대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에게 유일하게 윤리적인 측면이 있다면, 그 모든 대가와 결과를 말없이 받아들인다는 것 정도일 것이다.

그럼에도 『에브리맨』에는 이상한 감동이 있다. 누구도 죽음으로부터, 노쇠로부터, 사라짐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 뜨겁고 행복하고 들뜬 지금에 무한히 머무르려는 우리 안의 영원성을, 이를 무참히 짓밟아버리는 시간을, 운명을, 돌이킬 수 없음을 필립 로스의 인물들은 가장 단단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치열하게 살아내고 뜨겁게 패배한다. 그 패배의 선명함이 거꾸로 존엄의 자리를 되묻는다. 누구나 자신의 어리석음과 죄와 나약함의 무게를 지고 꼭 그만큼의 고통 속에서 살아간다. 타인은 함부로 읽어선 안 되는 불립문자이며 그럼에도 읽으려는 시도를 멈춰선 안되는삶의조건이자의무이다.『 에브리맨』은 묘지, 너무도 견고한 사실이 되어버린 타인의 죽음 앞에 독자를 데려다 놓곤 결코 온전히 읽을 수 없는, 불가피하고 불가항력적인 몰락의 시간을, 이미 끝이 예정되어버린 황혼의 적막을 가만히 펼쳐 놓는다.

『울분』, 치사량의 울분

『울분』은 1950년대 미국의 보수적이고 억압적이던 사회분위기를 적확하게 그려낸 수작으로 한국전쟁 때 목숨을 잃은 19살 소년 마커스 메스너의 죽음을 향해 흘러간다. 마커스의 아버지는 그가 대학에 입학한 첫날부터 전쟁에 끌려가 죽을까봐 겁을 먹는데, 이로 인해 아들을 과하게 억압하기 시작한다. 이에 반발한 마커스가 대학을 와 인스버그로 옮겨 집을 떠나면서 마커스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조건값들이 하나하나 세팅되기 시작한다. 울분은 이렇게 사소한 결과들이 쌓이고 쌓여 예정된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삶의 가속도를 탁월하게 보여주는데, 이는 단순히 삶의 아이러니를 보여주는 수사적 차원에 국한되지 않는다.

누구도 마커스를 죽음으로 내몰지 않았는데, 누구도 그런 의도를 갖지 않았는데, ‘억압’은 ‘반발’을 낳고, 그‘반발’에 대한 반향으로 더 큰 억압이, 결국에는 죽음이라는 폭력이 되어 돌아온다.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 때문에 자식을 죽음으로 내모는 아이러니는 선택과 배제의 합리적 폭력성으로 숱하게 반복 재생산되며 마커스가 발붙일 공간을 서서히 앗아 간다. 마커스는 질식사한 것이다. 돌연한 불행으로 와인스버그 졸업생 중 유일하게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것이 아니라, 마커스가 직접 부딪치며 누군가를 사랑하고 이별하기도 전에 숱한 말과 평가와 모욕들이 그의 삶을 대신 살아버린 탓에, 그가 숨쉬어야 할 공기조차 먼저 숨쉬어버린 탓에 죽어버린 것이다. 그러니 우연과 아이러니는, 단지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이라는 기나긴 한탄 섞인 후회를 위한 변명일 따름이다. 파국은 이미 오래 전부터 그렇게 살아 숨쉬고 있었던 것이다.

태연함의 윤리

필립 로스의 소설은 이미 예정된 실패와 죽음으로 태연히 걸어 들어가는 인물 들을 곧잘 보여준다. 이 태연함은 하나의 온전한 성격이어서 자신들의 편견과 고집에 있어서도 반성이나 후회를 거의 하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성격과 한계 그대로를 충실히 살아낼 따름이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에브리맨』)라는 언급처럼 필립 로스에게 소설은 거창한 영감과 아이디어, 목소리를 보여주기 위한 실험적 장이라기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삶을 가장 정확하게 보여주기 위한 일상의 노동에 더 가깝다. 결점투성이인 완전하지 못한 인간들의 ‘한계’자체를 선명히 부감해냄으로써, 한계 너머의 감각과 윤리의 지점들을 ‘태연함’이라는 제스쳐로 길어 올린다. 그의 마초적 인물들에 불편함을 느끼는 일부 지적들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인물들이 보이는 한계는 필립 로스 자신의 것이 아니라 현실에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한계이며, 그의 인물들은 한계를 있는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현실에 내재된 폭력과 모순들에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길들여야 하는 짐승이며, 자기 내면의 폭력과 마주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건네는 대화이지 짐승이 되는 일이 아니다.

이 철 주 / 문학평론가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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