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호 인터뷰: 이문재, 시인] 시인의 선물, 불가능을 상상하기 그리고 분노하기

청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시인의 무조건적 환대를 이용해 막무가내로 인터뷰를 잡았다. 인터뷰의 이유는 시인의 새로운 시집이 나와서도 아니고 현재의 뜨거운 이슈에 대해 질문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삶을 대하는 시인의 자세와 태도를 통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배우고자 했다. 그래서 삶의 고고한 깨달음을 얻을 요량으로 기도하는 법과 걷는 법에 대한 질문을 준비해갔지만 단번에 혼났다. 그것은 ‘옛날얘기’ 였다. 이상적인 미래를 꿈꾸는 시인의 표정은 단호하다.

이문재 시인은 우리 학교 국문과를 졸업하고 20년간의 기자 생활을 거쳐 현재 본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자기성찰과 관계의 회복

 

Q.  교수님은 글쓰기 수업이나 시 창작 수업의 첫 시간마다 ‘최초의 기억을 꺼내보라’는 숙제를 내주시며 학생들이 먼저 자기 자신과 대면하게 하십니다. 그 수업방식의 의도가 궁금합니다.

저는 공부나 연구나 창작이나 모두 자기성찰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성찰이 제대로 이루어지면 거기서 반드시 관계가 드러납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홀로 존재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존재는 부모에게서 나왔고 부모는 부모의 부모에게서,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생태계전체, 우주로까지 관계가 이어지게 됩니다. 우리는 관계의 소산이고 관계의 과정이에요. 죽고 나서도 우리는 누군가의 기억을 통해서 끊임없이 관계 맺습니다. 자기성찰을 하면 관계 속에서 우리가 신비롭고 존엄한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지구적 상상력’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나라는 존재를 사회적, 인간적 차원에서만 수평적으로 놓고 생각하는 것은 스스로를 너무 작게 보는 것입니다. 내 존재의 위상을 우주적 차원에서 놓고 보면 한쪽으로는 더 겸손해지고 다른 한쪽으로는 더 당당해질 수 있습니다.

Q. 이 시대의 청년들은 당장 눈앞의 취업문제에 고민이 많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는 청년들이 자신감을 잃고 작아질 수밖에 없도록 만듭니다. 생태주의적 관점에서 교수님은 우리 사회의 문제가 어디에서 비롯됐다고 생각하시나요?

내가 여러분들의 부모 세대쯤 되는데, 저는 우리 세대들한테 이런 얘기를 합니다. 우리가 지금 젊은 세대들의 미래를 착복했다, 돌려주고 가자. 우리나라 국민소득이 지금 이만 칠천불 정도 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젊은이들의 미래를 모두 뺏어온 결과입니다. 지금 국민소득이 칠천불 정도였으면 젊은이들의 미래가 더 많았을 거예요. 우리 세대는 그만큼 덜 먹고 덜 썼겠지만 전 그게 자연스럽다고 봅니다. 압축 성장, 이게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놨어요. 그렇다고 우리 세대는 지금 행복합니까? 그렇지 않아요. 우리 세대 대부분은 국가가 조성한 공업단지, 다시 말해 근대화, 산업화 정책에 의해 정든 고향을 등졌습니다. 지금 도시화, 근대화, 산업화, 정보화는 농업, 농촌, 농민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거예요. 자본이 관계들 사이에 개입하면서 개인의 삶이 무너졌습니다.

저는 국가의 제1임무가 식량과 에너지를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회와 개인의 일상적인 삶을 지탱하는 것이 식량이고 에너지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국가가 아닌 물건 파는 장사꾼 집안이 됐습니다. 땅이 없는 도시국가가 됐어요. 우리나라는 에너지 자급률 1%에 식량자급률이 25%밖에 되지 않아요. 농촌이 붕괴되면서 우리가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리는 모든 것이 지구, 땅으로부터 나온다는 인식이 사라졌습니다. 모든 것이 시장에서, 공장에서, 편의점에서 오는지 알죠. 자기를 성찰하고 관계에 주목했다면 저절로 알 수 있던 것이었습니다.

Q. 이미 농촌이 붕괴되고 도시화가 진행된 현시점에서 관계의 회복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제가 도시를 다 버리고 시골로 가자고 얘기하는 건 아니에요. 기계, 디지털 문명을 버리고 자연으로 돌아가자, 이건 불가능해요. 이제는 시골로 가려고 해도 자본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내가 생각을 바꿨어요. 그럼 도시를 시골로 만들자. 도시에서 시골처럼 살아보자는 겁니다. 요즘 서울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소위 도시재생마을 만들기 프로젝트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어요. 새로운 가치에 기반을 둔 공동체를 새로 만들자는 것인데, 성북구에 가면 아주 멋있는 캐치프레이즈가 있습니다. “마음이 모여 마을이 됩니다” 여기서 마음은 새로운 가치로, 우애와 환대를 말합니다. 우애와 환대는 관계의 핵심입니다. 우애는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 안에 생기는 진한관계이고 환대는 낯선 사람들,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무조건 맞이하는 것입니다. 환대의 법칙은‘무조건’입니다. 어떤 조건이 붙으면 그건 환대가 아니고 상업행위나 서비스업입니다. 지금 환대를 새로운 가치로 말했지만 사실 환대는 전근대, 비근대 사회에 모두 있었습니다. 토착사회를 유지하는 핵심요소 중 하나가 환대였습니다.

저도 어릴 때 그런 경험이 많이 있습니다. 제가 살던 곳은 대문도 없는 시골의 초가집이었는데, 가끔 한밤중에 누군가 찾아와서 계십니까, 하룻밤 묵어갈 수 있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럼 우리 부모님들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묻지 않습니다. 그냥 들어오라고 하고선 나그네에게 밥상을 차려줍니다. 그렇게 한방에서 같이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나그네는 밥을 먹고 떠납니다. 이것이 환대입니다. 요즘엔 이러한 가치들이 사라졌습니다.

불가능에 대한 의심과 시인의 단호함

 

Q. 요즘 같은 시대엔 그런 가치를 기대하기 힘들지 않을까요? 범죄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먼저 듭니다.

우리는 잘못된 사회를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을 바꾸지 않으면 사회는 바뀌지 않아요. 이건 사람답게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다른 생명과 이런 식으로 관계를 맺는 건 잘못된 것이라고 끊임없이 지적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미 사회의 많은 부분에서 비정상이 정상이 되어 버렸어요. 정상적이지 않은 것은 정상적이지 않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술과 학문, 언론, 교육에 주어진 책무라고 봅니다. 우애와 환대가 일상적으로 통용되는 사회에선 범죄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런 가치를 복원하려 해야지 포기하는 식이 되면 안 됩니다.

나는 불가능의 예술이란 말을 좋아하는데, 정치를 가능의 예술이라고 하잖아요. 정치는 타협과 합의를 통해 실현 가능한 것만을 추구합니다. 문학은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는, 불가능의 예술이에요. 도시를 시골로 만드는 것, 우리 삶을 작동시키는 보편 가치를 우애와 환대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불가능하니까 해야 합니다. 가능한 것은 기업인이나 정치인이하는 것이고 불가능한 건 우리가 해야죠. 그리고 불가능한 것이 가능해졌을 때 삶이 변하고 문명이 변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우리는 불가능하고 친해져야 합니다.

Q. 초기의 서정시에서 최근의 문명 비판적인 시까지 교수님의 시세계엔 어떤 변화가 있는 것 같습니다. 시를 쓰실 때 가장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이 무엇인가요?

30대 초반까지는 시를 쓸 때 무언가를 받아 적는다는 느낌이 강했어요. 그게 상당한 콤플렉스였습니다. 다른 친구들은 소위 시를 자기 안에서 만들어내는데 나는 내 안에서 나오는게 아니라 어디선가 나오는 걸 무당처럼 받아 적었던 거죠. 그래서 두 번째 시집부터는 나름대로 시적 지향점을 가져야겠다 생각하고 산업 문명이 가지고 있는 속도 지상주의에 저항하는 시를 썼어요. 거기서 자연스럽게 생태주의로 넘어가게 되었죠.

젊었을 땐 문체에 큰 신경을 썼지만 지금은 이 시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어떤 새로운 의미를 가지는지에 중점을 둡니다. 저는 시를 쓰는 것이 공적인 행위라고 생각해요. 문학이공적인 행위라고 하면 거부감을 가지는 경우가 있는데, 매체를 통해 사회에 던져지는 문학은 대단히 공적인 행위입니다. 그래서 나는 문학이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많은 사람이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기여하는 것, 후대에 더 나은 미래를 물려주는 것, 그게 공적인 행위의 내용이라고 볼 수 있죠.

Q. 공적인 행위로서 교수님의 시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시의 사회적 역할이 많이 있겠지요. 그 역할엔 공감, 위안 이런 것도 있겠지만 나는 시를 그런 맥락에 놓고 싶지 않아요. 시의 역할은 사람들에게 생각의 전환점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기자 생활을 오래 했지만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면에서 시와 기사는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요.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는 전환, 지금과 다른 미래가 가능하다고 알려주고 그걸 공유하는 것, 거기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우리는 기존의 것이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발상의 전환을 잘 하지 않습니다. 익숙한 것들에도 시인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시를 통해 생각하게 만드는 거죠. 그렇다고 시가 진리나 진실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에요. 다른 데서 보면 다른게 보인다, 그 정도이죠. 나는 시가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위대했으면 진작 세상을 바꿨어야죠.

Q. 교수님의 시를 정치적이다 라고 말해도 괜찮을까요?

저는 좋습니다. 단 나쁜 정치는 안 되죠. 권력투쟁 하는 정치 말고요. 자기를 성찰하고 그걸 표현하는 것을 나는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자기표현이 자기정치입니다. 우린 표현을 잘하지 못해요. 할 말이 없으니까요. 생각의 전환이 이뤄지지 않으면 할 말이 없어집니다. 비정상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면 표현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표현은 정치의 시작이고 끝입니다. 자기성찰과 표현이 모여야 잘잘못이 드러나고 우리의 조금 다른 미래를 꿈꿀 수 있습니다.

걷기와 기도하기를 넘어서

 

Q. 교수님께서는 어느 때 전환의 순간을 맞이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주로 언제 시상이 떠오르세요? 반대로 시가 떠오르지 않을 때는 언제인가요?

저는 아침에 일어나면 아직도 담배를 피우기 때문에 항상 집 밖으로 나와서 하늘을 보고 나무를 보고 땅도 보고 그러는데, 그때 많은 아이디어가 떠오릅니다. 이것은 과학적으로도 증명이 된 것인데, 잠들기 직전하고 잠 깬 직후에 우리 뇌파는 알파파로 바뀌면서 아이디어가 샘솟습니다. 나는 이걸 ‘신이선물을 주는 시간’ 이라고 얘기하는데 불행하게도 그 시간에 사람들의 머리맡에는 항상 스마트폰이 놓여있습니다. 신이 하루에 두 번, 문제를 해결하도록 아이디어와 해결책을 주는데 스마트폰 때문에 그 선물을 받지 못하는 겁니다.‘ 신이 선물을 주는 시간’이 아니라도 스마트폰과 디지털 문명에 우리는 많은 것들을 빼앗겼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시가 떠오르지 않기가 힘듭니다. 보이는 것마다 문제점이 있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데 시가 왜 떠오르지 않아요. 이젠 기도하기와 걷는 것만으로 안 되고, 분노하고 표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Q. 자본과 문명에 분노하고 표현하는 교수님의 생태주의 시의 도착점은 어디일까요?

천국이죠 천국. 그런데 누가 천국에 가겠어요, 끊임없이 가는 거죠. 그리고 그땐 시가 필요 없어요. 시는 지옥의 산물이지 천국에 무슨 시가 필요해요. 천국에서는 찬송가만 필요한 거지. 즐겁다, 신난다, 고맙다, 예쁘다, 아름답다, 그런데 그건 천국에서만 가능한 것이고 여기는 천국이 아니기 때문에, 계속해서 시가 나올 겁니다.

대담·정리: 허승모 | suam3480@khu.ac.kr

사 진 : 계은진 | nina01@khu.ac.kr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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