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호 테마서평: 20세기 일본 문학] 그들은 미악(美惡)하다, 일본인의 본질적 미의식

 

터널의 저편, 모노노아와레(ものの哀れ)의 심미적 세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의『설국(雪國)』이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1968), 위원회는‘일본인의 심정의 본질(the essence of the Japanese mind)을 그린, 몹시 섬세한표현에 의한 내러티브의 탁월함’이라는 수상평을전했다. 일본인의 심정은 무엇일까?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었다’라는 유명한 첫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에서 주인공 시마무라는 그를 흠모하는 관능적이고 매혹적인 여자 고마코와 만나고, 한편으로 아름답고 순수한 여인 요코와 미묘한 관계를 형성한다. 그는 터널이라는 경계를 지나 허무와 비현실의 세계인 설국으로 들어가면서, 현실과는 다른 그 공간에서 자신의 미적 세계를 구축한다. 시마무라가 묘사하는“이 세상이 아닌 상징의 세계”설국에서는“뭐라고 말할 수 없는 아름다움으로 가슴이 설렌”다. 이런 시마무라는 두 여자 사이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도 직접 감정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며, 여행하는 이방인으로 한 발짝 떨어져 있고 설국에 대해서도 그런 시각으로 일관한다. 설국이라는 특유의 자연적 풍경에 주인공의 심리를 평면에 맡겨 드러내지 않으며 무감(無感)하게 거리를 두듯 자연과 생명으로 합일시키는 서정성의 바닥에는 허무함이 깔려있다. 자신의 뿌리가 동양인이라고 설명하는 가와바타의 일본적허무주의 심상은 주인공 시마무라의 시선에 투영되진 않으며, 소설 곳곳에 그저 카메라의 렌즈처럼 세밀하고 아름답지만 차갑고 이질적인 느낌으로 명확하게 거리를 두는 차분한 묘사들로 대신하고 있다. 그리고 시마무라는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의 정열이 그저 덧없고 아련하게 느껴지기만 한다. 이러한 관조적 정서와 아련한 미의식은 깊고 진한 아름다움과 감동을 주는 일본의 전통적 미의식‘모노노아와레(ものの哀れ)’로 이어진다. 인간 존재 그 자체에 내포된 통렬함이나 슬픔에 대한 감수성으로 일본인에게 가장 고유하고 중요한 속성인 이것은 변화무쌍한 세상에서 가치 있는 어떤 존재들이 더 연약하게 느껴지고 그것이 전락하는 것을 목격했을 때 느껴지는 정감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속성은 시마무라가 차창에서 역장을 부르는 요코의 목소리를 듣고‘맑고 깨끗해서 슬프리만치 아름다운 목소리’라는 묘사에서 정점이 된다. 그 목소리의 아름다움이 극에 달해 마치 허공으로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존재로서 지각되었다는 것, 즉 모노노아와레는 그 목소리를 통해 느낀 아름다움이라는, 연약함이 더 연약한 것으로 전락하는 의식 과정에서 얻어지는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시마무라는 이 연약한 목소리에서 자신이 느낀 그대로의 감성으로 생명의 아름다움을 느낌으로써 자신의 미의식과 일체화시키는, 모노노아와레를 깨달은 상태에 있다. 이렇게 대자연의 섭리나 거대한 힘에 휩싸여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미물의 죽음, 인생의 비참함, 파괴와 허무를 느끼는, 그리고 작고 연약하고 소박한 사물에서 극치의 아름다움을 이끌어내는, 직감지향적이고 독특한 미의식은 종국에 대상과 자신의 일체화라는 심미적 카타르시스를 담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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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등한 선악의 구조, 일본적 악마주의 탄생

모노노아와레를 미학적으로 정립한 근세의 저명한 국학자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는 이 미의식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인정일 뿐이고 선악과는 관계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을 선악의 구분에 따라 윤리적으로 억누르려 하는 것 자체가 작위적이기 때문에 오로지 인간의 정서에 자연스럽게 수용될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인정에 따르는 것이 선이고, 모노노아와레는 그 선악의 유일한 기준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심미적 절대가치는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 1925~1970)의『금각사(金閣寺)』(1956)를 통해 이단적 악마주의로 발전한다. 인간에게 미의식이 도덕적 의식보다 근저적인 테제로 내재되어 있는 이 소설의 주인공 미조구치‘나’는 말더듬이라는 생리적 장애로 인해 외부와 소통 없이 살며 세상에서 소외되어 있다. 한때는 선친으로부터 양도받은 금각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었다. 금각은 절대적이고 완벽한, 범접할 수 없고 신성적인 미(美)이다. 그러나 나와 금각을 연결하는 것은 심미적이고 온화한 구도자적 코드가 아니라 이단적인 욕망과 선천적 장애에서 기인한 열등의식이다. 나는 창부의 배를 짓밟으며 감미로운 승리의 기쁨을 느끼고‘악의 광채’를 명료하게 의식한다. 미시마는 이런 주인공의 욕망과 열등의식을 죄악으로 보거나 비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러한 두려움과 그로 인한 불안과 공포, 또 여기서 생성되는 파괴의 사악함이 비로소 실존적 인간을 구원한다고 역설한다. 이것은 그저 표상에 불과한 금각을 태워버림으로 차안(此岸)을 파괴하여 피안(彼岸)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신성성에 대한 도전과 이단을 실행함으로 ‘악마적’순간으로 치닫는다. 얼핏 악이 완전한 구원의 필요조건처럼 보이는 서양의 악마주의로 이해될 수 있지만, 미조구치의 비열함은 용기를 얻는 원천이 되고, 악덕은 순수한 선의 에너지와 갈등하는 것이 아닌 순수한 에너지로 환원된다. 악은 선과 대립하지 않는다는 미시마의 사유는 서양적 악마주의에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내용이다. 오히려 선과 악을 절대적으로 구분하지 않고 대등하게 보며, 악을 절대적인 죄악으로 몰아가지 않으면서 생명력의 쇠퇴와 혼탁의 상태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일본의 미의식에 더욱 닮아있는 독특한‘악마주의’로 해석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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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부조리한 악마가 되어도 괜찮은(?) 이유

미시마 유키오의 진지한 악마주의의 뿌리는 그 개인의 것이라기보다 일본 전통 문화의 흐름 속에 있다. 이것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의 단편소설『라쇼몽(羅生門)』(1915)의 모티브가 되었다. 지진과 화재와 기근의 전방위적 재앙으로 피폐해진 교토에서 황폐한 누각이 되어버린 라쇼몽에 사람들은 급기야 거둬줄 이 없는 시체마저 버린다. 그 스산한 풍경 속에 얼마 전 해고되어 갈 곳 없는 하인이 빗속에서 밤을 맞는다. 이 남자는 도둑이 될지 아니면 길바닥에서 굶어죽을지 삶의 방도가 철저히 양분된 극적인 상황에 놓여있다. 그의 눈에 뱀을 마른 생선이라고 속여 팔다가 죽은 여자의 머리카락을 뽑아 가발을 만들어 생계를 잇는 노파가 들어온다. 그녀는 자기 또한 굶어죽지 않으려고 하는 일이니 나쁜 일이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며 변명한다. 처음엔 악에 대한 반감이 가득했던 하인은“전혀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는 용기”로 노파의 옷가지를 빼앗아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인간은 맹목적인 자기정당화의 본능을 갖고 있다. 하인은 그 본능을 확인하는 신뢰를처음엔 선에 두고 있었지만 악을 지향하면서 자기 부정을 하고, 사람들이 안주하는 습관적인 사고에 의심을 나타내다가 결국 인간성에 도의적인 반역을 시도한다. 그 반역의 논리는 서양의 개인주의에 기초한 에고이즘의 수용은 아니다. 또한 인간 윤리를 완전히 부정하고 윤리적 금제로부터 자유를 얻는 카뮈(A. Camus, 1913~1960)의『이방인(L’etranger)』에 등장하는 뫼르소처럼 보이지도 않는다. 아쿠타가와는 굶어죽는 것이 선이고, 도둑질하는 것이 악이라고 나누지 않는다. 실은 인간이 상황에 따라 변해갈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담보한다. 그래서 부조리한 것은 인간이 아니라 인간을 부조리하게 몰아가는 세상일 뿐이다. 노파도 하인도 본성 자체가 사악해서라기보다 ‘어쩔 수 없이’ 상황에맞는 최선을 선택했을 뿐이다. 비록 그것이 약탈과 폭력이라는 또 다른 부조리로 대응한다고 해도 결코 선과 악으로 구분해서 단죄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선과 악이 이분법적으로 대립하고 부조리를 악의 한 구성으로 상정하는 서양적 윤리관과 다르게, 여기서는 부조리의 원인과 이유를 바로잡으면 언제든 조리의 세계로 돌아올 수 있다는 일본 고유의 낙관적 윤리관이 있다.

일본인의 심정은 본질적으로 선악적 윤리나 옮고 그름의 도덕보다 심미성에 더 큰 무게가 있다. 나약하게 전락하는 미물이 더욱 가엾고 쓸쓸하지만 그것이 너무나 아름다운 그들에게 일반적 선악관과 죄의식은 그다지 양심의 기준이 되지 않는 듯싶다. 종전 이후 아시아 주변국들에 대한 가해 책임과 역사적 반성 없이 군사 재무장으로 일관해온 현재 일본의 불편한 ‘진실’ 또한 그렇지 않을까. 절대적인 잘못은 없었다. 악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약해서 그런 것뿐. 그저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들에 체념하고, 주어진 상황에 따라 선택하며 움직여왔을 뿐이다. 전쟁 또한 슬프도록 아름다운 그들 나름의 미의식의 발현이었지 윤리적 비난을 받을 근거는 없다. 그래서 미안하지 않다. 그들의 현세적 삶의 방식은 이런 식으로 전통적 미의식을 예찬하면서 주변 국가의 보편타당한 윤리의식을 조롱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강혜선 | 충남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강사

* 그림 설명 및 출처

– 그림1: (왼쪽부터) 『雪國』(川端康成, 新潮文庫, 1947),『설국』(가와바타야스나리, 신조문고, 1947) (출처: www.shinchosha.co.jp),『金閣寺』(三島由紀夫, 新潮文庫, 1960),『금각사』(미시마유키오, 신조문고, 1960) (출처: www.shinchosha.co.jp),『羅生門』(芥川龍之介, 新潮文庫, 1968),『라쇼몽』(아쿠타가와류노스케, 신조문고, 1968) (출처: www.shinchosha.co.jp)

– 그림2:  (좌)금각사(金閣寺), (우)아베 총리의 신사참배(출처: www.kyodo.co.jp)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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