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호 책지성: 캐런 메싱, 『보이지 않는 고통』] 보이지 않는 고통, 정면으로 보기

 

 

내가 하는 일이 나의 건강을 망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곧바로 일을 때려치우고 조용한 곳에서 휴식을 취하며 건강을 돌볼 수 있을까?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지면서 어느 순간 건강은 더 이상 자신에게 우선순위가 되지 못한다. 그리고 자본가들은 누구보다 이런 노동자의 약점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 노동자와 그 가족의 생계를 손에 쥐고 쉽게‘갑’의 자리로 올라서고 노동자는 ‘을’의 위치에서 저항력을 상실한다. 노동자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지점이다. 거대한 힘 앞에서 ‘을’들은 점차 구조에 순응하게 되고 그들의 고통은 계속해서 희미해진다.

 

자본이 은폐하는 노동자의 고통

 

온종일 허리를 굽혀 청소하면서 만성적 허리통증을 갖게 된 청소노동자나 장시간 서서 일하면서 하체 질환을 갖게 된 마트 계산원은 자기의 일이 자신의 건강을 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들은 이내 그것을 안다고 변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 또한 깨닫게 된다. 자유시장 경제의 논리에서 이들은 일자리를 선택할 자유가 있었고 사전에 급여에 대해 협의했으며 자유의지에 따라 계약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지휘하는 자본주의 경제에서 이들의 고통은 스스로 선택한 자발적 고통으로 변모한다. 애덤 스미스(Adam Smith)의 ‘보이지 않는 손’ 은 노동자에게 일자리 선택의 자유를 주었으며 일에 대한 자율성을 선물했다. 노동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개인의 목적을 위해 일하면 ‘보이지 않는 손’이 나타나 자율적으로 시장의 질서를 조정해준다는 애덤 스미스의 주장은 자유시장 경제체제 확립의 발판을 마련했다. 하지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깊숙이 자리 잡은 ‘보이지 않는 손’ 은 닿는 것들을 똑같이 보이지 않게 만들며 사회문제를 은폐하는 거대한 힘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청소노동자의 허리통증은 일하는 대가로 생기는 당연한 고통으로 분류되고 거대한 산업재해만 신경 쓰는 관리자들에게 노동자의 일상적 고통은 점차 보이지 않는 고통, 또는 볼 필요가 없는 고통이 된다. 과학자이며 노동보건학자인 저자 캐런 메싱(Karen Messing)은 과학을 통해 ‘보이지 않는 손’이 은폐하는 노동자의 보이지 않는 고통을 수면 위로 꺼내는 작업을 한다.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이 그들의 낙후된 작업 환경에서 비롯됨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증명하여 노동자가 알맞은 보상을 받고 더 나은 노동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저자는 ‘자본’ 이외에도 노동자의 고통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거대한 힘들을 하나씩 포착해가며 정면으로 맞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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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은폐하는 노동자의 고통

 

학문이 자본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는 현재, 보건연구의 영역 또한 시장의 논리에 지배된다. 자본가들은 장시간 서서 근무하는 것과 하체 질환의 연관성을 분석하는 연구에 돈을 투자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체 질환이 장시간 서서 일하는 환경 때문이 아니라 노화, 비만, 피로 등의 요소 때문에 발생한다는 연구주제에 더 관심을 보인다. 하체 질환과 같이 시간을 두고 발생하는 장기적 산업재해는 노화나 피로에 쉽게 교란되며, 그것이 과학적 연구로 증명되기까지 한다면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보험료를 지급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과학이 ‘노동자의 건강 연구에 언제나 선한 결과만을 불러오지 않는 것’을 깨닫고 자본가만이 아닌 과학자나 정책 결정권자의 태도 또한 문제시한다. 노동자의 고통에 관한 과학자의 연구가 객관성을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통계상 유의미한 결과만을 중시하고, 노동자가 느끼는 실제적인 고통은 배제하면서 오히려 노동자를 소외시키는 것이다. 사실 어떤 부분에서 노동자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데 과학이 일조한다. 노동 환경의 문제로 노동자의 건강에 위험이 발생할 때, 그것이 산업재해로 인정받기 위해선 5%의 유의수준에서 증명되어야 한다(질병의 발생이 작업 환경이나 작업내용과 95% 이상의 관련성을 가지는가에 대한 증명). 하지만 청소노동자의 만성적 허리통증이나 마트 계산원의 하체질환, 무거운 짐을 옮기는 택배기사의 근골격계 질환은 오랜 기간에 걸쳐 만성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업무와의 직접적 관련성을 증명하기 어렵다. 오래 서 있으면 다리에 문제가 생긴다는 당연한 상식이 노동자에게 적용되기 위해선 수많은 증빙서류가 필요하다.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고통을 겪는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산재 신청을 처음부터 포기한다. 계산된 수치와 통계 앞에서 노동자의 고통은 노동과 상관없는 개인적인 고통이 된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임상의학의 탄생』(1963)에서 과학(의학)과 권력을 연결시키며 “관찰하는 것은 어떠한 개입도 반대한 채 언제나 침묵하고 움직이지 않으며, 관찰하는 대상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둔다”라고 말한다. 과학은 실험과 관찰이라는 특성과 함께 본질적으로 수동적이다. 이에 저자는 수동적인 과학 앞에서 과학자의 능동적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과학은 연구실 책상 위의 실험을 넘어서 하나의 사회운동이다. 저자는 노동자의 고통을 은폐하는 거대한 힘을 집요하게 쫓아가며 권력구조의 문제까지 투시한다.

 

권력구조가 은폐하는 노동자의 고통

 

노동자의 보이지 않는 고통은 더 보이지 않는 권력구조에 숨어있다. 권력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자본을 무기로 교묘하게 파고들어 개인을 착취한다. 이때 자본에 의해 한번 가려진 노동자의 고통은 권력이 개개인의 욕망에 내재화되며 이중으로 은폐된다. 이제 문제는 억압과 착취가 아니라 욕망 차원에서 노동자들이 권력 구조에 스스로 따르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내면에 자리한 보이지 않는 권력 구조 아래에서 저항력을 잃는다. 청소노동자는 허리에 무리가 가는 무거운 들통을 바꿔 달라고 관리자에게 요구하지 않고 마트 계산원은 자리에 작은 의자라도 놓아 달라고 투쟁하지 않는다. 이것들은 노동자에겐 너무 사소한 문제이다. 이들은 미리 관리자와의 관계를 악화시켜서 나중에 근무시간을 조정하지 못하게 되는 문제를 더 두려워한다. 권력구조로의 편입을 꿈꾸며 자신의 위치를 부정하는 경우도 있다. 대다수가 학생인 음식점 서빙 노동자들은 학생으로서의 자신과 서빙 노동자로서의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이런 하급 노동은 일시적인 것뿐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착취하는 권력 속에 자신을 투영시키는 것이다. 이런 와중에 여성 노동자의 고통은 보이지 않는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한 번 더 가려진다. 일터에서의 고된 노동을 끝내고 집에 돌아온 여성들은 여전히 남아있는 가사노동을 마주한다. 당연히 해야 하는 일로서 집안일은 시장경제의 영역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며 가족 구성원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다. 돈을 받고 하는 청소 노동의 경우에도 여성들은 남성 노동자들에게 차별받는다. 여성 노동자들이 “허리를 굽히고 화장실을 손으로 박박 닦을 때” 남성 노동자는 힘의 차이를 이유로 보일러나 기계를 만진다. 같은 노동자 집단 속에서도 고통의 격차가 벌어지는 것이다.

 

지식의 분배를 통한 저항의 가능성

 

노동자의 고통은 세분화되어 거미줄 같은 권력관계 속에 피라미드처럼 차별화되고 단계가 내려갈수록 고통은 더욱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이러한 차별을 완화시키는 방법으로 지식의 분배를말한다. 자신의 일이 몸을 아프게 한다는 것을 알지만 구체적인 연관관계를 증명하지 못해 자신의 몸을 외면해야 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자신의 일이 어떻게 자신의 몸을 아프게 하는가’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노동자에게 전해주는 것이다. 계산과 통계에 당하고만 있던 노동자들에게 과학이란 똑같은 무기를 들려줌으로써 저자는 노동자들에게 저항의 가능성을 부여한다. 노동자의 입장이 아닌 학자의 입장에서, 노동자의 고통을 ‘주관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이 책은 특별하다. 과학자는 객관적인 사실만을 주목해야 한다는 명목 아래 고통에 대한 노동자의 ‘주관적인’ 의견은 노동연구에서 자주 배제됐다. 하지만 저자는 노동자들의 일터에 직접 들어가 그들의 고통을 마주하고 꾸준히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저항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고, 과학이 그것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학문의 길을 선택한 대학원생들에게 이 책은 지식인의 역할과 함께 지식의 의미에 대해 한 번 더 생각해보게 한다. 지식이 권력을 만들고 권력은 또다시 지식을 만드는 재생산적 지배구조에서, 지식은 개인을 더욱 고통받게 만들 수도 있고 권력의 내부에서부터 균열을 일으켜 혁명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세상의 진리를 보는 투명한 눈은 가까이에 있는 불투명한 현실을 보지 못한다. 지식인의 눈은 많은 것을 보기 이전에 올바른 방향으로 보아야 한다. 많이 보는 것은 때로 권력에 곁눈질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올바른 방향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눈, 그것이 이 시대에 필요한 지식인의 눈이다.

 

허승모 | suam3480@gmail.com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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