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호 특강취재: 정암학당, <플라톤은 왜 대화편을 썼는가?> ] 플라톤, 대화를 통해 진리를 탐구하다

정암학당은 2000년부터 그리스 · 로마 원전을 연구하는 학술단체이다. 서울특별시 서초구 방배동에 위치한 정암학당에서는 일반인을 대상으로 매달 ‘교양강좌’를 진행하며, 현대 철학의 시선에서 고전기 그리스와 로마 사상을 재조명하고 있다. 지난 5월 26일 진행된 본 특강은 <플라톤은 왜 대화편을 썼는가?>라는 제목으로 정준영(정암학당 학당장) 강사가 플라톤이 철학적 사유를 제시하는 대화의 형식에 대하여 탐구하고자 기획됐다. 정암학당의 ‘교양강좌’는 12월까지 매달 진행되며, 6월에는 <고전과 현대의 대화(3) – 스피노자‘감정론’>을 김은주 강연자가 강의할 예정이다.

▲ 강의를 진행하고 있는 정준영 강사

 

철학을 전달하는 적절한 방식은 무엇인가?

철학은 진리를 추구한다. 철학적 진리를 제시하는 방식은 일반적으로 논증 또는 논변(argument)의 형식이 있다. 강연자는 “왜 철학적 진리는 논증 형식을 통해 제시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하며, 논증 이외의 방식을 사용해 철학적 사유를 전달한 철학자들을 말한다. 파르메니데스(Parmenides)는 시(詩)를 통해 철학적 논증을 제시하였으며,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는 ‘개는 낯선 것을 보면 짖어댄다’와 같은 경구(Aphorism)를 통해 철학적 사유를 제시하였다. 20세기의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경우 일부의 텍스트는 네러티브 방식으로 철학을 전달하였으며, 플라톤은 대화의 형식을 책으로 서술하여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전달했다. 이처럼 많은 철학자들은 시, 경구, 네러티브, 대화 등의 형식으로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제시하고자 하였다. 논증이 진리를 밝히는데 분명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위에서 제시된 철학자들을 통해 논증이 철학적 사유를 제시하는 유일한 방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의 『대화편』(The Dialogues)은 논변 형식이 아닌 대화 형식을 사용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생각을 직접 전달하기보다 간접적으로 전달하는 형식을 채택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플라톤이 왜 대화의 형식으로 철학적 사유를 전달하고 있는가에 대해 질문해 볼 수 있으며, 본 강의의 주제인 ‘플라톤은 왜 대화편을 썼는가?’라는 질문은 유의미한 질문이다. 강연자는 플라톤이 대화를 통해 철학적 사유를 제시하는 형식은 그만의 깊이 있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말한다.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을 제시하기 위해 등장인물 · 시간 · 공간이 변화하는 대화 안에서 철학적 논증을 제시하고 있다. 즉 플라톤의『대화편』은 철학적 드라마(philosophical drama)의 문학적 측면이 있으며, 일상적 대화를 다루고 있지만 그 끝은 철학적 질문을 던지고 있기에 철학적 텍스트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플라톤의『대화편』은 철학성과 문학성이 융합된 텍스트이다.

 

플라톤의『대화편』을 바라보는 시각

플라톤의『대화편』은 스승 소크라테스의 실제 대화를 모방(mimesis)한 것이다. 플라톤 『대화편』의 모방 원천은 소크라테스적 대화(Sokratikoi logoi)이며, 소크라테스와 달리 플라톤은 글을 통해 철학적 세계를 남겼다. 이러한 플라톤의 텍스트는 두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적 대화’를 통해 철학적 세계를 서술하는 방식은 구술성, 구송성, 구두성으로 해석되는 ‘Orality’의 측면으로 볼 수 있으며, 텍스트를 통해 책으로 남겼다는 점은 문자성(Literacy)의 시각으로도 볼 수 있다. 따라서 플라톤의 『대화편』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에 대해 ‘Orality’와 ‘Literacy’ 두 개의 차원이 있기에 어떠한 것을 주목하는가에 따라『대화편』의 성격을 바라보는 시각과 의미가 달라진다. 강의자는 ‘플라톤은 왜 대화편을 썼는가?’에 대한 대표적인 견해를 소개하며, 『 대화편』을 어떻게 읽을 것 인가에 대해 자신의 견해로 귀결시킨다.

플라톤의『대화편』을 문자성의 시각을 통해 바라본 학자는 히르젤(Hirzel)과 에릭 해블록(Eric A. Havelock)을 들 수 있다. 19세기의 독일인 철학자 히르젤은 소크라테스라는 스승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문자를 사용해 보존하기 위한, 즉 기억의 수단으로서 ‘소크라테스적 대화’를 사용한 것으로 해석한다. 강연자는 이러한 “히르젤의 주장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려우나, 단순한 기억을 위한 적바림(hypomnemata)의 의도로 보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에릭 해블록은 구송문화(Oral culture)를 문자문화(Literal culture)로 전환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 플라톤이라 주장한다. 플라톤이 『국가』10권에서 ‘시인추방론’을 펼친 의도에 대해 해블록은 전통적인 시적 구술성에 대한 비판으로 바라보며, 그가 구송문화를 비판한 것으로 생각한다. 즉 구송문화를 사용했던 소크라테스와 달리 말로 하는 구어 매체의 한계를 지적한 플라톤은 텍스트를 통해 철학적 사유를 남겨 문자의 시대를 열어준 철학자라 주장한다. 해블록은 플라톤의 『대화편』을 문자성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문자 없이는 플라톤의 사유는 불가능하다는 것으로 결론짓는다.

강의자는 해블록이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를 날카롭게 다루고 있지만, 소크라테스는 구술문화로 귀결시키고 플라톤은 문자문화로 전환시켜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다루고 있는 한계를 지적한다. 해블록의 주장대로 플라톤을 문자문화에 한정 지었을 때 『대화편』 텍스트에 남아있는 구술적 요소인 ‘대화’의 요소를 해블록은 진정하게 탐구하지 않았으며 ‘대화’가 가진 교육철학적 기능, 인식론적 기능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독일의 튀빙엔 학파(Tubingen Schule)는 『파이드로스』(Phaedrus)편에 나타난 플라톤의 문자비판에 근거해서 플라톤 철학의 근본은 문자성이 아니라 ‘구두성(Orality)’에 있다는 주장을 한다. 『 파이드로스』편에 등장하는 이집트의 신 테우트(Theuth)는 수 · 산술 · 기하학 · 천문학 · 장기 · 주사위 놀이, 그리고 특히 문자를 창안했다. 그는 테베(Thebes)에 살고 있던 이집트의 태양왕 타무스(Thamus)에게 찾아가 문자는 기억력(Mneme)을 증진시키는, 기억과 지식(Sophos)의 파르마콘(Pharmakon)1)이라고 자랑했다. 이에 타무스는 문자를 사용하면 사람들이 기억을 소홀히하므로 사람들의 마음(Psyche)속에 망각(Lethe)을 산출할 것이라며, 문자가 도리어 사람들을 망각하게 할 뿐이라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인다. 타무스는 문자 기록으로 인해 사람들이 기억에 소홀하게 되며, 적바림이 없으면 배운 사람들의 영혼에 망각을 제공할 뿐이라고 문자를 비판한다.

튀빙겐 학파는 플라톤의『파이드로스』편에 나타난 문자 비판에 근거해 문자로 쓰인 『대화편』이 일반 대중을 위한, 즉 예비 교육적인 측면을 위해서 쓴 것이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강연자는 “튀빙겐 학파가 자가당착적 측면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튀빙겐 학파는 문자를 통해 후대에 전해진 플라톤의 『파이드로스』편의 문자비판을 주장에 대한 근거로 사용하면서, 문자로 전승된 것은 의미를 축소하고 구두로 전승된 것만 플라톤의 진수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그들이 근거로 사용하는 주된 근거들은 문자 매체에서 가져오면서, 문자에 대해 비판을 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수긍해야 하는가에 대한 모순점이 있다.

 

플라톤은 왜『대화편』을 썼는가?

독일의 철학자 슐라이허마허(Schleiermarcher)는 “플라톤이 철학적 사유를 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대화편』이라는 전달 형식을 취했다”고 말한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일반적 대화가 아닌 문답법 대화 형식을 갖고 있다. 또한 『대화편』에서 다루고 있는 질문은 모르고 있는 것을 알기 위한 상식적인 질문이 아닌, 철학적 진리를 탐구하기 위한 탐구적인(Limemily) 질문이다. 플라톤의 『대화편』은 탐구적인 질문을 이어나가며, 끝에는 난관(Aporia)에 빠지는 것으로 결말지어진다.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155d에서 “놀라워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철학자의 상태 … 이것 말고 철학의 다른 시각은 없으니까”라고 말한다. 놀라워하는 것은 경이의 상태로 볼 수 있다. 플라톤은 질문의 난관에 빠진 상태, 즉 아포리아에 빠진 것을 경이의 상태로 생각한다. 난관에 빠지지 않는 사람은 자신들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 인지하지 못하는 무지의 상태로 본다. 아포리아 상태에 빠진다는 것은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 무지의 지(智)의 상태인 것으로, 모르는 것을 탐구하고자 하는 철학적 지향점을 경이롭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철학적 질문은 아포리아의 상태에 빠졌을 때 비로소 모른다는 것을 인식하고서 근원적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즉, 철학적 질문은 아포리아에 있다고 플라톤은 생각한다. 아포리아의 상태가 탐구의 과정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 플라톤 철학의 핵심이다.

이러한 아포리아로 귀결되는 플라톤의 『대화편』의 철학적 태도에 대해 철학자는 궁극적 진리를 제시하는 것이 아닌,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철학적 진리를 탐구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플라톤은 어떠한 학설(Dogma)의 견해를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탐구하는 철학적 과정을 보여준다. 철학자라는 것은 아직 지혜를 얻지 못한 상태 속에서 지속적인 탐구를 하는 것이다. 『대화편』은 이러한 철학자의 탐구적인 면모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러한 견해는 텍스트적 성격과 플라톤의 철학의 성격이 연관되어 서술하고 있다.

강연자는 플라톤의 텍스트는 구술성과 문자성, 이중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플라톤이 철학의 진리 전달을 대화의 형식을 통해 글로 쓴 것이 자기 의식적인 결정이었다면, 플라톤 철학에서 ‘대화적 글쓰기’의 문제는 그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본질적 질문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 플라톤은 왜 대화편을 썼는가?’에 대한 명확한 답변은 없었다. 그러나 강연자는 “본강연을 통해 플라톤 철학에서 대화적 글쓰기가 가진 복잡한 문제의 ‘결’을 정리하고, 이것이 플라톤 철학을 이해하는데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는지를 논의하고자 하였다”며, 수강생들에게 유의미한 철학적 질문을 남긴 채 강연을 마쳤다.

최다운 | dawooning@khu.ac.kr

1) 플라톤은 『파이드로스』에서 문자를‘파르마콘’즉 망각의 치유로 언급하며, ‘약(치료제)’과 ‘질병’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파르마콘이라고 말한다. 즉, 약과 질병은 서로 모순되고 대립되는 것으로, 문자는 이러한 모순을 동시에 가진다는 것이다.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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