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호 문화비평: 비평이란 무엇인가?] 민주적 시민이 비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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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십여 년간 비평 전문지의 편집위원과 편집주간으로 일했고 꽤 오랫동안 대학에서 비평론을 강의했으며 지금까지 두 권의 비평집을 출간했다. 이런 수행성의 경험에도 불구하고‘비평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그 당당한 질의 앞에서 나는 언제나 머뭇거리는 사람일 뿐이다. 어쩌면 비평은 어떤 것의 정체성을 규명하는 산뜻한 정의(定義)의 사역이 아니라, 바로 그 어떤 것 앞에서의 괴로운 머뭇거림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비평가는 텍스트 앞에서 당당한 사람이 아니라 그 앞에서의 곤혹스러움으로 스스로를 분열시키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미분하는 비평과 적분하는 비평

비평가는 만나는 사람이고 나누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비평은 텍스트와의 만남을 통해 자기를 파열시키는 일이다. 비평의 밀도는 그 만남이 어떠한 것이냐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것은 자기의 나태와 안일을 깨뜨리는 충격이 되어야 한다. 좋은 비평은 충돌이라 할 만한 만남을 통해 자기의 동일성을 뒤흔드는 미분적인 활력을 경험하게 한다. 반면에 어떤 비평은 자기의 동일성으로 텍스트의 이질성을 잡아먹는 잔혹한 나르시시즘을 전시한다. 그런 비평은 텍스트의 타자성을 자아의 동일성으로 회수하여 자기를 강화하는 적분적인 폭력을 전개한다. 지금 비평이 독자를 잃고 가독하기 어려운 자족적인 장르로 되어가고 있는 것도 그 적분적인 나르시시즘과 관련이 깊다. 세계를 마음대로 인용하고 편집 하는 기예가 환호 받을수록 텍스트의 특이성, 이질성, 그 타자성을 잡아먹는 나르시시즘이 활개를 친다.

타자성과의 충돌이 가져온 자기분열의 경험을 나누어 갖는 사람이 비평가이다. 그러므로 일급 비평은 자기의 고유한 몸으로써 살아낸 그 유일한 경험의 감각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비평가가 마주한 텍스트는 바로 그 경험을 통해 세상의 모든 존재가 제각각 다르지만, 모두 같다는 이상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일종의 통로이다. 그러니까 비평은 그 숱한 길 없는 길 위에서 통로를 찾아 걷는 만행(萬行)인 것이다. 깨어지기 위해서는 충돌해야 하고, 충돌하기 위해서는 만나야 하며, 만나기 위해서는 길 위로 나서야 한다. 그러므로 길 위에서의 모험을 감당하지 않는 비평이란 어불 성설이다.

 

 

공감과 비난이라는 나르시시즘

공감한다고 하면서 독점하려고 하거나, 비판한다고 하면서 비난이나 하는 비평의 사례는 허다하다. 사랑에 달뜬 자는 자칫 상대의 마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자기의 마음 고백으로 혼자 진지하다. 그것은 공감이 아니라 사랑을 빙자한 자기도취일 때가 많다. 따라서 섣불리 고백하려고 들지 말고 찬찬히 대화하려고 준비해야 한다. 섣부른 고백은 종종 대화를 거부하는 독백으로 기울기 때문이다. 섬세한 자의식의 무늬를 고백하고 도도한 지성의 역량을 과시하는 독백은 그 벌거벗음(자아노출)으로 인해 매혹적이다. 그러나 그 매혹은 사실 사람을 홀리는 미혹임에 틀림이 없다. 모든 사랑은 결국 내가 만든 환상의 사랑이자 나를 향한 자애(自愛)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사랑의 그런 참혹한 진실을 외면한 채 상대를 향한 내 사랑의 그 절절한 마음만이 오직 진실이라고 우기는 오만이 이른바 공감의 비평이라는 주관적 비평의 실상이었다. 그렇게 사랑의 불가능성이라는 오연 한 진실을 외면한다면 타자와 나의 어긋남이라는 그 존재론적 실상은 요령부득일 수밖에. 닭 잡아먹고 오리발 내미는 격이라고 할까, 대상의 특이성을 잡아먹고 자기의 독특성을 부려놓는 미혹의 술수라 할 수 있다.

비평(critique)이라는 행위가 위기(crisis)의식의 산물이라고 할 때, 그 위기의 감각이란 바깥으로부터 나를 향해 찌르고 들어오는 것의 날카로운 이물감이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푼크툼(punctum)’이라는 어휘로 적절하게 집약하였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공감 은 대상을 향한 내 쪽에서의 일방적인 감응이 아니다. 다시 말해 비평이란 대상이 나에게 주는 충일한 행복감에 젖어 도취된 자가 그 대상에게 바치는 환희의 찬가가 아니다. 공감의 비평은 찌르고 들어오는 것에서 아프게 파고드는 것의 그 비상한 통각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일이다. 통각은 거부하고 환락의 감응에만 탐닉하는 자들이 공감을 빙자해 대상의 특이성을 잡아먹는다. 공감을 앞세워 타자를 사냥하는 그 런 이들을 매혹적인 노랫소리로 신선한 생명을 노리는 세이렌에 비견 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진정으로 공감한다는 것은 환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받아들여도 좋은 것을 받아들이는 환대가 아니라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결단으로서의 환대여야 한다. 찌르고 들어오는 것의 그윽한 고통 속에서 은근하게 퍼져오는 쾌락, 그런 의미에서 환대하는 자의 고독을 파고드는 주이상스(jouissance)는 성실한 비평가에게만 주어지는 감각인 것이다.

 

 

환대의 윤리와 적대의 정치 사이

비평이 위기의식의 산물이고 푼크툼의 감응이라면 그것은 필시 비상시의 감각이라고 하겠다. 평상시의 안정을 뒤흔드는 미묘한 도발에 반응하는 것이야말로 비평의 핵심이다. 익숙한 것들의 범람 속에서 기이한 낯섦을 발견하는 일, 진부한 것들의 나태 속에서 진귀한 것의 번뜩임을 알아채는 일, 그러므로 비평은 역시 이질적인 것들을 환대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 것을 세속의 남루함과 비리함 가운데서 신성의 도래를 기다리는 구원의 신학으로 호도해서는 안 된다. 비평은 도래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혼신을 다해서 도달해야 하는 지난한 고 역이기 때문이다. 수입된 사유의 개념, 주류화된 읽기와 쓰기의 규범에서 벗어나 다른 길의 입구를 찾는 모험도 그런 고역의 일종이다. 받아들이되 받들지 않는 것, 따르되 순종하지 않는 것, 그런 역설의 실천과 더불어 읽고 쓰고 사유하는 비평의 역량은 조금씩 숙성되어 갈 것이다. 비평은 이처럼 지루한 일상의 반복 속에서 일신우일신의 공부로 갱신되는 자기파열의 과정이라 할 수 있겠다.

비평이라는 말은 자주 비판이라는 말과 뒤섞여 쓰이곤 하는데, 때로는 그 비판이라는 말의 용법마저도 비난이라는 말과 혼용됨으로써 비평이 마치 비난인 것처럼 비약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비평이 비판을 함의한다고 할 수는 있겠지만, 단언컨대 비평은 비난이 아니다. 그럼에도 흠결을 책잡아 따지는 비난의 행위를 비평의 정의로운 사명이라고 믿는 이들이 없지 않다. 물론 이들은 그 행위를 비난이 아니라 비판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겉으로 표현된 말과는 달리 그 행위는 격렬한 비난으로 기울곤 한다. 이들 중에는 한국의 비평사가 논쟁사로 전개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 논전이 야말로 비평의 중심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논쟁은 비난전이 아니고 변증법적인 담론의 격전이다. 비판을 앞세우고 비난을 일삼는 이들은 공감을 내세우고 독점욕을 드러내는 이들과 동전의 양면이다. 둘은 독아론의 서로 다른 양상이라는 점에서 서로 내통한다. 비난이냐 비판이냐의 구별은 쉽다. 상대의 흠결에 분개하는가, 혹은 탄식하는가? 그 태도에 따라 쉽게 구분할 수 있다. 환호하는 자는 가차 없고, 안타까워하는 자는 머뭇거린다. 비난은 섣부른 자의 것이고, 비판이야말로 공감하는 자의 것이다.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드는 환대의 비평이야말로 상대를 때려눕히는 적대의 비평이 될 수밖에 없다. 그 심오한 역설에 비평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어떤 대답이 담겨 있지 않을까 한다. 환대가 비평의 윤리와 결부된 것이라면, 적대는 비평에 내재하는 정치적인 것의 속성이다. 비평은 때때로 환대를 위해 싸움의 진창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환대해야 마땅한 것들을 추방하려하는 자들과의 싸움이란 세속의 일상이다. 기득권자들의 그 평상시를 뒤흔드는 도발, 환대해야 하는 것들을 수호하는 그 적대의 싸움은 피할 수 없는 비평의 운명이다. 환대의 상대 앞에서 머뭇거리던 비평의 고뇌는 적대의 대상 앞에서는 추호의 머뭇거림도 없이 격돌한다. 그리고 역시 그 비상시의 격돌이란 자기를 깨뜨리는 충돌이다. 그렇게 비평은 환대와 적대 사이에서 격돌하고 충돌하는 자기파열의 미분적인 과정이라고 하겠다. 다시 말해 비평이란 사랑의 불가능 위에서 펼쳐지는 사랑의 싸움인 것이다.

비평의 정체를 묻는 물음을 거두고 나를 돌아본다. 나는 스스로를 일러 비평가라고 할 수 있는가. 환대의 윤리와 적대의 정치 사이에서 사랑을 위해 싸우고 싸움을 통해 사랑을 확인하는 사람, 그런 사람이 비평가라면 나도 비평가이고 싶다. 이제야 나는 알겠다. 비평가는 특수한 사람이 아니라 가장 민주적인 시민이라는 것을.

전성욱 / 동아대학교 한국어문학과 교수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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