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호 테마서평: 포스트휴머니즘] 포스트휴머니즘, ‘인간’에 대해 질문하다

『포스트휴먼』(로지 브라이도티 저·이경란 역, 아카넷, 2015)
『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캐서린 헤일스 저·허진 역, 플래닛, 2013)
『Staying with the Trouble』(Donna Haraway 저, Duke Univ. Press, 2016)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SF영화의 거장으로 불리는 리들리 스콧(Ridley Scott) 감독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1982)를 관통하는 주제는‘인간보다 더 인간다운(more human than human)’이다. 영화에서 2019년 지구는 핵전쟁과 환경오염으로 더 이상 생명체가 살아갈 수 없는 디스토피아적 공간으로해체되고 인류는 우주 식민지 사업을 통해 지구를 뒤로한 채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한다. 우주행성 개발에는 타이렐 기업이 만든 최신 복제인간 리플리칸트(replicants)가 이용되는데 이때 타이렐 기업의 모토는‘인간보다 더 인간다운’으로, 인간의 신체뿐 아니라 행동, 감정 나아가 기억까지 완벽히모방하여 인간과의 구별이 불가능한 복제인간 제작을 목표로 한다. 실제로 영화가 진행될수록 인간과 복제인간의 뚜렷했던 경계는 점차 희미해지며 엔딩에 이르러 관객들은 복제인간 사살이 주 업무인 특수경찰 데커드(Deckard)조차 복제인간일 수 있다는 강한 암시를 받게 된다. 인간-복제인간 혹은 원본-복제에 대한 구분 불가능성으로 점철된 데커드의 정체성은 후속작품인 <블레이드 러너 2049 Blade Runner 2049>(2017)에서도 명확히 설명되지 않은 채, 관객의 판단을 유보한다. 메리 셸리(Mary Shelly)의『프랑켄슈타인』(1818)에서 시작된 인간복제와 생명창조의 SF서사는 초기 인간과 비-인간·인간과 괴물·인간과 동물·인간과 기계의 경계 그리고 그 경계넘기에서 비롯되는 공포를 재현하였으나, <블레이드 러너>처럼‘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 복제인간을 보여주는 SF서사는 이제 그 경계 자체가 모호해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모호함 속에서‘인간’을‘인간’으로, 그리고‘기계’를‘기계’로 명명했던 모든 기준과 범주가 해체된다. 인간과 비-인간의 정의를 흔드는 SF서사 속에서 우리는인문학의본질적질문으로회귀할수밖에없다.‘ 인간’이란무엇인가?

모든 사물의 척도로서의‘인간’에 대한 비판

“그 모든 시작에는 그(He)가 있다”로지 브라이도티(Rosi Braidotti)가『포스트휴먼』의 첫 장을 시작하는 문장이다. 대문자로 쓰인‘그(He)’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프로타고라스(Protagoras)가‘모든 사물의 척도’로 명명한 인간(Man), 보다 정확히는 유럽대륙의 백인 남성을 의미한다. 서구의 고전적 휴머니즘에서 대문자로 쓰인‘인간’과‘그’는 이성과 합리성으로 무장한 채, 모든 것의 기준으로 기능함으로써 일자(One)의 모델과 정의, 표본, 질서, 구조, 법, 도덕을 정립해왔다. 그 기준에 미달되는 것은 모두 비-인간으로 간주되었다.

단일하게 통일된 휴머니즘적 주체를 양산하는 고전적 휴머니즘은 1960~70년대를 기점으로 힘을 잃게 된다.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반인종주의, 반전주의의 활발한 담론 생산과 실천적 운동을 필두로 한 반(反)휴머니즘 흐름에 의해 그 편협성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뤼스 이리가레(Luce Irigaray)는『하나이지않은 성』(1985)에서 서구철학에서 논하는‘인간’이란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과‘남성에 미달하는 성으로서의 여성’으로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남성중심의 사고·이성·언어·논리 속에서 여성은 무언가 결여되고 결핍된 존재였음을, 나아가 역사 속에서 언제나 소수이자 타자로 존재해 왔음을 날카롭게 통찰하는 견해이다. 남성의 언어로 규정되지 않은 여성은‘인간’이 아닌가? 이 지점에서“‘인간’을‘인간’으로 정의하는 기준은 무엇이며 그 기준의 정당성과 당위성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라는 질문을 다시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브라이도티의“그 모든 시작에는 그가 있다”라는 도전적 문장은 대문자로 쓰인 인간(Man)을 용인하는 고전적 휴머니즘에 대한 정면적 비판이다. 따라서 그녀의 입장은 단일하게 통일된 휴머니즘적 주체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고 해체하는 반휴머니즘과 이론적 궤를 같이하지만 이에 전적으로 편승하지는 않는다. 휴머니즘이 많은 면에서 문제적인 것은 사실이나 휴머니즘의 절대적 반대항으로 반휴머니즘을 이해하고 전적으로 지지하는 것은 휴머니즘적 사고에 기초하여 인류가 이룩한 모든 성과와 원칙을 부정해야 하므로 그 역시 문제적이기 때문이다. 브라이도티는“반휴머니즘은 너무나 모순들로 가득 찬 포지션이어서 그 모순들을 극복하려 하면 할수록 점점 더 미끄러워진다”라고 말하며 휴머니즘-반휴머니즘이라는 이분법적 도식에서 벗어나 보다 비판적 의미의 주체성 이론이 가능한 포스트-휴머니즘으로 선회할 것을 요청한다.

포스트휴머니즘과 트랜스휴머니즘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진행된 포스트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먼에 대한 연구는 문화비평을 비롯한 여러 학계에서 연구되었고 다양한 담론을 양산하며 그 논의의 장을 확대시켰다. 포스트휴머니즘과 포스트휴먼에 대한 이론적 해석과 문학작품에 담긴 수사학적·문화적·사회적 함의는 학자와 저자마다 모두 상이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일률적 해석을 대입하는 것은 기실 불가능하고 매우 위험한 도식화지만 논의를 위하여 간단히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포스트휴먼과 관련된 개념적 혼란의 상당 부분은 접두사‘포스트(post)’에 대한 이중적 해석에서 기인한다. 접두사 포스트는‘~이후에(after)’혹은‘~다음의(next)’라는 뜻으로 모두 해석되는데 전자는 이전의 개념·담론·시대가 끝난 후에 새롭게 등장하는 휴먼을 강조하는 해석이고 후자는 이전 세대의 휴먼을 이어가는 계승의 의미가 강하다. 따라서 포스트휴먼은 현재의 인간‘이후에’새롭게 등장하는 존재이거나 현재의 인간을 연장하고 계승하는‘다음’세대의 휴먼을 지칭한다. 이처럼 포스트휴먼은 그 용어에서부터‘인간’에 대한 해체와 계승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반면 포스트휴머니즘과 종종 개념적으로 혼용되어 사용되는 트랜스휴머니즘은 포스트휴먼에 대한 현상과 포스트휴머니즘적 논의를 결과론적으로 그리고 환원적으로 해석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은 인간에서 포스트휴먼으로 넘어가는 이행을 긍정하고 지지하는 일련의 운동과 담론으로 그 중심에는 인간과 기계에 대한 낙관적 전망이 위치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을 지지하는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은 현대과학기술, 특히 생명공학과 유전공학, 인공지능 등의 혁명적 기술 발전이 인간 신체의 보완 및 확장과 인간-기계의 하이브리드 현상을 가능하게 한다고 강조하고 또 긍정한다. 예컨대 트랜스휴머니스트임을 자처하는 알코어 생명연장재단(Alcor Life Extension
Foundation)의 회장인 맥스 모어(Max More)는 알코어 재단의 인체냉동보존 실험을 지지하는 한 사설에서 인류는 이성과 최첨단 과학기술을 통해 새로운 혁명적 진보를 맞이할 것이라고 선언한다. 모어가 이성을 중시하는 것처럼 트랜스휴머니즘은 서구의 고전적 휴머니즘 즉, 이성과 합리성으로 무장하여‘모든 사물의 척도’로 작동하는 인간관을 계승한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이러한 전통적 휴머니즘관은 절대적 기준에 준하지 않는 존재를 모두 결여되고 결핍된 존재·비-인간·소수·타자로 명명하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만약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주장처럼 인간-기계의 결합으로 생물학적 한계를 뛰어넘는 초인간이 등장한다면, 그에 준하지 않는 존재는 소외되지 않는다고 자부할 수 있는가?

‘인간’을 넘어서는 공생적 연대로

캐서린 헤일스(Katherine Hayles)는『우리는 어떻게 포스트휴먼이 되었는가』에서 포스트휴먼을“신체화된 의식을 매우 구체적이면서도 지엽적인, 그리고 물질적인 방식으로 확장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헤일스가 주장하는‘확장’역시 전자 인공 기관 및 매체들의 발전에 기초하지만, 트랜스휴머니스트들의 논조와 겹쳐 읽는 것은 잘못된 접근법이다. 그녀에게 포스트휴먼이란 인간의 종말 이후에 등장하는 신인류가 아니라‘특정한’인간 개념의 종말이며, 이는 인간(종)중심주의적 사고관을 탈피하고자 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인간과 비-인간으로 통용되는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적 틀을 타파하자고 주장한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 위에 군림하는 인간(종)이 아니라 다른 생명체와 끊임없이 교감하고 소통하는 공생적 모델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후의 저작들에서 그녀가 개진하는 생명체 범주는 비단 인간, 동물, 자연만이 아니라 기계, 인공지능, 사이보그, 안드로이드 등을 포괄한다는 점에서 한편으로는 매우 도전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문제적’으로 보일수도 있다.

또 다른 포스트휴머니즘 학자인 도나 해러웨이(Donna Haraway)의 저서『Staying with the Trouble』은 헤일스의 문제적 범주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실마리와 현실적 조언을 제공할 수 있지 않을까? 책 제목이 암시하듯이, 해러웨이가 사회에 요청하는 것은 바로‘문제와 함께 지내기’이다. 문제(trouble)란 13세기 프랑스 동사에서 기원된 단어로‘휘젓기(to stir up)’,‘ 구름지게 만들기(to make cloudy)’,‘ 방해하는(to disturb)’의 의미이다. 이렇게 무언가에 혼란을 만들고 복잡하게 만드는‘문제’에 대해 해러웨이가 제시하는 윤리적 실천은 함께 하기이다. “결국 우리의 과제는 일종의 응답으로 우리의 모든 부딪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낼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지적처럼‘응답-능력(response-ability)’이다. 인간(종)중심적 사고에 갇혀 타자로 존재하던 그 모든 생명체와 존재의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것, 남성-여성, 인간-기계, 인간-동물, 자연-문화 등의 서구이성의 이분법적 도식을 해체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응답 능력이 아니겠는가?

실제로 해러웨이는‘아이가 아니라 친족을 만들라(Make Kin Not Babies)’는 파격적인 주장도 제시한다. 이 주장은 친족을 중심으로 형성된 언어, 인종, 민족, 혈통, 계보학의 그 모든 실체와 규범을 넘어설 것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인간은 대지의 여신인 가이아의 품에서, 지구의 주인으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지구의 모든 생명체와‘동반종(companion species)’으로 함께할 것이다. 로지 브라이도티, 캐서린 헤일스, 도나 해러웨이의 저서는 예리한 통찰력과 학문적 정교함을 바탕으로, 포스트휴먼과 포스트휴머니즘 담론에 대한 현실적 조언과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녀들의 저서가 21세기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의 현실화로 인해 불거진 포스트휴먼 담론이 단순히 테크노포 비아와 테크노필리아의 순환적 덫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의 학문적·인식론적 좌표로 기능하기를 기대한다.

 

김 지 은 / 경희대학교 영미어문화학과 박사과정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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