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호 인문학술: 호모루덴스와 축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에서 ‘호모 루덴스’로 진화?

 

 

요한 하위징아는 놀이하려고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하며 ‘호모 루덴스’를 언급한 이후, 노동을 최고의 가치로 여겼던 인간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공하였다. 이에 본보는 ‘호모 루덴스’에서 루덴스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또한, 하위징아가 인간의 유희적 본능을 충족시키는 대표적인 놀이 형태로 언급하는 축제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하고자 한다.

 

▲ 요한 하위징아의『호모루덴스』                    ⓒ angelicopress.org

 

 

현생 인류의 생물학적 종명은‘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Homo sapiens sapiens)’이다. ‘생각한다’는 뜻의 사피엔스가 두 번이나 반복되어 있어 인간의 관념적 사고능력을 상당히 강조하기 위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된다. 철학자들이 반길만한 이름이다. 이성적 인간을 표현하기에 적당할 것이기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정치학자들은 인간의 권력욕구와 경쟁에서 이겨내기 위한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본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인간을‘호모 폴리티쿠스(Homo Politicus, 정치하는 인간)’라고 말했다. 또한, 경제학자들은 인간이 한정된 자원에서 최대한의 효용가치를 얻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계산하는 존재임을 강조하기 위해서‘호모 에코노미쿠스(HomoEconomicus, 경제적인 인간)’라는 용어를 선호할 것이 분명하다. 이 모든 단어들에서 말하는 인간은 대단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게임에서 항상 승리하고 최적의 효과를 얻어내려노력하는 대단히 성실한 경쟁자들로 묘사되어 있다. 그런데 인간들이 정말 그런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나는 매순간 그렇게 경쟁적으로 살고 있지 않은 것 같고, 그렇게 살고 싶지도 않다. 가끔은 아무 생각 없이 노닥거리면서 놀고 싶고,몸을 흔들며 노래도 부르고 싶고, 별 쓸데없는 것들을 만들기도 하고, 못 그리는 그림을 그려보고 싶기도 하다. 때로는 드라마 속 주인공에 나를 이입시켜서 대리만족과 위안을 얻기도 한다. 드라마가 끝나면 바로 힘겨운 현실이 떡하고 앞에 나타나지만, 그래도 견뎌낼 힘이 조금은 생긴 것 같다. 아주 이성적인 사람들은 이것을 보고“시간을 죽이면서 허망하게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야”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나는 이것이 힘겨운 인생살이에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아서 좋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성실하지 못한 행위’들을 드러내지 못하고 소심해 하고 있을 때, 인간의 이런 행위들이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동이며 창조적인 문화행위가 될 수도 있다는 논리를 최초로 당당하게 펴준 학자가 있다. ‘놀기’에 희망의 빛을 내려준 구세주라고 표현해야 할 정도다.

요한 하위징아, 놀이를 문화로 보다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Johan Huizinga, 1872~1945)는네덜란드 흐로닝언에서 출생하였으며, 흐로닝언 대학교(University of Groningen)와 라이프치히 대학교(University of Leipzig)에서 공부하였다. 1905년부터 약 15년 동안 흐로닝언 대학교에서, 그리고 1942년까지 레이덴 대학교(University of Leiden)에서 역사교수로 있다가 나치에 잡혀 사망할 때까지 억류상태에 있었다. 14~15세기의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생활·사상을 밝힌『중세의 가을』(1919)과 16세기 지식인의 모습을 그린『에라스무스』(1924), 『호모 루덴스』(1938) 등의 저서가 있다.

여기서 관심을 가질 책은『호모 루덴스』(Homo Ludens)라는 책이다. 하위징아는 어린 시절 우연히 보게 된 카니발 행렬에 반해서 평생 의례·축제·놀이 연구에 집중하였다. 역사가·문화사가(文化史家)·언어학자이기도 했던 그는 1933년 “문화에서 놀이와 진지함의 경계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였고, 이것이『호모 루덴스』에서 다시 다뤄지면서 그 논리가 더욱 발전하였다. 그에 의하면 축제란 인간의 유희적 본성이 문화적으로 표현된 것이다. 또한 놀이는 겉으로 비생산적인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일상적인 삶과 생산력 향상을 위해서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보았다.

우리나라에서도 놀이 또는 축제 연구가 본격적으로 학문적인 영역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다지 오래되지 않았다. 필자가 프랑스 축제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쓰고 귀국했던 1994년말 당시에는 우리나라에서 축제와 관련한 연구서를 찾아보기가 대단히 어려웠다. 하위징아의『호모 루덴스』도 1938년에 나온 책이니 서구사회에서도 놀이와 축제 연구가 타 분야에 비해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놀이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해 본 지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18년 현재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연구 분야로 간주되는 놀이에 대한 체계적인 관심은 하위징아의 놀이 개념 분석에서 시작된 것이라 볼 수 있다. 특히 그는 놀이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라는 편견을 깨고자 하였고, 놀이에서 문화적 창조력이 나온다고 주장했다. 놀이는 문화에서 떨어져 나온 자투리가 아니라, 오히려 법·정치·예술 나아가서 전쟁에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놀이가 엄밀한 분석의 대상이 되다

종래에는 유희가 문화 속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문화가 유희보다 상위의 개념이라고 생각했다. 하위징아는 이러한 견해를 역전시켜서 문화는 원초(原初)부터 유희되는 것이며 유희 속에서 유희로서 발달한다는 획기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그리고 유럽 여러 나라뿐만 아니라 인도·중국·일본 등 동양까지도 포함시켜서 유희 개념의 언어학적·문헌학적·역사적 고찰을 했다. 책이 출판된 지 100년이 다 되어가지만, 지금 읽어도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보석 같은 책『호모 루덴스』에 많은 학자들이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희는 생존에 직결된 실생활‘밖’에 있고 자유로우며 목적을 갖지 않는 비생산적 행위였다. 그러나 유희는 점차 생활전체의 보완제가 되었으며 생활기능 및 사회기능, 즉 문화기능을 갖는 필수적인 것으로 발전했다. 유희라는 말은 단순히 논다는 말이 아니라 정신적인 창조 활동을 가리킨다. 풍부한 상상의 세계에서 다양한 창조 활동을 전개하는 음악, 미술, 무용, 연극, 스포츠, 문학 등이 모두 여기에 포함된다.

하위징아의 견해를 더욱 발전시킨 미국의 신학자 하비 콕스(Harvey Cox)는『바보들의 축제』1)에서, 인간은‘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 축제하는 인간(homo festivus), 환상적인 인간(homo fantasia)’이라고 말하면서“축제는 억압되고 간과되었던 감정 표현이 사회적으로 허용된 기회”, 또는 “인간은 일상의 이성적 사고와 축제의 감성적 욕망 사이를 넘나들면서 경험과 인식의 지평을 확대할 수 있고, 또 그를 통해서 문화의 발달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어린 시절 동네친구들과 소꿉놀이, 술래잡기, 딱지치기, 숨바꼭질 등의 놀이를 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성인으로서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 규칙들을 어린 시절 놀이 속에서 거의 다 배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 여러 가지 형태의 놀이의 내부를 살펴보면 고도의 규칙과 논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놀이 카오스(Chaos)로부터 문화 코스모스(Cosmos)가 나온다

놀이에 대한 연구로 빠뜨릴 수 없는 것이 로저 카유아(Roger Caillois)의『놀이와 인간』2)이라는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요한 하위징아가 조금은 산만하게 써놓은 놀이의 사례들을 유형별로 정리해 주면서 하위징아의 초기의 놀이에 대한 다양한 개념과 사례 구슬들을 잘 엮어주고 있다. 이 책에서 카유아는 모든 형태의 문화는 놀이형식으로 설명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하위징아가 인간사회의 제도, 법률, 전쟁, 의례, 예술 등에서 놀이적 요소를 찾아내고자 하였다면, 카유아는 구체적인 놀이 형태를 좀 더 세분화하여 분석적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카유아는 놀이정신이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 활동의 원동력이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은 끊임없이 뭔가‘재미있는 놀잇거리’를 찾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요한 하위징아로부터 부분적으로 빌어온 개념이기는 하지만, 카유아는 놀이를속성에따라‘아곤(agon)’,‘ 알레아(alea)’,‘ 미미크리(mimicry)’, ‘일링크스(illinx)’개념들로 구분하였다. 이것은 놀이의 가장 기본적인 원리이자, 축제를 구성하는 원천이 된다.

경쟁 놀이를 가리키는‘아곤’은 사냥, 운동경기, 전자게임 등과 같이 지속적인 훈련과 노력, 이기고자 하는 의지들이 합쳐져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항상 승자와 패자가 있다. 우연 놀이에 해당하는‘알레아’란 카드 게임이나, 주사위놀이, 제비뽑기, 복권 놀이 등 운수나 요행, 또는 운명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놀이이다. 실력이든 운이든 이 두 가지는 기본적인 규칙을 가지고 있는 놀이이다. 흉내 내기 또는 역할 놀이에 해당하는‘미미크리’란 가면을 쓰고 참여하는 가장무도회나 병원 놀이, 연극 행위 등과 같이 일정한 시공간 안에서 평소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보거나 다른 세상에 잠시 들어갔다 나오는 것이다. 현기증을 즐기는‘일링크스’는 회전목마, 그네타기, 서커스, 롤러코스터 등과 같이 맑은 의식에 유쾌한 패닉(공포) 상태를 일으키는 것이다.

카유아는 놀이만큼 인간을 평등하게 만드는 문화적 기제는없다고 보았다. 남녀·노소·빈부·미추 등으로 위계화·차별화되어 있는 인간은 놀이를 시작하면서 일체감·해방감·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일시적인 유토피아 상태에 들어간다.놀이를 통해서 인간은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는 충만함을 느끼는 것뿐만이 아니라 동시에‘더불어 재미있기’,‘ 재주를 칭송받기’, ‘승리의 기쁨 누리기’, ‘규칙 습득하기’등을 익힌다. 현실적 사회구조 속에 생존하는 자신의 존재는 가면 놀이나 변장을 통해서 환상과 꿈속으로 들어갈 수 있고, 현란한 춤과 과감한 노출을 통해서 무한한 해방감을 느낄 수도 있다.이 점은 자진해서 극도의 긴장 속에 들어가거나, 금방 쓰러질듯한 어지럼증을 즐기면서, 또는 엄청난 행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기대감 등으로도 얻어질 수 있다. 축제는 이러한인간의 유희적 본성을 충족시켜 주는 놀이의 대표 형태 중 하나다.

 

ⓒ pixabay.com

 

축제는 유토피아를 실현해주는 시공간

페루의‘태양제’는 비록 외면적으로 관광상품으로서의 성격이 농후하지만, 내면적으로는 과거 화려하고도 찬란했던 잉카문명의 태양숭배를 재현한다. 이는 잉카제국의 수도였던 아름다운 고산지대 도시 쿠스코(Cuzco)에서 페루 원주민이 현재 처해있는 고난과 불평등의 질곡을 벗어나고자 하는 외침이다. 브라질의‘리우 카니발’은 강제 이주된 흑인 노예들의 아프리카 종교의식, 남미 인디안 원주민의 고유문화, 그리고 외부 침략자로서 남미를 식민지배했던 유럽의 기독교 문화가 오랜 시간 동안 서로 섞이면서 융합되고 새롭게 변형되어 현재와 같이 화려하고 자극적이면서 때로는 위험하기까지 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 축제 또한 식민지 이전의 평화로웠던 그들의 과거 삶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유토피아적 이상향을 그리는 행위가 아닐까 한다. 현재 브라질의 삶도 결코 녹록지 않다는 것이 리우 카니발의 본래 의미를 더욱 부각시키는지도 모른다.축제 속에서 인간은 기존의 모든 구속과 제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마스크를 쓰면서 그 가면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고(가면을 쓴 시위도 축제가 될 수 있다), 환상과 꿈에 젖어 잊고 지냈던 향수를 음미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인간은 인간임에 다행스러워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며 살아 있음을 즐기는것이다. 놀이 분석에 집중했던 하위징아는 축제라는 용어를 책에서 그다지 많이 언급하지는 않았다. 축제를 크게 놀이의 한 부분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축제는커녕 놀이에 대한학문적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에 놀이 개념을 강조하는 것이 더 급선무라고 생각했을 것으로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스러운 행동은‘성스러운 날’에‘축하된다’. 다시 말해 성스러운 날에 벌어지는 축제의 한 부분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성소에 모여드는 것은 집단적인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이다. 성사, 희생, 성스러운 춤, 경기, 공연, 신비의례 등은 축제를 축하하는 행위이다. 의례는 피를 흘릴 수도 있고, 성인식을 기다리는 젊은이의 시련은 가혹할 수도 있고, 가면들은 무시무시할 수도 있지만, 이 모든 것은 축제적 성격을 지닌다.”3)

하위징아는 축제와 놀이의 관계가 긴밀하다는 것을 강조하기는 하지만, 축제가 반드시 환희와 즐거움만을 추구하지는않는다고 하였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한 광화문‘촛불축제’에서 이미 경험한 바 있다. 이것은 분명히 축제였지만 마냥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위징아의 놀이 개념을 발전시킨 카유아가 놀이에서 강조하는 것은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이 서로 대조를 이루는 양상을 보인다는 점이다. 즉, 축제에 참여한다는 것은 신성한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며, 여기에서 일상의 규칙과 규범을 ‘위반’함으로써 비로소 일상의 시스템이 가지는 모순과 갈등의 원인, 또는 가치 등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축제시간의 흐름은 일상의 시간과는 다른 방식으로 흐르며, 거꾸로 흐르기도 하고, 멈추기도 한다. 본인의 신분이 갑자기 격상하기도 하고 나락으로 떨어지기도 하며, 성별이 바뀌기도 한다. 평소에는 금기시되는 옷을 입거나, 평소에는 용인되지 않은 소리 지르기, 과도하게 춤추기, 싸움을 하거나 싸움을 시키기, 엄청 먹고 마시기, 분장하거나 변장하기 등이 상당히 용인되는 것이 축제이다. 기존에 당연시되었던 규칙의 파괴가 일시적으로 일어나고 여기에 모든 사람은 환호한다.그것이 때로는 혼란스럽고, 모든 것이 뒤죽박죽 섞이고, 시끄러운 것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는 것을 전제로 벌이는 난장이고 카오스이다. 코스모스 세계가 주는 억압, 도덕, 규율, 원칙의 기본적인 의미를 되새기고 그것들이 진정으로 인간을 위한 것이었는지를 다시 한 번 처음부터 생각해 보기 위한 것이다. 일상적인 규칙을 위반한다는 것은 단순히 규칙을 망각하는 것이나 법규를 부정할 수 있는 기회를 확보한다는 단순한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더 나아가서 축제에 참여한 개인으로 하여금 일상의 걱정거리들을 단번에 날려버리고, 또 다른 세계를 경험하게 하는 기회가 된다.

축제를 확장하기

축제에 대한 학술적 관심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놀이에 대한 연구가 1930년대 후반에 하위징아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면, 그 이후 세계대전이 마무리되면서, 세계가 전후 복구에 여념이 없었고, 이후 여러 번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놀이에 대한 연구는 사그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이것은 축제에 대한 관심으로 뜨겁게 다시 달아올랐다. 경제 재건과 지역 정체성, 지역 문화 활성화, 관광 활성화, 경제적 여유, 문화적 특성과 역사에 대한 관심, 여가 생활의 강조, 예술의 대중화, 삶의 질과 웰빙 가치의 부각 등과 같은 사회문화적인 변화 과정에서 축제적 연희 형태가 새롭게 부각되어 우리들 눈앞에 나타났으며, 복원되었고, 강조, 각색 되었다.

개인들의 놀이는 문화적이고 집단적인 축제 형태로 다시 변신하게 된다. 축제는 놀이의 한 부분이었다가 이제는 놀이를 깨고 나오는 형국이다. 축제는 가만히 있는 내 앞에서 저절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 문을 열고 들어가서 동참하고 의미를 찾아낼 때 그것은 의미 있는 것으로 나한테 다가온다. 축제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아무 때나 하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으로 동의된 시간과 공간이 주어진다. 다분히 사회적인 약속인 것이다. 또한, 축제는 단지 즐거움의 표현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고통스러운 비극 속에 죽어간 이들을 추념하는 살풀이나 기억의례도 분명히 축제의 모습을 띤다. 예를 들어서 역모죄로 억울하게 죽은 정치인의 원한을 푸는 의식으로 3,000명이 가마퍼레이드 행렬에 참여하는 일본 오사카의‘텐진마츠리’, 어린 왕의 죽음을 기리는 강원도 영월의‘단종문화제’, 강원도 횡성군에서 벌어지는 전통 장례 문화 축제인‘횡성회다지소리 민속문화제’, 광주의‘5·18기념 행사’,‘ 제주4·3제’등이 이에 해당하는 사례가 될 수 있다.

놀이는 문화를 만들어내고 표현해 내는 것이라면, 축제는 문화를 융합하고 승화시켜서 삶을 다시 되짚어 보게 한다. 우리가 진짜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지속적·정기적으로 내 삶을 반추하게 하는 것이 축제이다. 그러니 이러한 축제가 많으면 많을수록 사회는 건강해지고 훨씬 더 살만한 세상이 되어간다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류 정 아 /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선임연구위원

 


1) Cox, Harvey, 1971, La fete des fous: essai theologique sur les notions de fete de la fantasie, Seuil, Paris, (The Feast of Fools: A Theological Esay on Festivity and Fantasy, Cambridge, Mass., 1969).
2) Caillois, R., 1950(1939), L’homme de le sacre, Gallimard, Paris, 이상열 역,『 놀이와 인간』, 문예출판사.
3) 요한 하위징아 저, 이종인 역, 2017(초판 2010),『 호모 루덴스』, 연암서가, p.65.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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