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호 영화비평:<곤지암>(2018), 관음증/노출증 시대의 파운드 푸티지 영화

 ‘가지 말라는 곳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곤지암>(2018)의 포스터 카피는 공포영화 장르의 핵심을 정확하게 전달한다. 공포영화는 알려진(known) 세계를 초월하려는 욕망이 응징 받아야 할 것으로 그려지는 장르다.“ 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다쳐!”가 이 장
르의 세계관이다. <곤지암>은 이 공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인터넷 방송‘호러 타임즈’의 BJ 하준을 비롯한 7명의 젊은이들이 지금은 폐허가 된 곤지암 정신병원에 공포체험을 떠난다. 1961년 5월 16일 개원한 이 병원은 환자 42명의 집단자살과 병원장의 실종으로 1979년 10월 26일 문을 닫은 이후 수십 년 간 흉가처럼 방치되었다(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해 10·26 사태로 붕괴한 박정희 정권에 대한 장난스러운 은유. 병원장은 올림 머리를 한 박영애인데, ‘영애’란 대통령의 딸을 높여부르는 말). 곤지암 병원에서의 공포체험을 실시간으로 방송하는 7명의 멤버들은 절대 들어가선 안 된다는 402호에 들어가면서 기이하고 공포스러운 일들을 겪게 된다.

파운드 푸티지 장르로서의 <곤지암>

 <곤지암>이 기대고 있는 것은 <블레어 윗치 The Blair Witch Project>(1999) 이후 할리우드 공포영화의 하위 장르로 부상한‘파운드 푸티지(found footage)’다. 파운드 푸티지의 본래 의미는 누군가에 의해서 발견된(found) 필름 조각(film footage)이다. <블레어 윗치>의 오프닝에는 메릴랜드 버킷스빌 숲으로 마녀를 찾아 떠난 영화학도들이 모두 실종된 지 1년 후에 ‘그들이 찍은 필름이 발견되었다(their footage was found)’는 자막이 나온다. 발견된 필름(found footage)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설정이다. 따라서 파운드 푸티지는 누군가가 찍은 영상기록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극영화이면서도 다큐멘터리처럼 가장하기 때문에 페이크 다큐멘터리의 일종으로 여겨진다. 모든 페이크 다큐멘터리가 파운드 푸티지는 아니지만 모든 파운드 푸티지는 페이크 다큐멘터리라고 하면 얼추 맞을 것이다. 그러나 파운드 푸티지가 공포영화의 한 장르처럼 된 이상 이것을 굳이 페이크 다큐멘터리라 부를 필요도 없고, 이를 페이크 다큐멘터리로 인식할 관객도 거의 없을 것이다.
<곤지암>은 여기에 인터넷 실시간 방송이라는 설정을 더한다. 영화 속 대사에 폭주 레이싱 방송으로 광고수익 1억을 달성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7명 멤버들 역시 곤지암 정신병원 공포체험을 실시간으로 방송함으로써 엄청난 조회 수와 큰 광고수익을 노리고 있다. 따라서 영화는 인터넷방송 시청자들이 실시간으로 이들의 공포체험 현장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전달하기 위해 배우들이 직접 촬영하는 형식을 취했다. 배우들이 찍은‘직캠’영화의 포맷을 택한 것이다. 따라서 거의 영화 전체가 1인칭 시점 숏으로 채워져 있다. 물론 100% 그런 것은 아니다. 몇몇 인서트 숏에서는 전지적 카메라의 시점을 택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들의 공포체험이 드론에 의해서도 촬영되고 있다는 대사가 나온 다음 숏에서 높이 떠 있는 드론의 시점 숏으로 이들이 곤지암으로 향하는 모습을 찍은 부분이 그러하다. 이 숏은 전형적인 공포영화의 클리셰로 기능한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아마도 귀신으로 추정되는) 시점으로 인물들을 훔쳐보면서 으스스한 사운드와 결합하는 것은 숱한 공포영화의 오랜 관습이었다. 이런 숏 몇몇을 제외한다면 1인칭 시점은 비교적 잘 지켜진다.

 

 

 

 지난 10여 년 동안 한국의 공포영화 장르가 흥행과 비평 측면에서 이렇다 할 영화가 없었다는 점에서 <곤지암>의 선전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15년 전에 개봉한 <장화, 홍련>(2003)에 이어 공포영화 역대 2위의 흥행 성적(4월 22일 기준 266만 여 명)을 기록했다는 점은 차치하고라도, 한국에선 좀처럼 시도되지 않았던 파운드 푸티지의 실험, 10~20대의 취향을 반영하는 인터넷 방송이라는 형식, 한국 공포영화의 낡은 구습처럼 여겨졌던 구구절절한 사연이 배제된 점 역시 높이 사줄 만하다. 서사나 캐릭터의 완성도보다 즉각적인 반응과 자극에 민감한 젊은 관객들을 노린 영민한 장르영화라 할 수 있다. CNN 선정, 세계에서 가장 소름끼치는 장소 7개에 곤지암 정신병원이 거론됐고, 호러 마니아들 사이에서 성지순례로 회자됐다는 점에 더해, 실제 정신병원 소재 땅의 소유주가 영화상영 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기각됐다는 점도 영화의 흥행에 득이 되면 됐지 해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관음증과 노출증, 즉물성과 현장성

 

 그러나 나는 공포영화로서 <곤지암>이 거둔 장르적 성취나 결점을 논할 생각은 없다. 그보다는 <블레어 윗치> 이후 <파라노말 액티비티 Paranormal Activity>(2007), <클로버필드 Cloverfield>(2008), 그리고 <곤지암>과 매우 유사한 내용의 <그레이브 인카운터Grave Encounters>(2011), 인터넷 방송 형식의 <혼숨>(2016), <곤지암> 등으로 이어진 파운드 푸티지 공포영화의 사회적 측면을 얘기해보고 싶다. 자극적인 인터넷 방송으로 큰돈을 벌고자 하는 영화 속 청년들이 이 시대의 한 단면이라 해도 그것을 도덕적으로 꾸짖지는 않으련다. 예나 지금이나 ‘젊은 것’들은 그래왔고, 그 젊었던 것들이 지금의‘꼰대’가 되었을 뿐이다.
오히려 이 장르가 갖고 있는 관음증과 노출증, 즉물성과 현장성의 형식이 마음에 걸린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관음적인 매체다. 그러나 여기에는 오랜 믿음이 자리하고 있다. 카메라 앞의 현실은 물리적 실제이지만 그것을 구성하는 것은 허구라는 것. 그래서 우리가 엿보는 것은 실제 인물이 아니라 허구의 캐릭터라는 것. 이것이 누군가의 삶을 몰래 엿봤다는 우리의 부끄러움을 상쇄해준다. 그런데 파운드 푸티지는 다큐멘터리의 형식을 취함으로써 이러한 매개를 걷어낸다. 물론, <포가튼 실버 Forgotten Silver>(1996)처럼 실제 유명인사가 나와 뉴질랜드로 부터 세계영화사가 시작됐다는 주장을 시치미 뚝 떼고 하는 페이크 다큐멘터리가 아니라면, 이것을 실제 다큐멘터리로 볼 사람은 없다. 하지만 1인칭 카메라와 실시간 중계로 전달되는 형식은 특유의 즉물성과 현장성을 갖고 있다. 우리와 관계없는 누군가의 삶이 리얼하게 노출되는 것은 우리의 관음증을 증폭시킨다. 관객은 그 행위가 부끄럽지만 그렇기에 금기의 욕망은 배가되고 그에 따른 몰입도 역시 증가한다. 왜 에로영화가 아닌 하드코어 포르노를 찾는가? 더 나아가 왜 실제 인물을‘도촬’한 동영상인가? 연예인이 나오는‘먹방’이 음식을 맛있게 보이도록 포장한다면, 인터넷 방송의 먹방은 왜 먹는‘행위’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는가? 이렇게 매개 되지(mediated) 않은 것에 대한 관객의 욕구는 영화를 재현(representation)이 아닌 제시(presentation)의 매체로 위장하게 한다.
파운드 푸티지 공포영화는 그러한 대중의 관음증을 이용한다. <블레어 윗치>에서 헤더는 숲 속에서 길을 잃어 패닉 상태에서도 카메라를 끄지 않는다. <파라노말 액티비티>에서 미카도 유령에 몸을 떠는 애인 케이티를 계속해서 찍는다. <곤지암>에서 하준은 공포에 질린 멤버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방송을 멈추지 않는다. 이들은 찍는 것에 대한 강박을 보이는데 이것은 누군가에게 자신들이 노출되는 것에 병적으로 집착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누군가란 곧 관객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카메라를 끄는 순간, 즉 노출하지 않는 순간, 관객에게 더 이상 관음의 대상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음증과 노출증은 한 쌍을 이룬다. SNS에 셀 수 없이 많은‘셀카’사진을 올리는 노출 행위가 불특정 다수의 관음을 전제하듯이 말이다(옆길로 새는 말이지만,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면 셀카를 찍는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데, 이는 셀카 찍기가 물신화되어 나르시시즘과 행복하게 만난 것이다).
서사에 내재한 의미(구구절절한 사연)를 지워내고 거기에 극도의 자극과 반응만이 남는다는 점에서 <곤지암>을 비롯한 파운드 푸티지 공포영화는 하드코어 포르노를 닮아 있다. 포르노는 연출된 행위라는 점에서 허구이다. 포르노의 섹스가 진정한 것이 아니며 성의식을 왜곡한다는 주장에서는 그 허구성이 공격의 목표가 된다. 반대로 그것이 진정한 섹스가 아니라도 폭력적인‘진짜 성행위’라는 주장에서는 그 즉물성과 현장성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파운드 푸티지 공포영화는 물론 허구다. 따라서 그것을 날 것 그대로의 자극만을 추구하는 몇몇 인터넷 방송‘( 폭주 포르노’,‘ 푸드 포르노’등 수많은 유사 포르노)과 동급으로 취급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관음증과 노출증, 즉물성과 현장성, 극단적인 자극과 반응이 포화 상태가 된 우리 시대의 포르노가 숨어있다.

 

정 영 권 /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강사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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