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비평 | <로보캅> 새로운 로보캅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영화비평 | <로보캅>

새로운 로보캅은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 필자

백태현 / 인하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강사

— 본문

▲ 치명적인 부상을 입은 경찰 ‘머피’가 로보캅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movie.naver.com

브 라질 출신의 조제 파딜랴(Jose Padilha)가 폴 버호벤(Paul Verhoeven)의 1987년 영화 <로보캅 RoboCop>을 다시 연출할 감독으로 선정되었을 때, 원작 영화 팬들은 기대감을 숨기지 않았다. 조제 파딜랴 감독은 2007년 <엘리트 스쿼드 Tropa de Elite>로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하면서 영화계에 널리 이름을 알렸으며, 2010년에는 <엘리트 스쿼드 2 Tropa de Elite 2>로 브라질 영화의 흥행 기록을 갈아치웠던 인물이다. <엘리트 스쿼드> 시리즈는 감각적인 화면 연출과 편집으로 무장한 채, 폭력을 대물림할 수밖에 없는 사회 구조와 그것을 보호해야 했던 경찰의 모습에 커다란 물음표를 던지고 있었다. 바로 이 지점 때문에 원작 영화의 팬들은 조제 파딜랴를 <로보캅>을 세련되게 가공할 적임자로 생각했던 것 같다.

 

하 지만 그들의 기대가 실망으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로봇과 기계 사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원작의 주인공은 악덕 기업인을 처치하는 정의로운 경찰로 변해 있었으며, 텅 비어 있던 집은 미모의 아내와 귀여운 아들이 있는 행복한 곳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무시무시한 폭력이 난무하던 원작 영화의 이미지는 가는 체로 걸러낸 정제된 이미지로 순화되어 있었다. 한마디로 2014년의 <로보캅>은 1987년의 <로보캅>이 만들어 놓은 길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았다. 많은 팬들은 원작이 제공한 문제의식을 담아내기에 실패했다고 서둘러 판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충실도에 따른 판가름보다 새로운 작품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게 더 의미 있어 보인다. 이 글은 그런 입장에서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난 <로보캅>의 특징과 한계를 살펴보려 한다.

 

경찰국가 미국의 실체

 

< 로보캅>은 경찰국가로서의 미국에 관한 영화이다. 이것에 관한 흥미로운 장면 두 개를 살펴보자. 첫 번째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등장하는 TV쇼 장면이다. 팻 노박(사무엘 잭슨)이 진행하는 ‘노박 엔터테인먼트’라는 쇼인데, 거기서 그는 미국의 위대함을 부르짖는다. 2028년의 미국은 전 세계에 드론과 로봇경찰을 배치해 놓은 상태이다. 그는 미국에서 만든 드론과 로봇경찰이 치안을 담당하므로 세계는 미국과 비슷한 평화와 안정을 누리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테헤란 현지에 파견된 리포터를 연결, 드론과 로봇이 치안을 담당하는 것을 생중계로 보여준다. 이는 경찰국가로서 미국의 야심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말할 수 있다. 2014년 현재의 미국이 세계 곳곳에 군대를 배치한 것처럼, 2028년의 미국도 전 세계에 드론과 로봇경찰을 배치한 것이다.

 

하 지만 이것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팻 노박과 테헤란 현지 중계 방송 화면 사이에는 이란인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쇼트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쇼트는 영화 속 캐릭터가 볼 수 없는 쇼트이다. 오직 관객들에게만 제공되는 쇼트인데, 그 내용은 미국의 드론과 로봇경찰에 대항하여 자살 폭탄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관객들은 그들의 비장함을 볼 수 있지만, 영화 속 캐릭터인 팻 노박은 그것을 볼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이 자살폭탄 테러를 자행하자 팻 노박은 이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에 로봇경찰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따라서 이 장면의 연결은 세계의 경찰 노릇을 하는 미국을 조롱하는 것처럼 읽어낼 수 있다.

 

그 런데 반어적이게도 미국만이 로봇에게 치안을 맡기지 않고 있다. 팻 노박의 이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그러면서 그는 드론과 로봇경찰을 만든 옴니코프(Omnicorp)의 최고경영자 레이몬드 셀러스(마이클 키튼)를 이 시대 최고의 애국자라고 소개한다. 그는 미국이 이런 애국자를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고 비판하며 하루빨리 로봇을 도입해야 한다고 소리 높여 외친다. 미국은 로봇의 위험성을 강조한 ‘드레퓌스’법으로 자국 내 판매가 금지하고 있다. 이 법안의 핵심은 감정이 부재한 로봇의 위험성이다. 만약 인질극이 벌어진다면, 인간 경찰은 인질의 위험을 고려하는데 로봇경찰은 그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작은 위험이 도래하는 한 전면적인 도입은 위험하다는 주장이다. 그래서 셀러스는 그 법안을 피해가기 위해서 아주 간단한 방법을 선택한다. 그것은 로봇에 감정을 집어넣는 일, 즉 기계와 인간을 결합하는 것이다.

 

여 기서 등장하는 것이 바로 알렉스 머피(조엘 킨나만)이다.머피는 부패할대로 부패한 경찰 조직에서 홀로 정의감을 지켜가는 경찰이다. 그런 머피를 눈엣가시처럼 여긴 동료들이 범죄 조직에 그를 팔아넘기는 바람에 머피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만다. 마침 로봇과 인간의 결합을 모색하던 셀러스의 눈에 머피가 들어오게 되고, 머리와 심폐기능만 남은 머피는 기계의 도움을 받게 된다. 이로써 셀러스는 감정을 가진 로봇을, 머피는 강한 신체를 갖게 되었다. 동시에 셀러스는 로봇경찰과 드론을 자국에 판매 할 수 있는 명분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의 이름(Sellars)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의 최종적인 목표는 치안이 아니라 시장 확대이다.

 

이중 착취 구조

 

그 리하여 머피는 기계의 몸을 안고 새로 태어나게 되는데, 바로 이 지점이 흥미롭게 살펴볼 두 번째 장면이다. 로봇과 인체 결합의 최고 권위자인 데넷 노튼(게리 올드만)의 도움으로 새롭게 태어난 머피는 자신의 기계 몸을 보고 당황하기 시작한다. 그는 실험실 문을 박차고 뛰어나가는데, 그가 목격하게 된 것은 동양인들이 가득 늘어선 공장 라인이다. 분홍색 옷을 입고 부품을 조립하고 있던 그들을 뒤로 한 채 공장 밖으로 나간 머피는 그곳에서 또 다른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베트남풍의 모자를 쓰고 벼를 재배하고 있는 동양인들의 모습이다. 공장을 벗어나고자 했던 로보캅은 노튼 박사가 원격 조종으로 전원을 꺼버리자 논 한가운데에 쓰러지고 만다. 논 한가운데에 쓰러진 머피와 그를 둘러싼 동양인의 모습을 부감으로 보여주는 장면은 오늘날 초국적 기업의 상품 통제를 떠올리게 만든다.

 

여 기서 잠시 영화의 흐름을 정리해보자. 미국을 대표해 세계의 치안을 담당하는 로봇경찰들의 목적은 치안이 아니라 상품성이며, 그것을 만들기 위해서는 아시아의 노동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생산된 로봇경찰들이 테헤란의 주민들을 진압하고 있으며 미국인은 생중계로 살기 위해 자행하는 테러를 바라보며 로봇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리고 시장 확대를 위해 로봇과 인간의 결합을 시도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영화가 동양을 재현하고 있는 지점이다. 영화는 경찰국가라는 것은 사실 시장을 확대하려는 제국의 다른 이름이며, 거기에 동양이 희생되고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다. 하지만 미국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기 위해 동양을 단순하게 끌어들인 혐의가 분명히 존재한다. 동양인들은 로봇처럼 공장라인에 줄지어 서 있거나,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다. 그리고 이란의 남자들은 자살폭탄 테러도 마다하지 않는 극단적인 투사들이다. 그들은 기업에 의해, 로봇경찰에 의해 착취된 상태이다. 이것은 미국의 제국성을 말하기 위해 착취된 동양의 이미지를 영화가 착취하고 있는 것이다.

 

이 러한 이중 착취를 연료로 삼아 머피는 정의로운 주인공으로 다시 일어서게 된다. 인간이지만 로봇 같은 동양인들과 달리 머피는 로봇이지만 인간의 고유성을 지키려 애를 쓴다. 영화는 이것을 로보캅의 색깔과 마스크로 표현한다. 인간의 감정을 내재한 로보캅은 은색으로 사람의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다. 셀라스는 로보캅의 효과적인 통제를 위해 감정을 지우기 시작하며 로보캅의 몸을 검정색으로 도색할 것을 명령한다. 감정이 지워진 검정색의 로보캅은 항상 마스크를 사용하여 자신의 얼굴을 관객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맨 얼굴을 드러낸 채 아내와 아들을 만났던 로보캅은 더 이상 가족을 알아보지 못하게 되며 명령에 따른 기계적인 움직임만 반복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헌신적인 아내의 도움을 받은 머피는 기계의 통제에서 벗어나 인간성을 다시 회복하게 되며, 자신의 창조주이자 악덕 기업주인 셀러스에게 총을 겨누게 된다.

 

불완전 연소로 끝나버린 야심찬 시도

 

바 로 이 지점이 영화를 느슨하게 만들고 있다. 머피는 셀러스에게 총을 겨누지만 기계 몸은 창조자인 그에게 방아쇠를 당기지 못하게 만든다. 하지만 머피는 인간의 의지로 기계의 통제를 극복한다. 머피의 인간성 회복을 영화의 절대적 명제로 바꾼 것이 동양의 이미지라면, 명제를 실현하기 위해 도와준 이들은 그의 가족들이다. 영화는 머피의 아내와 아들을 끊임없이 강조하여 서사의 포물선이 가족의 회복이라는 목표점에 안착하도록 도와준다. 마지막에 가족과 함께 있는 머피를 잠시 보여주는 장면이 이를 증명한다. 이때 머피는 은색의 몸을 되찾은 상태이다. 결국 그는 통제와 상품화를 초월하여 이상적인 신체와 감정을 가진 아버지로 화려하게 귀환한 셈이다. 사물화를 극복하여 가족과 재결합에 성공한 머피의 모습은“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입니다”라고 외치던 팻 노박의 주장과 교묘하게 포개진다. 왜냐하면 다른 나라를 착취하여 위대한 나라가 된 미국처럼, 영화 속 머피도 사물화된 동양의 이미지를 착취하여 목표를 성공적으로 이루었기 때문이다.

 

영 화는 미국의 위상을 비판적으로 그리려고 노력하지만 서사와 편집의 궤적은 반동적인 효과를 만들어냈다. 영화를 판단할 때는 주장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적절한 형식과 내용으로 담아내고 있는가를 고려해야 한다. 같은 주장이라도 어떤 방법으로 담아내는가에 따라서 그 주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생각해보면 <로보캅>은 여러모로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 영화이다. 경찰국가 미국에 도전하고 있지만, 그것을 위해 다른 소재들을 거칠게 도식화하여 연료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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