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호 책지성: 강남순, 『용서에 대하여』] 용서, 그 다양성에 대하여

 

당신은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한 적 있는가? 혹은 원망한 적 있는가? 그렇다면 상대방을 용서할 수 있는가? 세상의 크고 작은 관계 속에서 다양한 폭력과 상처, 증오는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인간은 삶을 살아가며 때로는 가해자가, 때로는 피해자가 되어 다양한 양태의 용서와 얽힐 수밖에 없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는 “만약 용서할만한 것만 용서하겠다고 한다면, 용서라는 바로 그 개념 자체는 사라지게 될 것이다. 용서는 오직 용서할 수 없는 것을 용서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내가 했던 것은 용서가 아닌 것일까? ‘용서’란 무엇일까?아이러니하게도 『용서에 대하여』에서는 이 질문에 대해 절대적 답도 최종 결론도 찾을 수 없다. 저자는 “용서에 대한 특정한 결론이나 해답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언제나 잠정적이고, 정황적이며, 부분적일 뿐이다”라고 답한다. 저자는 단순하게 생각했던 용서의 개념에 다양한 차원과 종류가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더불어 독자와 ‘용서에 대하여’ 대화를 하고자 한다. 저자와 오랜 대화(독서)는 조금은 막연한 개념이던 용서를 고찰하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용서가 무엇인지 재정립할 수 있게 된다.

 

 

용서란 무엇인가?

‘Forgive(용서)’는 Give up(포기하다)의 Give에서 유래됐다. 이것은 용서를 하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내포한다. 보통은 분노, 억울함, 복수심 같은 것들이다. 과거의 용서는 부당하거나 상처받은 일을 당했을 때 개인이 행동하는 반응이었다면, 현재의 용서는 개인을 넘어 공적이슈도 포괄하는 개념으로 확장됐다. 또한 표면적으로 개인적인 사건일지라도 내면에는 공적인 문제도 얽혀있을 수 있다.

용서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분노의 단념으로서 용서’이다. 이는 용서하는 자가 잘못을 저지른 자에게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분노 등)을 단념해야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분노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인데, 보통 이를 구분하지 않고 단순히 분노를 단념하는 것이라고 단정하기 때문에 용서가 단순한 개념이라는 오류가 발생하게 된다. 둘째는 ‘도덕적 의무로서의 용서’다. 이것의 전제는 세상에 완벽한 인간은 없다(인간은 가해자임과 동시에 피해자다)는 것과 인간의 선의지(베풂, 사랑, 자비)와 분노는 공존 가능하다는 것이다. “가해자에 대한 모든 분노를 단념할 필요가 없다”라는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의 주장처럼 용서는 분노의 감정을 포기하는 것이 아닌, 도덕적 의무이자 윤리적 반응이라는 것이다.

용서를 구하는 것과 용서를 하는 것은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회적인 문제다. 용서를 구하기 위해서는 전제조건이 충족되어야 하지만, 조건들이 충족된다고 해서 무조건 용서로 귀결되지 않는다. 또한, 우리는 용서를 하는 것이 부당한 행위를 묵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용서가 하나의 사건이라면 피해자와 가해자에게 일어나는 변화는 상호적이며 비대칭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용서는 정의의 집행보다는, 도덕적이며 정서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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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시각의 용서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용서는 일상에서 많이 쓰이기 때문에 본래의 의미보다 단순한 것으로 착각하기 쉬운 개념이다. 하지만 용서는 과거의 연장선이며, 삶과 사회에 연계된 복잡한 개념이다. 용서는 네 가지 시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자기 용서는 자신의 삶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 혹은 회피할 수 없음을 깨달을 때 자기 용서에 대한 성찰이 시작된다. 타인이 아닌, 자신의 과오에 대해 인정하고 용서를 하는 것은 오히려 더 어려운 용서가 될 수 있다. 둘째, 대인 관계적 용서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관계에서 상처를 주고받을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 누군가의 잘못으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생긴 경우, 이때의 용서는 대인 관계적 용서라 할 수 있다. 셋째, 정치적 용서는 앞의 사적인 상황과 다르게 공적 개념이 포함된 넓은 범위의 용서다. 정치적이라는 표현은 광활한 영역을 포용하기에 앞의 두 가지 용서는 ‘정치적 용서’안에 유기적으로 얽혀있다. 대표적 사례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진실화해위원회(Truth and reconciliation commission)’를 들 수 있다. 위원회에서는 국가나 정부 권력의 오남용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 국가 폭력과 부인주의에 맞서 인권침해 진상규명과 구체적 행위를 밝혀냈다. 넷째, 형이상학적 용서는 세상의 불완전성에서 야기되는 ‘르상티망(ressentiment; 원한, 복수감)’으로부터 나의 인간됨과 내면세계를 보호하는 것이 핵심이다. 세상의 부정적 사건으로 나의 내면세계에 르상티망이 쌓일 때, 나의 인간됨이 파훼될 수 있기 때문이다.

 

 

윤리와 정치의 용서

용서에서 빠질 수 없는 부분은 ‘윤리’와 ‘정치’다. 용서는 정권이나 제도가 바뀔 때 정치적으로 이용되기도 한다. 2015년 박근혜 정부의 위안부 해결 방안 합의는 피해자들의 의견과 가해자의 사과가 제외된, 정권이 용서를 정치적으로 사용한 예로 꼽힌다. 조금은 막연한 용서라는 흐름에서 윤리와 정치는 무엇이 다를까? 저자는“윤리는 아무 조건 없이 사랑, 환대, 우정, 용서를 베푸는 이상 세계를 가리킨다. 반면, 정치는 현실 세계의 구조적 조건이 갖춰졌을 때만 그런 행위를 하도록 제한한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윤리와 정치 사이에는 항상 일정한 거리가 존재한다. 자크 데리다는“윤리는 언제나 정치 너머에 있기 때문에, 두 개념은 나란히 병행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러나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윤리는 정치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의 한계를 설정해주기 때문에 두 개념의병행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용서의 정치’와 ‘윤리의 용서’는 무엇일까? 먼저 용서의 정치는 현실의 구체적 조건이 갖춰졌을 때만 용서가 가능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나치의 유태인 학살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수많은 피해와 범죄에 가담한 가해자들이 사망했기 때문에 용서의 전제조건인 참회나 처벌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용서는 죽음의 수용소에서 죽었다”라고 말했다. 만약 가해자가 살아있다 하더라도 그들이 저지른 악행은 비극을 가져왔기에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말이다. 용서의 정치는 이런 전제조건 때문에 ‘교환으로서의 용서’라는 수단이 된 것이다.

윤리의 용서는 아무런 전제조건이나 계산 없이 무조건적으로 용서하는 것을 의미한다. 잘못의 고백, 참회가 전제조건이 되는 조건적 용서는 이미 교환으로서 의미를 상실했다는 것이다. 앞에서 자크 데리다는 “불가능한 것을 용서할 때 비로소 진정한 용서다”라고 했다. 이는 진정한 용서가 가능한 지점은 용서가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는 순간이라는 것이다. 누구나 쉽게 용서할만한 수준이라면 용서의 의미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용서의 ‘불가능성’은 진정한 윤리의 용서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용서의 두 축인 ‘윤리의 용서’와 ‘용서의 정치’는 인간세계에서 중요하며 그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한다. 두 가지 의미를 살펴본다면 용서의 복합적인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용서에는 마침표가 없다

용서는 잔혹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생존하기 위한 필수조건이다. 이 책은 상투적이고 두루뭉술한 개념이 아닌 다각도의 용서를 고찰할 수 있다. 그리고 나의 과거를 반추하며 가해자와 피해자 각각의 입장에서 고민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자로 잰 듯 구분할 수 없지만, 완전한 용서와 불완전한 용서 사이에서 이상적인 용서를 이루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인간에게 용서는 일회성이 아닌, 삶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꾸준히 용서하는 연습을 한다면, 언젠가는 완전한 용서에 닿을 수 있을 것이다.

용서는 종이에 잘못 쓴 글을 지우는 지우개와 같다. 잘못 쓴 글씨를 깨끗하게 지울 수 없다면 종이는 더럽혀져있고, 다음 글을 쓰는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만약에 이 세상에 용서가 없다면, 불완전한 인간이 저지를 수밖에 없는 실수의 사슬을 끊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과거에 사로잡힌 발목 때문에 미래를 희망할 수 없는 것이다. 용서는 사회와 개인에게 과오를 지우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빛이 될 수 있다. 상대방을 용서한다면 그 빛은 돌고 돌아 언젠가 용서가 필요할 나에게 닿을 수 있을 것이다.

강안나 | annakang@khu.ac.kr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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