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호 인터뷰: 안병주, 경희대학교 무용학부 교수] 한국의 미를 세계에 보이다

지난 2월 9일 강원도 평창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은 국제적으로 큰 호평을 받았다. 전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 이날, ‘태극:우주의조화’는 역동적인 에너지와 한국의 미를 잘 보여준 공연으로 꼽혔다. 본교 무용학부 안병주 교수는 ‘태극:우주의 조화’의 예술 감독을 맡았다. 특히나 이번 공연의 무용수는 본교 무용학부의 학부생과 원생을 주축으로 이루어졌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개회식의 준비과정과 에피소드를 들어봤다.

 

▲평창올림픽 개회식‘태극:우주의 조화’공연 장면                                                                                      ⓒ 평창올림픽 공식홈페이지

 

평창올림픽 개회식 ‘태극:우주의 조화’ 예술감독을 맡으며

Q. 개회식 ‘태극:우주의 조화’에 참여하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평창올림픽 개회식은 굉장히 다양하고 많은 분야로 나누어져 있는데, 저는 개회식 ‘태극:우주의 조화’ 예술감독(협력예술감독) 겸 안무를 맡았습니다. 평창올림픽 개회식의 전체 팀들은 개최 2~3년 전부터 준비를 했지만, 국정농단, 탄핵, 조기 대선 등의 과도기 속에서 조직위원회의 위원장들이 사퇴하는 등의 어려움이 있어 제대로 된 준비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평창올림픽의 조직위원회에서 ‘한국의 미’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전통무용을 선정하고자 많은 회의를 했고, 한국의 흥과 멋, 신명을 잘 보여줄 수 있는 ‘장고춤’이 선정되었습니다. 현재 저는 모친 ‘김백봉’(경희대학교 무용학부 명예교수)의 예풍과 예맥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김백봉 선생은 신무용의 대가로 불리며, 장고춤을 군무로 발전시킨 장본인입니다. 저는 모친의 춤을 계승하고 원형보전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여, 이번 개회식에도 참여하게된 것입니다.

 

Q. 개회식 ‘태극:우주의 조화’의 안무를 구성할 때 어떤 점을 중점적으로 생각하셨나요?

조직위원회에서는 한국적인 느낌과 동시에 우주의 큰 에너지가 전 세계로 확산하는 웅장한 분위기를 원했어요. ‘장고’는 리듬을 가장 잘게 나눌 수 있는 한국의 독창적인 타악기로 양쪽이  내는 소리가 달라요. 왼쪽이 궁편(음의 세계), 오른쪽을 채편(양의 세계)이라 하고, 재밌게도 이것은 태극의 기반인 음과 양의 조화를 보여주죠. 그리고 이를 이용한 장고춤은 장고를 어깨에 둘러메고 장단에 맞추어 추는 춤이에요. 한국의 대표적인 민속무용으로 불리는 장고춤은 개회식에서 이를 표현하기에 적절한 민속 무용이었죠.

그리고 태극기는 만물이 순환하는 원리가 담겨있어요. ‘태극’ 문양은음과 양의 조화를, 네 모서리의 4괘인 ‘건곤감리’는 각각 하늘, 땅, 물, 불을 상징하죠. 중앙의 태극을 표현한 장고 연주자들이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루는 과정을 독창적인 리듬으로 들려주면, 무용수들이 동시에 어둠 속의 빛이 되어 점점 거대한 기운을 만들어가는 형상으로 건곤감리를 표현했습니다. 개회식 장소였던 평창올림픽 플라자의 무대는 우주같이 느껴질 만큼 광활한 규모의 5각형 모양이었거든요. 그 큰 무대를 전체적으로 활용하는 것과 180여 명의 무용수가 함께 추는 군무가 유기적인 움직임을 나타내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Q. 개회식에 본교의 무용학부 학부생, 대학원생이 많이 참여했다고 들었습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나요?

이번 공연은 짧은 시간 내에 작품을 완성해야 했기 때문에 큰 압박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무용수들의 ‘부상’이었습니다. 유난히도 추웠던 이번 겨울, 평창 날씨는 참 잔인했습니다. 개회식 준비를 하며 무용수 180여 명을 모집했는데, 아쉽게도 이들 전부가 무대에 함께 서지는 못했습니다. 일부의 무용수들이 A형 독감에 걸리거나 연습 중에 발목을 다치고, 심지어 장고를 이용한 안무 때문에 머리를 다친 경우가 있었거든요.

특히나 ‘모의개회식’을 진행했던 날이 기억나네요. 지붕이 없는 평창올림픽 플라자는 야외 공연과 같은 상황이었는데,그 날도 역시나 칼날과 같은 바람이 회오리처럼 몰아쳐 ‘악’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추웠습니다. 그 날씨에 무용수들은 한복만 걸치고 무대에 올랐고, 리허설을 마치고 돌아온 무용수들은 모두 구슬 같은 땀을 흘리고 있었어요. 개회식에 참여한 무용수들은 애국심을 기반으로, 사명감과 책임감을 몸소 보여주었습니다. 무용수들은 고등학생, 대학생, 대학원생으로 다양하게 이루어져 각각의 실력 차이는 천차만별이었지만,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갔기 때문에 서로 돈독한 사이가 되었습니다. 한 무대를 위해 많은 무용수가 춤이라는 매개체로 함께 화합과 성장하는 과정을 보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Q. 개회식에 예술감독으로 참여한 것이 본인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나요?

개인적으로는 아쉬움과 뿌듯함이 공존해요. 이렇게까지 춥지 않았다면 더 아름다운 한국의 춤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지만, 안무 패턴에 대해 많은 연구를 하게 되어 큰 성과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모친은 1968년 멕시코올림픽에서 부채춤을,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2,000명의 무용수가 만들어내는 대형 군무인 ‘화관무’ 무대를 선보이셨습니다. 이어서 제가 예술감독을 맡게 되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정말 큰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이전에 모친께서 “공연을 하고 나면 안무를 도둑맞는다”는 말씀을 하셨던 기억이 있어요. 올림픽 개막식은 세계 규모의 공연이지만, 예술감독의 이름은 자막으로조차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에 무대 뒤에서 묵묵히 일하는 예술인의 공이 인정받지 못한다는 말씀이셨지요. 이번 평창올림픽 개회식 때 KBS 중계에서 “장고를 독립적인 소품으로 활용하고 있는 현재의 장고춤은 김백봉이 창작한 것이다. 김백봉류 장고춤의 자유로움과 에너지를 통해 태극의 4괘를 표현하였다.”는 자막을 확인할 수 있었고, 어머니 성함을 자막에 올려드릴 수 있었다는 점에서 아주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더불어, 개막식 현장에서 들을수 있었던 관객의 환호와 함성은 온몸에 전율을 느낄 만큼 큰 에너지였어요.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4대가 걸어온 무용가의 길

Q. 어렸을 때부터 무용을 접하셨을 것 같은데, 무용에 관한 기억에 대해 얘기해주세요.

부모님께서 예술은 가업이라고 생각하셨어요. 무용을 계승할 수 있는 딸을 간절히 원하셔서 15년 만에 저를 낳으셨죠.부모님께서는 제가 아주 어릴 적부터 무용을 배우기 위한 기본기인 음악성을 키우기 위해 비싼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구매해 항상 머리맡에서 틀어 주셨고, 장구, 가야금, 피아노, 작곡 등을 알려주셨습니다. 아이가 자라며 말을 배우는 것처럼, 당연하게 음악과 무용을 배웠던 것 같아요.

제가 3~4살 때 기자들이 취재차 집에 왔는데, 제가 연탄광에서 벌을 받아 얼굴에 연탄이 칠해진 채로 울고 있었대요. 그러다 기자들이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니 그 상태로 한복을 차려입은 후에 수건을 어깨에 ‘착’메고 춤을 추는 자세를 잡았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또 어렸을 때 부채춤을 어머니 등에 업혀 걸음마처럼 배웠습니다. 어머니가 대학 강의를 하실때 제가 옆에 있었는데, 다른 무용수가 안무 순서를 틀리자 순서를 고쳐줄 만큼 능숙하게 춤을 외우고 있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당시 저는 사람을 ‘무용을 하는 사람’과 ‘무용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구분 할 만큼 무용은 항상 제 주위에 있었고, 그냥 당연한 삶이자 저 자신이에요.

 

Q. 현재 교수님께서는 ‘평안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김백봉 부채춤 보유자’이십니다. 모녀가 사제 간이기에 더 힘들었거나 어려웠던 점은 없었나요?

선생님으로서 어머니는 강압적인 모습보다는 칭찬을 많이 해주시는 따뜻한 분이셨습니다. 언제나 “잘한다, 좋다, 이렇게 해보자”등의 부드러운 말씀과 사랑으로 춤을 가르쳐주셨어요. 그래서 성장 과정 때에는 항상 자신감이 충만한 무용수였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사회에 나와 냉혹한 현실을 느끼기 시작했어요. 저를 향한 기대감, 차별적인 시선은 생각보다 견디기 쉽지 않았는데, 사실 이 때문에 강의하기조차 어려울 만큼 20년간을 고생했습니다. 그 고통을 제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제 딸은 무용 근처에도 오지 못하게 했어요.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 과거를 되돌아보면 그 시절 덕분에 인생 공부가 되었다는 생각을 해요. 더욱더 큰 성장을 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고요.

 

Q. 교수님께서는 무용으로 ‘가업’을 잇는 일을 하고 계시는데, ‘ 무용가’의 길은 어떤 의미가 있으신가요?

누군가 새로운 것에 도전하기 때문에 사회가 발전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획劃)’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죠. 과거의 저는 유학을 남들보다 빨리 결심할 만큼 ‘모던댄스’를 지향했어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 어느 순간부터 정가가 좋고, 판소리의 가사가 아름답게 느껴지고, 싫어했던 트로트의 리듬이 좋아지는 순간이 오더라고요. 마치 회귀본능처럼 말이죠. 어느 순간 한국 무용을 지향하게 되었고, 이 자리를 지키게 되었어요. 사람은 누구나 방황을 합니다. 돌고 돌아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이죠. 저는 제 자리를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시간을 절약했을 뿐입니다. 가업을 계승하는 것은,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큰 자산이에요. 부모님께 최고의 선물을 상속받았다고 생각합니다.

 

올곧은 예술가의 삶, 그리고 미래

Q. 예술가로서 작품을 창작할 때 어떤 것을 표현하고자 하십니까? 그리고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무엇인가요?

제 작품 중에 가장 큰 애착을 가지고 있는 작품은 ‘몽혼’입니다. 이유는 이 작품에 참여한 무용수 모두가 본교 학생들이기 때문이에요. 혹자는 학생들만으로는 힘들 거라는 얘기를 했지만, 저는 오롯이 학생만으로 작품을 만들어 보겠다는 생각을 했었죠. 경희에 대한 애교심(愛校心)이 깊은 만큼 경희대 학생의 실력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있었습니다. 특히 관객으로부터 좋은 평을 받았기 때문에 더 기뻤던 작품입니다.

그리고 예술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기존에 있는 것에 다른 것을 더해, 변형하는 것이죠. 시인의 시, 화가의 그림, 감독의 영화, 예술가라면 다자신만의 ‘풍(風)’이 있고 이것은 사람의 ‘예술성’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무용도 예술이기 때문에 이와 같습니다. 무용은 그 사람의 ‘움직임의 풍’이 자리 잡혀가는 과정입니다.앞으로 저는 신무용을 기반으로, 현대과학과 융합하여 더 다양한 변화를 보여주는 공연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Q. 마지막으로 원생에게 조언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경희의 선배로서, 대학원의 시간에 대해 얘기해주고 싶어요. 많은 원생이 석사 2년, 박사 3년이라는 시간에 의미를 너무 많이 두는 것 같습니다. 특히 예체능 전공의 경우, 실기 위주 학업에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때문에, 대학원에 진학하여학문연구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 사실입니다. 현실적으로 수료 전에는 수업과 과제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에 논문에 대한고민을 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시간에 쫓겨 논문을 한 학기에 완성하려니, 논문의 완성도나 원생 개인의 성취도는 떨어질 수밖에 없죠. 한 학기 만에 논문을 작성하는 것은 오래 연구해온 저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거든요. 원생은 논문을 쓸 때, 진정한 공부와 연구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학칙이 정한 시간 내에 졸업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낙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생 모두 시간의 조급함을 내려놓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연구해도 괜찮다는 이야기를 해주고싶습니다.

대담·정리 강안나| annakang@khu.ac.kr
사 진 주예진 | jyj6241@khu.ac.kr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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