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7호 책지성: 이중톈, 『이중톈의 미학강의』] 미학을 정의할 수 있을까?

미학이 존재해온 이유

‘미학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는 영원히 정답이 없을 것만 같다. ‘미학(美學)’이라고 이야기 한다면 먼저‘미에 대해 설명’하는 학문이라는 두루뭉술한 대답을 떠올리게된다. 그렇다면 ‘미(美), Beauty’라는 것은 무엇인가? 의미 그대로 아름다움은 무엇인지에 대해 사람들은 각기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가령 누군가가 어떤 조각상을 보며 아름답다고 하는 동시에 그것에 대해 아름답지 않다고 하는 사람이 등장한다면, 그 둘의 논쟁은 매듭지을 수 없을 것이다. 결국 이 끝나지 않을 논쟁처럼 ‘미’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다.
그렇다면 미학은 허무맹랑한 학문인 것인가? 미학을아무리 공부해도 아름다움을 정의내릴 수 없다면, 그 학문은 쓸모없는 것이지 않은가. 어떤 의미에서 ‘미학이 쓸모없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다. 예술작품이 아름다울지언정 그것이 실제로 물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미학을 공부한다고 한들 그 자체로 미를 창조하거나 발산해내지도 않는다. 미학은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이 ‘쓸모없는 학문’이 없어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우리 주변에 ‘미’가 항상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이란 인간의 삶 속에 언제나 존재해왔다. 가령 당신이 이른 오전 음악을 들으며 행복감을 느낀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이 느낀 음악의 아름다움인 것이다. 이처럼‘미’의 역사는 곧 인간의 역사와 함께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미학은 곧 철학

우리는 미학을 공부하면서 미학에 대해 이야기한 수많은 사상가들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도대체 왜 주변에 항상 존재하는 ‘미’를 논하면서 고대 사상가의 이야기를 들어야만 한다는 것인가! 심지어 그들의 말은 어렵게 느껴진다. 사람들에게 미학은 어려운 학문이라는 꼬리표를 달기 충분하다. 그렇지만 미학을 이야기하는 동시에 미학사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미학은 곧 철학이기 때문이다.
철학으로 미학을 풀어낼 수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철학은 인간과 세계의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철학의 발전 원리에 따르면, 현재에 주류라고 하는 철학 사상들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사상들이 한 겹씩 논쟁을 거치며 켜켜이 쌓여 현재의 철학을 만들어 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철학은 곧 철학사이며, 철학사는 곧 철학이 된다. 이것이 우리가 철학을 공부하면서, 머나먼 과거의 그리스 철학자들부터 알아야 하는 이유다. 이제 미학으로 돌아가 철학의 발전 원리를 미학에 적용해보자. 그대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미학은 ‘미(美)’, 즉 아름다움과 그 생성 원리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 학문이며, 이 고민은 사람에 따라 주장과 비판을 반복하며 발전해간다.

 

 

객관미학, 미의 근원에 대해 탐구하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논리적이고 철학적인 사람이었다. 우리가 흔히 그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은 ‘피타고라스의 법칙’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수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인 두뇌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와 그의 학파는 ‘미’의 근원을 숫자에 있다고 보았다. 그들은 수가 만물의 근원이며, 이 수가 조화를 이룰 때 그것이‘아름답다’고 느끼게 된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피아노 건반의 낮은 도에서 높은 도까지의 진동수가 정확히 두 배인 것, 혹은 ‘황금분할비(1:0.618)’라는 비율의 발견 등은 그들에게 숫자의 조화가 아름다움을 창조해낸다는 믿음의 근원이 되었다. 이들의 믿음은 ‘미’의 판단을 숫자의 배열이라는 객관적인 매체로 분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어떤가? 그 역시 피타고라스처럼 객관미학을 주장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피타고라스가 ‘법칙’에 주목했다면 소크라테스는 ‘목적’에 주목했다. 사물이 갖는 아름다움은 그 사물의 법칙보다도 목적에 부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제자 플라톤은 그의 미학을 계승하여 ‘미’의 절대적인 본질을 확립했다. 그는‘미’를 아름다운 사물이 공통적으로 가진 속성이라고 생각했다. ‘미’는 사물에 ‘미’라는 객관적인 속성으로 존재하며, 아름다운 사물들은 모두 보편적으로 지니고 있는 속성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즉 이것을 ‘객관적 보편성’을 가진 ‘미’의 속성으로 정의했다. 이 정의는 특정한 사물에 국한될 수 없으며, 모든 사물에 적용될 수 있는 절대적인 법칙이어야만 했다.
플라톤은 자신의 철학에서 사물의 근원적이며 초월적인 실체를 이데아라고 불렀다. 가령 사람들이 어떤 탁자의 모습을 떠올릴 때, 떠올리는 모양은 각양각색이지만 기본적으로 비슷하게 떠올리는 모양이 바로 탁자가 가진 이데아이다. 그가 정의한 ‘미’의 속성은 탁자를 떠올릴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미’를 떠올릴 때의 비슷한 성질을 정의함으로써 ‘미의 이데아’개념을 정립한 것이다. 이처럼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들은 ‘미’를 어떤 사물에나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는 절대적이며 객관적인 속성으로 생각했다. 이 논리는 무려 2,000년 동안 ‘미’가 객관적인 성질로 군림할 수 있게 했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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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 주관미학을 꽃피우다

칸트에 앞서 18세기의 미학자 버크는 객관미학에 중요한 전환점을 만들어낸다. 영국의 경험론파 철학자인 그는, 피타고라스의 객관미학에 따라‘미’의 성질을 규명하고자 했다. 버크는 작고 정교한 사물에 대해  ‘사랑스럽다’는 속성을 부여하고 그것을 ‘미’로 규정했다. 작고 정교한 물질은 상대적으로 사랑스러운 것으로 인식되는 편이다. 구체적인 예를 통해 ‘미’의 성질을 규명하려고 했다는 변명을 뒤로 하고도 그의 주장은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그의 객관미학은 아름다움의 주체를 사물에서 인간의 감정으로 옮겨놓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렇게 객관미학은 점차 객관적이지 않은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칸트는 이런 시류에 부응하여 미학의 출발점에서 ‘미’를 ‘심미’로 진화시켰다. 그리고 이 심미를 ‘취미 판단’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취미 판단은 아름다움을 ‘유쾌함을 줄 수 있는가?’로 결정하는 것이다. 유쾌하다고 판단한 뒤에야 아름답다고 할 수 있으며 이 판단은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 주관적인 것이다. 칸트는 심미의 원칙에 대해 두 가지를 제시했다. 첫 번째는 ‘목적이 없는 합목적성’이다. ‘아름다움’은 목적이 없지만, 감정을 유쾌하게 만드는 합목적성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다른 한 가지는 ‘공통감’이다. 공통감은 유쾌함이 자신을 비롯한 몇 명의 동의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동의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공통감은 일종의 믿음을 통한 가설일 뿐 진실은 아니다. 이것은 곧 주관적 보편성이라고 한다. 칸트는 심미의 주관적 보편성을 통해 미학세계의 주류를 객관미학에서 주관미학으로 성공적으로 전환시킨다.

 

 

‘미’를 정의할 수 있는가?

이 책은 그리스의 철학자들로부터 미학사의 전환점이 된 칸트를 통해 미학사의 전반을 짚고 있다. 객관미학은 ‘미’를 객관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실체로서의 존재로 주장했지만, 결국 ‘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논리적 모순에 부딪혔다. 오랜 사상적 군림의 종국에서 객관미학의 왕좌는 주관미학에게 넘어갔다. 이것은 심미의 주관성을 통해 사람들이 개별적 심미의 주체로서 ‘미’를 정의내릴 수 있게 하였으며 미학의 기본적 토대로서 미학을 발전시켰다. 흔히 사람들은 ‘미’를 논할 때, 사물에 자신을 치환시켜 감정이입하게 된다. 이처럼 감정이입을 통해 심미의 주체인 인간이 ‘미’를 판단한다. 아직도 ‘미’에 대해 단언하기 어렵지만 우울해할 필요는 없다. 미학의 발전과 객관미학에서 주관미학으로의 전환에서 알 수 있듯이, ‘미’의 절대적으로 존재하는 이데아를 증명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미학은 곧 미학사’라는 명제에 따라 ‘미’에 관한 새로운 주장이 미학사를 새롭게 정의내릴 것이다.

 

최유락 | cyr6160@naver.com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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