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호 책지성 : 칼 구스타브 융 『인간과 상징』] 위대한 안내자 ‘무의식’

202-11-1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함께 심리학에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온 20세기를 대표하는 심리학자이다. 대개 프로이트는 많이 알고 있지만 융을 낯설어 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왜냐하면 융의 저술 대부분은 전문가를 위해 썼고 융 자신 또한 일반 대중에게 자신을 직접 알리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간과 상징』은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융의 유일한 저서이다. 사실 이 책 또한 융이 자발적으로 출간을 기획한 것이 아니다. 1959년 봄, 영국방송공사의 한 프로그램에 출연한 융은 존 프리먼(John Freeman)과 대담을 나누었다. 이것을 본 알더스 출판사의 전무인 울프강 포지스(Wolfgang Forges)는 융의 사상에 매료됐다. 포지스는 프리먼에게 융을 설득하여 그의 기본적인 사상을 책으로 써서 비전문가인 일반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흥미를 갖도록 해보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것은 융의 학문을 대중화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는데 이미 그의 나이 84세의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설득된 융은 『인간과 상징』을 출간하는데 두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는 단독 집필이 아니라 융이 자신의 여러 방법과 가르침을 계승시키려고 했던 가장 가까운 제자들과 함께 공동으로 집필해야 하고, 둘째는 그 일을 조정하고 저자들과 발행인 사이에 발생할지도 모르는 문제들의 해결을 프리먼이 맡아달라는 조건이었다. 첫 번째 조건에 따라 『인간과 상징』의 서문은 존 프리먼이, ‘제1장 무의식으로 가는 길’은 융이 그리고 나머지 제2장부터 제5장과 결론은 융의 제자들이 저술했다.

 

기호와 상징의 의미

 사람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상징이 담긴 말이나 글을 사용한다. 또한 유엔(UN), 유니세프(UNICEF)와 같은 약어나 시각적 이미지로 된 그림을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를 일종의 기호(sign)라고 한다. 기호는 객관적이지만 상징은 그렇지 않다. 기호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의미를 갖지만 상징은 어떤 특수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상징은 어떤 막연한 것, 미지의 것,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을 포함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불교의 상징인 ‘卍(만)’을 불교 신자가 본다면 부처님을 상징하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경건한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다. 반면 유태인에게는 과거 나치 정권 시절의 유태인 학살을 떠올리며 분노의 감정을 일으킬 수도 있다(실제로 나치 문양은 조금 다르다). 또한 동양에서는 숫자 4를 불길한 의미로 보지만 서양에서는 숫자 13이 불길한 것을 상징한다. 숫자를 기호로 보면 숫자로서의 의미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지만 상징적인 의미는 개인마다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 것이다.

 

꿈의 중요성

 우리는 깨어있는 동안 수많은 상징들을 접하고 의미를 해석하며 살아간다. 또한 잠을 자고 있는 무의식중에도 꿈은 종종 인간에게 어떤 상징을 안겨줄 때가 있다. 대부분 꿈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길 때가 많은데, 융은 꿈을 꾸는 행위는 어떤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그 자체의 중요한 의의가 있다고 보았다. 꿈은 개인이 알아차리든 그렇지 못하든 꿈을 꾼 당사자에게 상징적 의미를 제공한다는 것이다. 이 생각으로 인해 융의 사상은 하나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꿈은 무의식이 말하고자 하는 어떤 특수한 것을 나타낸 것이라고 그는 확신했다. 이를테면 현실에서 놓친 것들을 꿈이 알려준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융은 한 개인을 이해할 때 깨어있는 상태에서 이야기 하는 것보다 그 사람의 꿈이 더 의미 있는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이야기를 할 때에는 시작과 전개 그리고 결론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꿈에서는 그렇지 않다. 꿈의 전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할 때도 있기 때문에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꿈은 의식적인 이야기보다 꾸밈이 없으며 보다 더 ‘원형적’이다. 때문에 꿈을 단서로 한 접근은 꿈을 꾼 사람에게 더욱 더 직관적이고 정확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꿈의 상징은 주관적이고 개별적이기 때문에,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면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사하여야한다. 이에 융은 꿈을 다루는 데 기본이 되는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꿈은 사실로 취급되어야 하고, 꿈이 어떻든 간에 당사자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 이외에 어떠한 억측도 미리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 둘째, 꿈은 무의식의 고유한 표현이라는 것이다.

 

무의식의 표현 ‘꿈’, 자아의 신화로 가는 단서

 20세기 심리학의 가장 위대한 업적 중 하나는 바로 무의식의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융이 창시한 분석심리학에서 의식은 감각, 사고, 감정, 직관의 4가지 기능으로 나뉜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 사물을 인지하고, 사고(思考)를 통해 사물을 알 수 있다. 또한 감정을 느끼며 좋고, 싫음을 구별하고 직관을 통해 선택을 한다. 이 기능에 의하여 인간은 자신의 경험을 이해하고 동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내가 생각하는 나(의식)’와 ‘현실의 나’는 다르다는 것을 누구나 경험하게 된다. 심리학자들은 그 차이를 무의식에 있다고 보았는데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봤지만 융은 무의식이 자아의 신화를 이루기 위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고 보았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온다. “어쨌든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세상 만물은 모두 한가지라네.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평범한 양치기였던 주인공 산티아고는 동일한 꿈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꾸게 되고 꿈을 좇아 자아의 신화를 이루기로 결심한다. 그 과정 속에서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간다. 이 이야기는 융의 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의 진화

 융은 꿈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보상 효과로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이 가정은 꿈이 정상적인 정신현상이며 무의식의 여러 반응이나 자연발생적인 충동을 의식에 전달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인간의 육체가 DNA 속에 진화의 오랜 역사를 지닌 것처럼 마음 역시 그러한 역사를 지닌 것으로 본다. 원시인에서 현대의 문명인으로 진화하면서 신체뿐만 아니라 마음도 진화한다는 것이다. 과거 원시인이 행동을 취할 때마다 공포, 미신, 또는 보이지 않는 다른 장애로 인해 방해를 받았다면 현대인은 아무런 장애를 받지 않고도 생각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현대인은 모든 합리성과 효율성을 가지고도, 자신이 조절할 수 없는 ‘힘’에 사로잡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현대인은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지만 오히려 이 생각으로 인해 내적 성찰의 결핍이라는 놀라운 대가를 치르고 있다. 인간에게 영향을 주는 신들과 정령들은 결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단지 초조와 막연한 불안, 정신분열 등의 새로운 명칭들을 얻었을 뿐이다. 그리고 약물, 술, 담배, 음식에 대한 그칠 줄 모르는 욕구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더 많은 종류의 노이로제를 부여하여 현대인들을 지치도록 끌고 다니게 되었다.

나다운 삶을 살아라

 융은 “우울증과 신경증은 본인에게 맞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고 알려주는 신호이다. 우울증은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현대 과학의 발전은 놀라울 정도로 인간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있다. 그러나 겉으로는 살기 좋아졌는지 몰라도 속으로는 스트레스, 우울증, 신경증 등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현대인들이 점점 자기 자신다움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문명화 된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며 수많은 업적을 이루었지만 정작 자기 자신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는 무지하다. 자신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융은 이 책에서 “우리가 객관적인 성질을 찾거나 발견하는 대신 자연과 우주를 탐색하려고 할 때, 인간은 자기 자신과 만나게 된다”라고 말한다. 우리는 현대 사회에서 수많은 것을 보고 듣고 느끼며 살아간다. 외부의 수많은 정보들에 현혹되어 정작 자신의 내면은 돌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깨어있는 시간 동안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시간은 많아도 정작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은 아마도 자연과 더불어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하며 나답게 사는 사람일 것이다.
끝으로 인간은 눈부신 문명을 이루어냈지만, 정작 우리는 진정으로 자신을 위한 삶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있다. 무의식이 발견된 지 100년이 지난 지금, 앞으로 인류에게 주어진 과업은 외부 세계의 개발이 아닌 내적 성찰을 통한 정신의 성숙화일 것이다.

김일권 | ivandurak@khu.ac.kr

그림 설명 및 출처

– 그림1: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 1875~1961)(출처: www.newlyswissed.com)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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