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호 책지성: 이명호 외, 『유토피아의 귀환: 폐허의 시대, 희망의 흔적을 찾아서』] 오늘, 유토피아를 상상한다는 것

‘불가능한 것’을 상상한다는 것의 가치

“현실주의자가 되어라. 그리고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라” 모순적으로 들리는 이 문구는 1968년 5월 프랑스 파리의 학생들이 내세운 슬로건 중 하나였다. 학생들은 왜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현실주의자가 될 것을 요구했을까?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단 말인가? 68혁명은 당시 프랑스에 만연했던 권위주의·자본주의적 폐해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되었고, 단순한 정치변화 뿐 아니라 계급·성별·인종 불평등에 대한 인식으로 확대되며 국제적 반전운동, 반인종차별주의, 여성해방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자본주의와 그 논리를 계승한 신자유주의는 자신들의 체제 바깥을 사유할 ‘대안은 없다!(There is No Alternative!, TNA)’고 단언하였지만, 파리의 학생들은 ‘불가능한 것’이라고 비웃던 대안이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잉그리트 길혀홀타이(Ingrid Gilcher-Holtey)는 『68혁명, 세계를 뒤흔든 상상력』(1968 Eine zeitreise, 2008)에서 부패한 지배 권력과 사회에 대한 집단행동이었던 68혁명의 원동력을’다른 세상을 꿈꾼 상상력’ 이라고 분석한다. 착취적 자본주의 체제와 권위주의적 지배체제 너머를 상상한 힘, 바로 그 상상력이 변화의 원천이었다. 오늘보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상상은 변화를 추동하는 힘이었다.

 

 

오늘날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한다는 것

68혁명으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의 세계는 어떠한가? 양차 대전과 홀로코스트,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 자원고갈, 국제분쟁과 난민 문제는 사람들에게 오늘보다 ‘더 나은 미래’가 아니라 오히려 ‘더 암울한 미래’를 그리게 한다. 희망/행복보다 종말/재난이 키워드로 떠오르는 21세기의 세계는 이제 더 이상 상상할 미래도, 대안도, 변화의 가능성도, 그 변화를 추동할 상상력마저 모두 소멸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변화와 상상력의 쇠락 속에서 대중서로 출간된 『유토피아의 귀환』(2017)은 68혁명의 대담한 슬로건처럼, 오늘날 더 이상 불가능해 보이는 ‘유토피아 상상’을 통해 ‘유토피아의 귀환’을 주장하고 있다. 이 책은 20명의 다양한 문학권별 전공자가 동서양의 유토피아 문학을 비교문화적·문화번역적 관점에서 공동 저술했다. ①사유재산과 계급 불평등 ②과학과 기술문명 ③무위와 자연 ④감시와 자유 ⑤몸과 욕망 ⑥폭력과 공존이라는 여섯 개의 큰 주제로 엮인 이 책에서 개진되는 유토피아에 대한 이해와 해석은 저자마다, 그리고 그들이 분석하는 문학작품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유토피아의 상상 가능성을 희망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유토피아는 토마스 모어(Thomas More)가 자신의 저서 『유토피아』(Utopia, 1516)에서 대안사회를 명명하기 위해 창조한 어휘이자, 개념이며 서사 장르이다. 모어는 유토피아(utopia)를 ‘더 좋은 곳’을 뜻하는 에우토피아(eu-topia)와’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오우토피아(ou-topia)의 이중적 의미로 사용하였다. 유토피아는 탄생의 순간부터 가능성과 불가능성을 모두 내포하고 있었다. 『유토피아의 귀환』은 불가능성으로 점철되어 있는 오늘날의 유토피아적 사유와 상상을 복구함으로써,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희망한다. 이때 유토피아의 가능성은 미래사회에 대한 완벽한 ‘프로그램’이나 ‘청사진’, ‘목표’제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방법론’으로 존재한다. ‘목표’가 아니라 ‘방법론’으로 유토피아를 재사유할 때, 유토피아는 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오염 속에서 구출될 수 있고 전체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으면서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토피아의 귀환』에서 유토피아적 상상은 현실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러나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에 대한 상상으로, 그리하여 ‘주어진 현실’이 전부가 아니라는 인식을 개방함으로써 현실을 ‘재사유’하고 ‘재배치’하게 만드는 역동적 힘을 의미한다(p.7).

오늘날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가 아닐까? 사회가 은폐하고 있는 수많은 모순과 문제 앞에서 좌절하는 것이 아니라 끈질기게 추적해, 대안을 상상해 보는 것 말이다. 한 사람의 꿈은 공상과 망상으로 치부될 수 있지만, ‘사회적 꿈(social dream)’은 실천적 행동이나 제도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다. 비록 토머스 모어의 작품에서 유토피아는 다른 국가들로부터 철저하게 고립된 외딴 섬으로 등장하지만, 유토피아 문학 장르는 ‘사회적 꿈’을 담아낸다는 점에서 그 어느 장르보다도 더욱 현실적인 투쟁의 장르라고 볼 수 있다. 『유토피아의 귀환』은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고, 만들고 또한 검토하고자 했던 세계 문화권별 유토피아 문학작품을 분석함으로써 각각의 사회가 당면했던 문제를 살펴보고, 그 문제를 돌파하기 위한 시대적 고뇌를 추적하고 있다. 그 고뇌를 추적하다 보면 불가능 속에서 현실적 저항을 실천했던 68혁명의 학생들처럼, 사회 변화의 역동적 힘을 감지하게 된다. 희망보다는 절망의 힘이 더욱 크게 느껴지는 오늘날, 이 폐허의 시대에 유토피아 문학을 통해 소멸에 처한 유토피아 상상을 복구한다는 것은 결국 폐허의 잔해 속에 파묻혀 있는 희망을 발굴하는 작업일 것이다.

 

▲ 아브라함 오르텔리우스(Abraham Ortelius)의 지도

 

현재에 의해 ‘식민화되지 않은 미래’를 위하여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1516)가 그러한 것처럼, 많은 유토피아 문학작품은 여행 서사의 구조를 취하고 있다. 모어의 『유토피아』, 어슐러 르 귄(Ursula Le Guin)의 『빼앗긴 자들』(The Dispossessed, 1974)처럼 주인공이 동시대에 존재하는 다른 공간을 여행하는 구조를 취하기도 하고, 에드워드 벨러미(Edward Bellamy)의 『뒤돌아보며: 2000년에 1887년을』(Looking Backward: 2000 to 1887, 1888)과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의 『유토피아에서 온 소식』(News from Nowhere, 1889)처럼 과거를 살아가던 주인공이 갑자기 미래 사회를 경험하는 시간여행의 구조를 취하기도 한다. 이와 달리 리카르도 피글리아(Ricardo Piglia)의 『인공호흡』(Respiracion artificia, 1980)은 20세기를 살아가는 주인공이 19세기에 쓰인 편지를 읽으며 경험하는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그려내고 있다. 이때 편지는 다른 시간들 사이에 대화의 틈을 열어놓는다(p.304). 유토피아 문학작품이 여행서사를 취하는 방식과 양상은 상이하지만, 공통적으로 기존사회와 유토피아로 간주되는 사회 사이에 일종의 ‘틈’을 만들고 있다. 이때’틈’이란 시공간적인 거리를 의미한다.

기존 사회와 시공간적으로 ‘틈’이 있는 유토피아는 기존 사회의 예측가능성 너머에 있다. ‘틈’ 은 기존 사회의 과거-현재-미래라는 일직선의 시간관이나 진보관으로 파악할 수 없는 어긋남이기 때문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 1992)에서 인류 역사를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인류의 통일된 행보로 해석하고, 그 끝에는 정치적·경제적 자유주의 이념만이 남을 것이라 주장한다. 후쿠야마에게 자유민주주의는 완성된 이념이자 목표로 인류 역사의 최후의 종착지에 이미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시공간에 ‘틈’이 생긴다는 것은 과거-현재-미래가 직선적 구조가 아님을, 그렇기 때문에 ‘다가올 미래’는 현재에 의해 예측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현재의 문제와 모순을 외면한 채 현재를 고집한다면,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는 결국 현재에 의해 식민화 된, 즉 변화 없이 현재에 의해 그 가능성이 단절된 식민화된 미래일 것이다. 그러나 유토피아적 상상을 통해 시공간에 ‘틈’을 만든다면 시간관은 어그러지게 된다. 『유토피아의 귀환』은 바로 이 시간의 어긋남 속에서, 이미 도래한 것이 아니라 유토피아적 상상과 요구에 따라 변화할 수 있는 역동적 잠재성을 지닌 미래의 예측불가능성이 갖는 가치를 재조명하고 있다. 유토피아적 상상은 현재의 미래 식민화를 방해한다.

 

 

마음의 지도로서의 유토피아

영화 <캐리비안의 해적>에 등장하는 잭 스패로우 선장의 나침반은 북극을 향하지 않는다. 잭 선장이 마음으로 원하는 곳, 그가 진정으로 도달하고 싶어 하는 곳을 향한다. 그 곳은 맥주가 있는 술집이고, 자신이 적진에 버리고 온 동료가 있는 곳이며, 영원한 젊음을 선사하는 생명의 샘이기도 하다. 나침판 그 자체가 잭 선장에게는 ‘마음의 지도’이다. 유토피아적 사유와 상상 역시 마음의 지도이다. 『유토피아의 귀환』은 세계 문화권의 유토피아 문학이 그 시대를 살아갔던 사람들이 고민했던 사회적, 정치적, 문화적, 윤리적, 도덕적 문제를 반영하고 있는“더 나은 존재양식과 삶의 방식을 향한 욕망의 표현”(p.8)임을 일깨워준다.

루스 레비타스(Ruth Levitas)가 유토피아를 ‘인류 문화 전반에 퍼져 있는 존재 양식이자 삶의방식’이라고 해석한 것처럼 유토피아는 인류 모두의 마음에 있는 지도이다. 실제로 유토피아적 사유와 상상력이 견인하는 사회 변화의 잠재성은 비단 서구권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 라틴아메리카, 러시아 등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이후 약 500년 동안 서구, 그 중에서도 영미권 학계가 학문적으로 유토피아 담론을 주도해 온 점은 부인하기 어려운 안타까운 현실이다. 『유토피아의 귀환』은 학문의 서구 편향성을 극복하려고 시도하면서 영미권만 보이도록 접혀있던 지도가 세계 지도의 전부가 아님을 보여준다. 접혀있던 지도를 펼칠 때, 우리는 비로소 인류 모두의 마음의 지도인 유토피아의 세계 문학적 지도를 온전히 만나게 된다. 『유토피아의 귀환』의 출판 의의는 바로 이 점에 있다.

 

김지은 / 경희대학교 영미어문학과 박사과정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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