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호 인문학술: 플럭서스] 플럭서스와 백남준

세계적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설명할 때마다 빼놓지 않고 언급되는 미술사조가 있다. 바로 플럭서스(Fluxus)이다. 1960년대 초반 독일을 중심으로 국제적 전위예술 운동인 플럭서스는 백남준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핵심적인 키워드다. 이에 본보에서는 플럭서스의 발흥과 예술전략, 백남준의 플럭서스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뉴욕 보니노화랑(Galeria Bonino)에서 열린 백남준의 전시 오프닝에 참석한 오노 요코와 존 레논, 슈야 아베, 1971 ⓒ The Estate of Nam June Paik 

플럭서스의 발흥

근대의 제도적 예술행위에서 예술가는 예술적 가치를 지닌 물적 대상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수용자에 의해 감상될 뿐만 아니라 자립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되어 거래되고 소유되었다. 노동자의 노동 생산물이 상품화되어 노동자로부터 분리되듯이 예술 생산물이 상품화되어 예술가로부터 분리됨으로써 예술창작 과정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소외된 활동이 된다. 요컨대 예술이 삶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물질적 작품뿐만 아니라 정신적 동기에서도 삶이 아닌 예술 자신을 위한 것으로 되었다. 생산물인 작품이 생산자로부터 그리고 예술이 삶으로부터 멀어지는 소외과정의 반복을 통해 예술은 근대성 속에서 예술가라는 신분을 창출하고 예술대상의 창조라는 몫을 분배받아 왔으며, 이로써 시민사회의 한 분업적 영역으로 분명한 자리를 차지해 왔다. 이것은, 근대 이전의 장인–예술체제와는 달리 예술가–예술체제라고 부를 수 있는 하나의 역사적 예술체제의 성립을 보여준다. 이 근대적 예술체제를 해체하고 예술을 삶과 재통합시킬 방법을 모색하고 실험하며 실천하려는 의식적 예술 경향으로 출현한 것이 플럭서스(Fluxus)이다.

물론 이러한 모색과 실험이 20세기 후반에, 플럭서스에 의해 처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것은 20세기 초반에 이미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에 의해 먼저 시도되었고, 20세기 후반에는 프랑스 중심의 국제상황주의자(Situationist International) 운동에 의해서도 적극적으로 전개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플럭서스는 20세기의 급진적 예술정신의 일부이다. 물론 20세기 초반의 급진적 예술운동과 20세기 후반의 급진적 예술운동 사이에는 대상과 지향에서 일정한 차이가 있다. 미래주의, 다다이즘, 초현실주의가 고전주의에서 사실주의로 이어져 온 예술가–예술체제에 대한 항의, 거부, 비판, 파괴에 주력한 것에 비해 , 플럭서스와 상황주의자(Situationist)는 이 경향을 계승하면서도 새로운 감성적 예술체제의 실험, 구축, 유희에 주력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20세기의 예술 흐름은 삶과 분리된 예술가들이 재현적 방식으로 삶과 관계하는 예술가–예술체제에 맞서, 예술과 삶을 통일시키려는 강한 욕구에 의해 이끌린다. 가령 미래주의는 재현예술에서 ‘재현의 대상으로 설정되는 실재’(오브제)를 이미 죽은 것, 과거의 것으로 보아 기각하면서 오히려 직관을 통해 ‘지속으로서의 시간’(베르그송)과 관계하고자 했다. 또 다다이즘은 이러한 의미에서의 오브제를 설정하는 재현메커니즘을 의식적으로 파괴하려는 아나키즘적 충동을 표출했다. 초현실주의는 그러한 오브제(화)를 넘어설 힘을 상상력이나 프로이트적 무의식 혹은 잠재의식에서 구했다. 국제상황주의자는 “오브제는 객관적 실재가 아니라 활동과 실천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라는 카를 마르크스(Karl Marx)적 이념에 따라, 기존의 상황을 파열할 새로운 상황을 창조하는 것을 예술의 역할로 설정했다.

1950년대 후반에 발흥하기 시작한 플럭서스 예술운동은 오브제를 우연의 보편적 흐름과 탈경계적 변화로 해소시켰다. 어원적으로 Fluxus는 ‘변동’을 의미하는 라틴어로, ‘인간의 내부에 잠재해 있는 힘과 강도’, ‘ 항상 유동적으로 움직이며 끊임없이 소용돌이치고 있는 힘’을 가리킨다. 플럭서스 예술운동은 서구의 물리학이나 전자기술을 동양의 선(불교)과 연기사상, 샤머니즘과 결합시켰다. 또 플럭서스는 베르그송, 아나키즘, 프로이트, 마르크스, 선불교 등의 소수적 전용을 통해 예술을 더 이상 오브제 재현이나 오브제 구성의 활동으로 보지 않고 끊임없는 실험, 발명, 관계, 창조, 유희의 과정으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이 관점에서 예술은 더 이상 대상 의존적이거나 대상 생산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 구성적인 마음의 움직임과 마음의 네트워크로 이해되었다.

플럭서스의 예술전략

플럭서스의 예술운동적 집단화는 1960년대 초에 이루어진다. 1963년에 조지 마키우나스(George Maciunas)에 의해 기초된 플럭서스 선언문은 플럭서스의 예술전략을 압축한다. 이 선언문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비판, 민중과 결합하려는 혁명적 의지, 그리고 ‘문화적 · 사회적 · 정치적’ 혁명가들을 연결시키려는 조직 대안 위에서 다음 세 가지를 제안한다. 우선, 지식인적이고 전문적이며 상업화된 문화는 부르주아적 질병으로 간주되어 제거되어야 한다. 둘째, 이것을 대체할 것으로 촉구되는 것은 비평가, 딜레탕트, 전문가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이해될 수 있는 비예술실재(NON ART REALITY)이다. 셋째로, 문화적 · 사회적 · 정치적 혁명가들의 핵심집단을 통일된 전선과 행동으로 융합해야 한다.

이 선언이 당시의 플럭서스 예술가들을 실제로 융합시키지는 못했다. 이들은 오히려 느슨하면서 공감적인 경향으로 존재하기를 원했고, 일사불란한 조직보다 느슨한 네트워크로 움직이기를 더 좋아했다. 마키우나스는 2년 뒤에 <예술 및 플럭서스 예술오락에 관한 선언문>을 다시 작성하는데, 여기서 그는 플럭서스 예술가들의 반응과 분위기를 고려하여 융합적 조직 대안을 제외하는 대신 상업문화에 대한 비판과 비예술실재에 대한 관점을 좀 더 구체화한다.

마키우나스의 관점에 따르면 근대의 예술가–예술체제는 예술가라는 존재가 불가피할 뿐만 아니라 예술 활동은 예술가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배타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예술가에 대한 청중들의 의존성을 강화하는 과정이다. 이 체제에서 예술가들은 작품을 복잡성 · 가식성 · 심오함 · 진지함 · 지적 · 기술적 · 세련성 등을 갖는 상품으로 만드는 한편, 그것들에 엘리트만이 접근하고 소유할 수 있는 희귀한 것이라는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예술의 가격을 높이는 연극적 행위를 반복한다.

처음 제시된 선언문에서 ‘비예술실재’로 불렀던 것을 새로운 선언문에서는 ‘플럭서스 예술오락’으로 명명한다. 마키우나스는 사회에서 예술가의 비전문적 지위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예술일 수 있으며, 직업적 예술가만이 아니라 누구든지 예술오락을 할 수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예술은 단순하고 즐겁고 비가식적이며, 하찮음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숙련이나 예행연습을 필요로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상품가치나 제도가치도 갖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플럭서스 예술오락은 모든 사람에 의해 무제한적으로 대량생산되어야 한다. 또 이것은 단순 구조적이고 비연극적인 것으로서 ‘농담, 어린아이들의 놀이, 그리고 뒤샹의 융합’을 필요로 한다.

1965년의 선언문에 따르면 예술가라는 사회적 범주는 인위적으로 발생되고 또 유지되고 있으며 이러한 예술체제를 지탱하는 것은 가치, 이윤, 권력의 필요이다. 예술가는 지배종속 관계를 생산하는 기생적이고 배타적인 집단에 불과하다. 플럭서스 예술전략은 청중의 자율성을 입증하는 것인데 그것은 모든 것이 예술일 수 있고, 누구든지 예술가일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가능해진다. 단순, 비가식, 하찮은 것, 자연적 사건, 게임, 노래, 놀이, 농담, 기성품 등이 대안적인 것으로 제시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백남준, 기마민족(Equestrian people), 1995년. 이 작품을 보면 과거 영토시대에는 가장 빠른 말을 가진 나라 예컨대 몽골 같은 나라가 세계를 지배했지만 탈영토시대에는 수송, 유통, 인터넷 등 정보통신과 소통기술이 가장 빠른 나라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메시지가 담겨있다. 기마민족인 한국이 정보시대에 세계로 크게 뻗어나갈 거라는 기대가 포함되어 있다. ⓒ아트선재  

백남준의 플럭서스

대부호의 아들인 백남준이 이 혁명적 예술경향과 결합한 것은 1958~1960년 사이 독일에서 존 케이지(John Cage), 요셉 보이스(Joseph Beuys), 조지 마키우나스를 만나면서이다. 플럭서스 시기(1962~1978) 백남준의 예술실천은 근대에서 탈근대로의 이행기와 겹친다. 이 시기에 그는 기존의 예술개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며, 예술 활동이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씨름한다. 중요한 것은 이 시기의 한 가운데에 ‘68혁명’이 놓여 있다는 것이다. 백남준에게 68혁명은 문화정치적이라기보다 기술정치적이다. 그는 1920년의 러시아 혁명이 전기화(電氣化)를 의미한다면, 1960년대의 혁명은 전자화(電子化)를 의미한다고 단언한다. 백남준에게 전기시대에서 전자시대로의 전환은 ‘강력한 전류와 관련된 기술을 연구하는 공학’에서 ‘약한 전류와 관련된 기술을 이용한 제어와 통신’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그는 이러한 전환을 전자음악, 전자TV, 비디오아트로 맞이할 뿐만 아니라 이들을 종합하여 인터미디어아트, 총체예술로 발전시키려 시도한다. 이러한 백남준의 예술실천은 플럭서스의 조직적 예술실천의 일환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백남준의 특이함도 있다. 마키우나스의 플럭서스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비판, 민중과의 결합, 혁명가들의 조직적 연대라는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적 사유 구도에 비교적 충실했다면 백남준은 플럭서스를 상당한 정도의 일관성을 갖고 매체적 · 기술적 · 문화적 실험을 중심으로 파악한다. 그는 1963년 독일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열린 변형된 TV수상기들의 첫 전시 <음악의 전시-전자TV Exposition of Music-Electronic Television>를 요약하면서 무엇보다도 그것들의 ‘비결정성과 변동성’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비결정성과 변동성은 ‘왜곡된 영상이미지’, ‘ TV의 수직수평 영상단위에서의 변주’, ‘ 음향발생기, 녹음기, 라디오에서 보내진 전파들이 만들어 낸 리듬의 다양성’ 등을 의미한다. 이것을 달성하기 위해 백남준은 노버트 위너(Nobert Wiener)의 사이버네틱,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의 미디어이론을 탐구했으며 전자이론과 주사선을 기술적으로 깊이 연구했다.

백남준이 변동성과 비결정성의 개념을 받아들이고 확장하는 데에는 서구의 과학과 철학 외에 기마민족인 몽골족의 유목주의(<기마민족>, <징기스칸의 귀환>), 그리고 타타르족, 퉁구스족의 민중전통인 샤머니즘(갓 도살된 소머리를 내걸었던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도 한몫한다. 백남준의 관점에서 기마민족인 몽골 만주인들은 유목시대에 교통수단인 말(馬)과 표현수단인 문법이라는 중요한 소통방식 두 가지를 한국인에게 전해준 인종이다. 플럭서스를 알기 전인 17세의 청년기에 마르크스와 쇤베르크를 결합하려고 했던 백남준은 플럭서스 운동의 과정에서 점차 서구 제국주의와 몽골제국을 결합시키려는 기획을 발전시킨다. 서구 제국주의가 전자를 비롯한 신기술을 의미한다면 몽골과 칭기즈칸은 그에게 원거리 이동, 빠른 속도, 경계해체 등을 의미했다.

만약 백남준이 이 두 경향의 결합에만 머물렀다면 그의 미학은 제국주의적 틀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몽골제국이 부와 보물을 축적하는 제국이 아니라 전투에서 얻은 물자를 널리 분배하여 다시 상업적 유통망으로 흘러 들어가게 하는 제국이며, 귀족적 특권과 출생에 기초한 봉건제를 부수고 개인의 장점과 충성심, 성취에 기초한 새롭고 독특한 체제였다고 해도 그렇다. 백남준에게는 서구와 몽골, 두 제국의 확장 경향을 제어하는 경향이 있다. 선불교가 그것이다. 백남준에게 선은 무엇보다도 상대적인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체험하는 것, 현재를 유토피아로서 체험하는 것, 부족함 가운데 만족할 수 있는 정신을 의미한다. 9년 동안 화장실도 가지 않고 좌
선과 명상을 한 달마승, 다리 없는 그가 수행한 무선소통이야 말로 제국주의적 확장 경향을 제어하는 선의 정신이다.

백남준에게 선은 서구와 몽골의 이동과 속도를 제어하면서 소통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것은 가난 속에서도 유토피아를 읽고, 이동하지 않고도 소통하는 능력이다. 선을 통해서 백남준은 아방가르드를 느림과 결합할 수 있었고 기술주의에 함몰하지 않으면서 기술의 인간화를, 기술에 대항하는 기술을 자신의 미학적 과제로 설정할 수 있었다. 그것은 선의 정신을 정보 전달량이 적어 수신자의 참여도와 수신자에 의한 완성도를 높일 수 있고 비결정론적 변동의 조건이 될 수 있는, 노버트 위너의 ‘개연성이 높은 메시지’, 마샬 맥루한의 ‘차가운 매체’와 결합시키는 것으로 나타난다. 홍콩에서 일본으로, 다시 독일과 미국으로 나가면서 서구를 향해 치닫던 아시아인 백남준이 서구 출신의 요셉 보이스를 통해 샤머니즘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케이지를 통해 선불교의 의미를 깨닫는 것은 아이러니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야말로 예술정신의 국제적 소용돌이였고 ‘변화에 대한 사랑’의 연결체였던 플럭서스의 힘과 효과였다.

플럭서스의 영향

우리는 플럭서스 예술의 새로움을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예술가에게 주어진 자리와 예술경계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플럭서스는 국경을 넘는 예술가 조직으로 활동했으며, 서양과 동양의 구분을 넘는 가치들을 실현하려고 했다. 또,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선불교나 샤머니즘과 같은 고대적 가치를 첨단의 현대 기술 및 과학지식과 결합했다. 또한 음악, 미술, 조각 등 매체, 장르, 형식 등의 경직된 틀을 거부하면서 그것들을 뒤섞었으며 화음과 잡음의 구별도 깨뜨리고 뒤섞었다. 이들은 이 혼성화에서 우연의 역할을 매우 중시했으며, 미학과 예술의 경계조차도 지우는 것으로 나아갔는데, 예술이 점점 예술에 대한
사유 활동인 개념미술로 되어 간 것이 그 결과다.

둘째, 플럭서스 예술가들은 예술가라는 권위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예술품의 소유자로 남아 있고자 하지도 않았다. 이들의 예술이 갖는 악보성은 그것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플럭서스 예술은 누가 연주, 상연, 전시하는가에 상관하지 않을 수 있는 일종의 악보로서의 예술을 지향했고 어떻게 연주, 상연, 전시되든 그 결과를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고자 했다. 이를 위해 플럭서스 예술작품은 본보기 적이고 단순하고 함축적이면서 놀이적인 성격을 띠었다.

셋째, 플럭서스 예술은 비물질적인 것의 예술성을 입증했다. 플럭서스 예술행위는 특정하게 고정된 장소를 차지하는 공간적 성격의 활동으로 이해되기보다 끊임없이 시간 속에서 흐르고 변화하는 시간적 성격의 활동으로 이해되었다. 그 활동은 매 순간 특이한 다름을 구현했다. 이리하여 플럭서스는 누구나가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누구나가 그것의 생산과 창조에 참여할 수 있는 공연적 소통예술의 방향을 열어놓았다.

이렇게 플럭서스는 기존의 예술가–예술 체제가 재생산하는 보고, 듣고, 말하는 방식, 즉 ‘감각적인 것’(le sensible)의 특정한 분배양식에 도전하면서 감각적인 것의 민주화를 위한 집단적 노력을 활성화했다. 하지만 이것이 예술가–예술체제를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첫째로 플럭서스 예술가들의 비판과 구성은 예술가 제도의 경계를 깨뜨리는 데 실패했다. 이들이 전문예술가를 비판하고 예술가-예술체제를 비판하면서도 전문적 예술가로 남아 있었던 것이 그 원인이다. 그 결과 예술현상 및 예술제도에 대한 비판은 끊임없이 예술 내부로 귀환하고 삶 속으로 풀려나가지 못했다.

둘째, 플럭서스는 인위적 예술을 죽은 예술로서 올바르게 비판하지만, 그것이 예술가적 정체성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비판이 낡은 전통적 예술개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플럭서스는 산 예술, 반예술, 비예술실재를 촉진하려 했지만 비예술가인 다중들은 그러한 예술들의 수용자로만 남아 있었다. 다중들이 바로 그 산 예술과 비예술실재의 일상적 생산자이고 진정한 예술계는 바로 다중의 삶 현장 자체이며 매 순간의 생명 활동이 바로 예술이라는 점에 대한 인정은 유보된다.

셋째, 플럭서스는 다중을 예술 참여자로 만들고자 시도했지만, 그 참여는 예술가가 만든 프로그램 속으로의 참여를 넘어서지 않았다. 플럭서스 예술 프로그램 속으로의 다중의 참여는 삶–예술의 참여가 아니라 삶으로부터 소외된 전문예술의 참여로 나타났다. 예술가가 다중의 실제적 삶–예술, 예술–삶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다중이 예술가의 인위적 예술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다.

넷째, 플럭서스의 예술프로그램은 다중 스스로가 직접적 삶에서 집단적으로 만들어내는 감각, 사유, 행위, 소통의 예술 오락들 외부에서 가동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다중을 단순한 것만을 이해하고 다룰 줄 아는 존재로 오락, 농담, 노래와 같은 쉬운 형식들만을 소화할 수 있는 존재로 가정하곤 한다. 다중이 이렇게 쉬운 형식들의 창조자이자 향유자이면서 동시에 전문예술가들이 만들 전문예술품들보다도 몇 배나 복잡한 역사예술, 다중예술, 삶–예술의 창조자이자 향유자라는 사실은 지각되지 못한다.

플럭서스 예술이 다중의 삶과 결합되지 못하고 자본주의적 산업의 일부로 편입된 것은 68혁명의 충격이 소진되고 신자유주의가 그것을 축적의 동력으로 흡수하는 과정에서였다. 자본이 플럭서스의 예술혁명을 상품혁명의 정신으로 쉽게 흡수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자본은, 한편에서는 전문 예술을 비판하면서 다중과 접근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중의 삶예술–예술삶의 잠재력 앞에서 물러나 다중을 예술의 대상이나 소비자로 위치지우는 플럭서스 예술정신의 이중성과 동요를 이용한다. 실제로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에서 플럭서스는 일상 속에서 부단히 시뮬레이트되는 예술적 원천이다. 산업의 비물질화와 생산모델의 예술화는 플럭서스의 예술정신을 새로운 자본주의의 생산동력이자 생산기법으로 전유한 것의 결과이다. 플럭서스는 우리 시대의 지배적 예술경향이자 산업정신으로 등록되어 신자유주의적 체제의 동력학으로 기능한다. 플럭서스가 문제인 것은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다.

조 정 환 / 다중지성의 정원, 도서출판 갈무리 대표

작성자: khugnews

이글 공유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