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호 책지성: 윤원화, 『문서는 시간을 재/생산할 수 있는가』] 너머의 시간을 향해

 

서문과 문서

 

어릴 적 서문 읽는 시간을 배웠다. 그 시간은 저자의 세계에 본격적으로 가닿기 위한 진입로 같았다. 그 시간을 통과하면 앎이라는 보물을 숨겨놓은 우거진 숲을 거닐 에너지가 자동적으로 충전돼 있는 줄 알았다. 하나 나이가 들었고 요령도 늘었다. 나이가 들었고 요령도 는 내 주위의 어른들이 흔히 하는 농이 느닷없이 진지하게 다가왔다. ‘서문序文을 읽었으니 다 읽은 셈이군.’ 어쩌면 이는 서문을 읽는 시간에 대한 가장 예리한 해석일지 모른다. 서문은 전부이면서도 전부가 아닌 것이다. 어찌되었든 서문은 전부에 걸쳐 있다. 저자의 의지에 따라 서문의 전개와 모습은 달라지나 대개 서문 안에서 저자는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살면서 가장 공을 들인 시간을 거쳐 지금에 다다랐다고 토로한다. 물론 “그 순간”의 중요성은 다음 책에 놓일 서문의 시간 속에서 쪼그라들지만. 저자는 서문의 시간 안에 그 순간만큼은 가장 의욕 넘치고 세심한 글말을 집어넣는다. 소탈함과 빈약함의 제스처를 취하는 서문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는 저자 자신이 앞으로 펼칠 야심의 집대성이다. 덕분에 나는 충만하다.  다 읽은 것 같다.

만약 서문이 개관의 성격을 지녔다면, 서문은 다른 몸통의 글말을 열어젖히기 위한 입문入門이 아니라, 서문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폐문閉門이다. 닫혀 있으나 이로 인해 서문은 사유의 자유를 만끽할 시간을 선사한다.

서문을 거꾸로 해보자(농으로 시작하지만 농으로만 끝나진 않을 것이다). 문서文書. 어릴 적 문서 읽는 시간을 지켜보았다. 일요일 낮, 교회. 어머니는 잠시 기도를 하고선 주보를 살폈다. 나는 주보만 읽어도 예배를 다 드린 것 같았다. 주보엔 일요일의 일뿐만 아니라 일주일의 일이 망라되어 있었다. 주보라는 문서는 일요일의 서막을 여는 서문뿐만이 아니라, 실상 모든 요일의 서문이기도 했다. 주보를 읽으면 예배를 다 본 것 같았다. 주보를 재차 읽어나가면서 예배를 점차 드리지 않았다. 주보를 읽고 쌓아두면서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주보는 교회와 예배의 종속체이면서, 그것에서 벗어난 고유체였다. 서문이 책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그것에서 벗어나 있듯. 서문과 주보를 문서의 일종으로 보자면, 문서란 늘 속해 있으면서도 벗어나 있다. 이는 문서의 시간에 대한 공간적 비유다. 이야기를 잇자면 “문서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아주 구체적인 답을 요구한다”1)고 말했던 평자의 생각을 챙기기 위한 비유.

 

문서, 그 시간의 시학

『문서는 시간을 재/생산할 수 있는가』2)는 시각문화 연구자 윤원화가 2016년 7월 ‘예술가의 문서들: 예술, 타이포그래피 그리고 협업’(국립현대미술관) 전시를 위해 연 연계 강연을 다듬은 책이다. 저자도 기획자의 입을 빌어 슬쩍 밝히고 있지만 대개 연계는 무언가를 이어서 보기 위한 효용에서 이탈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로 인해 표출되는 글말이 소용없는 문서가 되진 않는다. 외려 소용과 효용을 넘어선 지대로 우리를 초대할 가능성. 윤원화는 그 가능성을 주도면밀하게 살피는 작고 얇은 책을 썼다. 소형의 책보다 얇은 책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편리나 요약을 내세운 독서의 이점을 설파하고자 언급한 것이 아니다. 얇음. 알다시피 납작함과 더불어 현대미술이 지녀왔던 예술과 지식·정보 재현의 상관성을 총칭하는 수사와 개념 사이에 위치한 표현이다. 이 얇은 책을 통해 윤원화는 문서의 시간을 실증하고자 스스로 만든 입체적인 좌표를 소개한다. 눈길을 끄는 건 “문서보다 얇음”과 “문서보다 두꺼움”이라는 두 방향을 지닌 z축이다. 이때 z축은 시간의 영속성과 보편성을 상징하는 책, 시간의 적시성과 무상성을 상징하는 잡지 같은 연속 간행물이라는 두 방향으로 이뤄진 y축 그리고 지식·정보를 조합하고 해체하는 ‘목록’으로서의기능, 세계를 분석·조망하고 종합하는 ‘지도’로서의 기능이라는 두 방향으로 형성된 x축 사이를 가로지른다. 축들의 접촉과 각축으로 생긴 교점과 어긋남을 통해 윤원화는 “문서라는 형식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 이전에, 우리가 시간의 궤도에서 굴러떨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실은 먼저 있었다”(68)는 예리한 언급을 말미에 던진다.

본 책은 문서의 시간을 실증하는 차원에서 시간의 시학을 고민하는 차원으로 발돋움한다. 저자는 동시대성의 무상함을 넘어 이 무상함을 확언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안감을 씻고자 사람들이 불러 세운 무시간성마저도 무상한 시기를 우리가 통과하고 있는 것 아닌지 묻는다. “무시간성의 시간도 어느 순간에 지나가버렸다”(68)는 과감한 생각과 함께.

저자가 잘 쓰는 표현을 전용하자면, 시간은 언젠가부터 쏟아져 내렸다. 이를 예증하는 것은 트위터의 타임라인이다. 이곳에서 시간들은 출몰하고 범람하지만, 사람들은 각자가 투사하고 투자하는 시간의 범람을 이제 순탄하게 느낀다. 한편으로 시간은 의미를 쌓아올리자마자 무너질 채비를 한다. 저자가 책에서 주목하는 나무위키가 그렇다. 나무위키의 시간엔 확증과 확언과 확신이 없다. 윤원화는 고작 나무위키를 인용하냐는 맥락에서 비롯된 으레 나올법한 폄하의 시선 대신 개인들이 문서를 향해 벌이는 게임의 감각에 주목한다. 기록-수정-재수정의 공성전으로 인해 우리는 지식·정보의 신뢰에 대한 두터움과 얇음 대신 의미의 두터움과 얇음에 대해 곱씹어보게 되었다.

 

예술가의 문서와 문서의 예술화 너머

익히 알다시피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개념미술가들은 문서를 통해 의미의 두터움과 얇음 사이를 교란해왔다. 개념미술가 자신과 동료들, 관객은 야기된 착란을 통해 예술이란 무엇인지를 되묻는 시간을 맞이했다. 윤원화는 “시간의 급류가 오래된 제도의 허약한 틈새를 침식하는 현시점에서, 나는 우리들의 문서가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를 바란다”(69)고 밝힌다. 일찍이 개념미술가들이 문서를 통해 밝힌 소망 또한 이와 유사했다. 그들이 문서를 통해 성취하고 싶었던 소망은 예술의 틈새 보이기/벌리기였다. 이 틈새를 예술/예술가의 신화적 시간으로 쌓아올리고 뒤덮으려 했던 자들, 세력들, 기관들, 구조들에 대한 대응이 곧 개념미술의 시간, 개념미술가들이 문서로 기성의 의미를 무마하려던 시간이었다.

한데 인용한 저 문장을 다시 읽어보자. 중요한 것은 “시간의 급류”가 “침식하는 현시점”이다. 저자가 소망하는 시간은 개념미술가들이 마주했던 시간대와 다른 시간대에서 출발한다. 쏟아져 내리는 시간, 무시간성마저도 오늘날의 시간을 증언하고 증명하기엔 이미 지나가버린 듯하다고 밝힌 윤원화의 주장을 다시 불러본다. 제도와 제도가 기생하는 현실의 틈새를 공략하기 위해 개념미술가들의 문서와 개념미술의 정신을 떠올리며 의고擬古적 태도를 지향하기엔 시간은 만만치 않은 형태로 우리 곁을 머물고 있다. 저자는 책 속에서 한 번도 예술사조의 시간과 그 시간이 자리한 영토에 머물지 않는다. 마치 부정 신학에 심취한 자가 벌이는 ‘소거법’처럼 저자는 우리가 이쯤 되면 정착할 수 있겠다는 문서의 시간과 의미들을 하나씩 지워나가며 문서의 시간이 채워왔던 기존의 영토들에서 떠나길 반복한다.

고민을 이어받는다. 예술가의 문서만이 시간의 탈영토화 단계를 지나 새로운 시간의 재영토화를 추구할 수 있는가. 모든 문서를 예술적으로 지각·인식하는 것이 아직 도달해보지 못한 시기, 시절, 시대를 아우르는 시간을 모색하기 위한 장치가 될 수 있는가. 나 또한 저자처럼 확고한 승인 대신 소거를 택하며 일단 내딛어보기로 했다. 본 책은 그런 고민의 시간을 재/생산하고 있는 얇지만 입체적인 문서들이다.

 

김신식 / 서울예대 강사, 『문학과사회』편집동인


1) 윤원화, 「문서의 임무」, 『1002번째 밤: 2010년대 서울의 미술들』, 워크룸프레스, 2016, 124쪽.
2) 이하 인용한 쪽수 표기는 괄호 처리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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