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호 문화비평: 고양이와 정치학] 고양이는 진보다? – 인간, 동물 그리고 정치

 

 

전원책의 개와 진중권의 고양이

ⓒtv.jtbc.joins.com

2016년 5월 어느 금요일, 처음 참석한 문인들의 모임에서 낯설고 어색한 분위기에 눌린 나는 앞에 놓인 맥주만 연거푸 마시고 있었다. 그때 내 앞에 앉아있던 한 유명한 평론가가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전원책 변호사의 개와 진중권 교수의 고양이가 새벽 산책에서 가끔 만난다는 이야기와 함께 “우파는 좌파보다 개를 좋아하고 좌파는 고양이를 좋아한다”는 진중권 교수의 농담을 전하면서 자신은 고양이를 키우고 있노라 했다. 자신이 고양이를 키운다는 그 짧은 문장은 자신은‘보수’가 아니며 진돗개에 열광하는 50대 중장년의 자기 또래들과는 다르다는, 숨겨진 그러나 명백한 기의를 담고 있었다. 분위기는 자연스레 키우고 있는 반려동물이 있는지를 서로 묻고 대답하면서 정치성향에 대한 농담을 이어갔다. 내 차례가 왔다. 나의 대답은 이랬다. “저는 개와 고양이를 같이 키우고 있습니다.” 순간 그는 멈칫했고 누군가 대신 “그럼, 중도네”라고 하자 일동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리면서 반려동물에 관한 대화는 끝이 났다.

그때 자신을 ‘고양이 집사’라고 칭하는 사람들은 분명 ‘지금-여기 한국사회에서 나는 보수가 아니며 진보’라는 의식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고양이’가 이처럼 자신의 정치성향(?)과는 상관없이 자신과 가까운 인간의 대체적 기표로 읽힌 것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중세의 마녀사냥에서 행해진 처형식에서 고양이는 마녀로 지목된 여성과 같이 불에 태워졌고, 16~17세기에는 ‘희생양 제의’를 위해 인간을 대신해 불에 타 죽었다.1) 18세기에 들어서 고양이는 미신 안에서 소비되던 자신의 이미지를 벗는듯했지만, 대신 ‘또 다른 종교’ 탄생의 원인과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자본과 계급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한 술자리의 ‘진보 고양이’와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미시사 연구로 유명한 로버트 단턴(Robert Choate Darnton, 1939~ )의 ‘고양이대학살’에 관한 일화2)에서 고양이는 ‘부르주아’를 대신해 살해당한다. 1730년대 파리 생-세브랭 가의 한 인쇄소에서 혹사당하던 견습공들이 자신보다 더 후한 대우를 받는 주인의 고양이를 주인들 모르게 죽이게 되는데, 이는 분명 노동자들 전체에 퍼져 있던 ‘부르주아’에 대한 증오를 표현하는 행위의 일환이었다.

헨리 스피라의 ‘새비지’

ⓒen.wikipedia.org/wiki/Henry_Spira

시대를 한참 뛰어넘어 미국의 동물운동가 헨리 스피라(Henry Spira, 1927~1998)3)로 가보자. 좌파 운동과 흑인 시민권 운동에 헌신하던 스피라는 고양이 ‘새비지’를 만나면서 동물보호운동에 뛰어든다. 새비지를 만나기 전에 스피라는 동물복지가 정치적인 쟁점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는 새비지를 키우게 되면서 어떤 동물은 쓰다듬고 어떤 동물은 포크와 나이프로 찌르고 자르는 게 과연 적절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게 되고, 피터 싱어(Peter Albert David Singer, 1946~ )의 에세이를 접하게 되면서 생각의 전환을 경험하게 된다. 그는 사람들에게 희생되는 동물들이 자신의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서 단결할 능력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그런 동물의 해방을 위한 노력들이 줄곧 힘없는 약자들, 희생자들, 지배와 억압을 받는 존재들과 동일시했던 자신의 삶의 논리적 확장이라고 생각하게 되면서 동물보호운동에 뛰어든다. 스피라가 처음 동물보호에 관한 자신의 신념을 행동으로 옮긴 것 역시 고양이에 관한 것이다. 당시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은 고양이의 후각을 파괴하고 성기의 신경을 잘라 촉각을 둔화시키고 뇌의 일부를 제거한 후 동물들이 다양한 상황에서 드러내는 성행동을 기록하는 잔인한 실험을 행하고 있었다. 수년에 걸쳐 조직적인 운동을 이끌었던 스피라는 결국 고양이 실험의 종식을 이루어내었고 이후 동물복지에 관련된 많은 성과를 이끌어낸다.

 

“레비나스의 개와 데리다의 고양이”4)
– 인간화된(anthropomorphic) 개와 여전히 인간 밖의 고양이

ⓒSophie Bassouls/Sygma/Corbis

스피라가 동물의 권리를 위해 이루어냈던 수많은 운동들이 당연히 고양이만을 대상으로 했던 것은 아니다. 그가 동물복지를 정치적 쟁점과 연결시키는 출발점에 그의 고양이 새비지가 동기가 됐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체리필터’의 가사 속 ‘낭만 고양이’는 어떤 식으로 평론가의 ‘진보 고양이’가 될 수 있을까?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나치의 수용소에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생활 중에도, 작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기쁨에 넘쳐 짖어대며 자신들을 반겨주는 ‘보비’라는 개의 존재를 통해 자신들이 인간임을 느꼈다고 했다. “의심할 여지없이 그에게는 우리가 인간이었다.” 사실 우리는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개에게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는 방식에 길들여져 있다. 그런 사고는 영화에 등장하는 개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아 톨렌티노(Jia Tolentino)5)는 영화 <A Dog’s purpose>의 리뷰에서 개만큼 영화 안에서 빈번하게 죽는 동물도 없으며, 그 죽음 역시 지나치게 감상적이고 숭고하게 그려지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녀는 이러한 영화 속 묘사가 우리 문화 안에 널리 퍼진 인간화된(anthropomorphic) 개의 모습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점을 덧붙였다. 그래서 안타깝지만 개는 자신을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과 인식 안에 ‘인간중심주의’를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기표로 작동한다고 할 수 있다.

이제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고양이, ‘로고스(logos)’이야기다. 데리다는 어느 날 샤워를 마치고 나오다 자신의 고양이와 마주쳤는데, 순간 자신을 바라보는 고양이의 시선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고양이는 원래가 벌거벗은 존재이기에 ‘벌거벗은 상태’에 대한 이해가 없다. 인간만이 의복을 입는 존재이기에 ‘벌거벗은 상태’는 오로지 인간의 것이며 부끄러움 역시 인간의 몫이다. 데리다는 자신이 느낀 부끄러움이 인간이 아닌 고양이의 시선 앞에서 발생하였으며, 부끄러움의 원인이 고양이와는 상관없는 오로지 인간의 것이라는 점을 자신의 고양이라는 타자를 주체의 시선 안에 결코 포섭할 수 없음을 설명하는 예로 사용하였다. “동물은 원래 벌거벗고 있기 때문에 벌거벗지않은 상태에 있으며, 인간은 (동물과 달리) 더 이상 벗고 있지 않는 범위 안에서 벌거벗고 있는 것이다”6) 이 말장난 같은 데리다의 언설은 시선의 전환 가능성을 인식하지 못했던 인간중심주의의 경계를 해체하고자 한다.

고양이가 이 시선과 주체의 전환이라는 심오한 주제의 주인공으로 등장한 것은 우연인걸까? 그것에 대한 답은 차치하더라도 데리다의 고양이는 주체의 일방적 시선 아래 무시되어 왔던 타자의 주체적 시선 가능성을 말해 주는 자리를 점하고 있다. 그래서 고양이는 타자와 묶여져 있는 사회의 소외와 배제를 끊임없이 연상시키는 기호로 연결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식용고기의 용도도 아닌, 쥐잡이용 동물로 활용될 가능성도 점점 희박해진 도시의 골칫덩이로 전락한 길고양이들에게서 눈을 쉽게 돌릴 수 없는 이유도, 아마 데리다가 부끄러움을 느꼈던 것처럼 고양이들의 눈앞에서 나 자신만의 부끄러움을 느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고양이는 진보다?”가 아니라 “고양이는 진보다”라고 써도 좋겠다.

 

김영임 / 경희대학교 후마니티스칼리지 강사


1) 진중권, 『고로 나는 존재하는 고양이』, 천년의상상, 2017, pp.79-107 참조.
2) 로버트 단턴, 조한욱 역, 『고양이대학살』, 문학과지성사, 1996.
3) 피터 싱어, 김상우 역,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오월의봄, 2013.
4)“레비나스의 개와 데리다의 고양이”라는 소제목과 일화는 앞의 진중권의 책에서 가져왔다.
5) Jia Tolentino, “The Schmaltzy, Cinematic Dog Death Reaches its Logical Endpoint”, The New Yorker, January 28, 2017.
6) Jacques Derrida and David Wills, “The Animal That Therefore I Am”, Critical Inquiry Vol.28, No.2, pp.369-418,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02.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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