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호 테마서평: 이미지의 폭력성] 공정한 이미지 소비를 위하여

『사진에 관하여』(수잔 손탁 저·이재원 역, 이후, 2005)
『타인의 고통』(수잔 손탁 저·이재원 역, 이후, 2004)
『공정으로서의 정의』(존 롤즈 저·황경식 역, 서광사, 1988)

 224-10-1 사진에 관하여       224-10-1 타인의 고통      224-10-1 공정으로의 정의

우리는 주변의 과도한 이미지 홍수 속에 사는 문화적 현상에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대중매체는 우리나라 사회와 아프리카 등을 포함한 저개발 국가에 대해 왜곡된 이미지를 갖도록 부추긴다. 이미지의 편향과 왜곡 현상은 대중들에게 고정관념과 같은 편견을 낳는다.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으로 <공정한 이미지>에 대해 생각해 보고, <공정한 이미지>를 통한 편견 없는 사회를 꿈꾸어 본다.

사진의 폭력성

빈곤국가 사람들의 사진을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도 있지만, 그 사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면 거기에서 우리는 이중적인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 누군가는 반드시 불쌍하고, 힘든 사람은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 ‘고통스러운 사진의 주인공들이 사진의 배경이 되는 곳에서만 산다’고 신뢰하게 한다. 덧붙여서, 이런 사진은 끔찍하고 불쌍한 사람들이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이라는 이야기를 제공한다. 이런 ‘사진·사진 이미지’들은 ‘이국적인 인종을 구경거리’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극단적인 표현을 쓰면 동물원의 동물처럼 보는 것이다. 그런 ‘우울한 대상’이 본인의 자유 의지와는 상관없이 무차별적인 방법에 의해 사진으로 찍혀 남들에게 여과 없이 보인다면, 과연 당사자의 기분은 어떨까? 게다가 사진에 찍혀진 사람들이 방어적인 행동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찍은 고통스러운 이미지를 눈앞에 바짝 들이밀듯이 보여주는 것은, 보는 사람도 괴롭게 해서 그들의 고통을 훨씬 더 많이 느껴보라는 식의 강요로 받아들여진다. 수잔 손탁(Susan Sontag)은『사진에 관하여』에서 “사진을 찍는 행위 속에는 어딘가 약탈의 속성을 담고 있다. 사람을 사진으로 찍는다는 것은 사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볼 수 없는 모습을 보여주며, 그들이 전혀 소유한 적 없었던 자신들을 파악하고 대상으로 만들면서 위협을 가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고 했다. 이 부분을 윤리적인 문제로 판단할 때, 사진이 전쟁의 공포와 같은 참혹한 현실을 다루었을 경우, 보는 사람의 동정심·분노와 같은 감성적인 부분을 기계적인 방법을 통하여 더 자극한다는 문제가 있다. 사진을 찍을 때는 극적인 상황을 극적이지 않게 보여주는 중립적인 태도를 갖는 것이 도덕적·윤리적으로 올바르다. 이런 중립적인 태도에 동의한다면, 빈곤국가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장면을 찍으면 안 된다. 우리는 타인(他人)의 고통스러운 사진을 좋아할 수 없다.

타인의 고통

손탁의『타인의 고통을 숙고하다: Regarding the Pain of Others』는 한국에서『타인의 고통』으로 번역되었다. 손탁이 말하는 ‘숙고’의 개념은『타인의 고통』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손탁은 인간들이 타인의 고통을 구경거리로 소비한다고 비판한다. 손탁은 “‘고통의 도상학’이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 사람들은 관습적으로 육체가 겪는 고통·재난을 표현한 이미지들을 소비했다”고 말한다. 근대 이전에는 종교화·성상의 형태에서 이 소비가 가능했고, 근대에는 특히 빈곤국가의 사람들이 지닌 ‘고통(경제적·육체적)’을 선진국들이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무차별적으로 보여준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손탁이 주장한 문제에 대한 대안적인 방법은, 빈곤 국가의 사람들이 더는 이미지의 객체가 되어서는 안 되며, 그들도 우리와 동등하게 이미지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진국의 태도는 아무리 좋은 의도라고 해도 쌍방향적일 수 없고 타인의 시선만을 가지고 있다.『 타인의 고통』에서 손탁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단지 연민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행동’은 “특권을 누리는 우리와 고통을 받는 그들이 똑같은 지도상에 존재한다는것과 선진국에서 우리가 누리는 특권이 빈곤국가 사람들의 노동력 착취에서 오는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숙고하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행동’을 위해서는 선진국에서 지금까지 이용한 빈곤 이미지만이 아니라 서로의 삶을 존중하고 타자의 문화를 수용하는 진정한 <공정한 이미지>를 생산해야 한다.

224-10-1 사진 재업로드1

ⓒ「The New York Times」 ▲타일러 힉스(Tyler Hicks), ‘처형당하는 탈레반:Taliban Execution’

224-10-1 사진 재업로드2

ⓒ「The New York Times」 ▲타일러 힉스(Tyler Hicks), ‘처형당하는 탈레반:Taliban Execution’

224-10-1 사진 재업로드3

ⓒ「The New York Times」 ▲타일러 힉스(Tyler Hicks), ‘처형당하는 탈레반:Taliban Execution’

224-10-1 사진 재업로드4

ⓒ「The New York Times」 ▲타일러 힉스(Tyler Hicks), ‘처형당하는 탈레반:Taliban Execution’

공정하지 않은 이미지

현대 사회는 타인의 고통스러운 사진을 대중매체를 통해서 보게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특히, 타인을 살해하는 사진을 볼 때 상반된 반응이 나타난다. 그것은 전쟁이 발생하면 안되고 평화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생각과 피해자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사람들은 끔찍한 사진을 계속 본 후에 충격에 빠져서 아무런 생각을 하지 못하기도 한다. 타일러 힉스(Tyler Hicks)가 촬영한 네 장의 컬러사진 ‘처형당하는 탈레반:Taliban Execution’은「뉴욕타임즈」2001년 11월 13일자 1면 상단의 절반에 걸쳐 실렸다. 힉스는 이 사진으로 제59회 ‘국제 올해의사진상’을 수상했다. 이 사진들은 끔찍하고 충격적인 장면이 많아서 사람들의 뇌리에서 쉽게 잊히지 않는다. 사진은 군복을 입은 채 상처를 입어 움직이지 못하는 어떤 탈레반 병사가 카블로 진격하던 북부 동맹의 병사들에게 발각돼서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을 연속적으로 보여준다. 두 번째 사진에는 돌덩어리가 많은 길바닥에 등을 질질 긁히면서 끌려가는 장면이 있고, 북부 동맹의 한 병사가 그의 두 팔을 붙잡고 있다. 세 번째 사진은 탈레반 병사가 땅바닥에 주저앉은 상태에서 두려운 눈빛으로 자신을 에워싼 북부 동맹의 병사들을 쳐다보는 사진이다. 네 번째 사진은 탈레반 병사가 북부 동맹의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하기 직전의 사진이다. 그에게 총격을 가하는 병사는 세 명이고 탈레반 병사는 무릎이 구부러진 채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상태로 길바닥에 거의 알몸으로 누워있다. 이는 땅에 끌려가서 바지가 벗겨진 것이라기보다는 북부 동맹병사들이 그를 죽이기 전 바지를 벗겨서 죽은 후에도 치욕스럽게 한 것으로 보인다. 손탁은『타인의 고통』에서 “타일러 힉스가 찍은 이런 사진들이 자아낸 연민과 메스꺼움으로 마음이 심란해진 나머지, 그 밖의 다른 어떤 잔악 행위들과 주검들을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하는 질문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잔인한 사진이 왜「뉴욕타임즈」1면에 보도가 되었을까? 그 이유는 세상의 사건·사고가 미디어를 통해 자극적인 이미지로 반복적으로 소비되면서 대중의 감정이 무뎌지고 참혹함에 익숙해지며, 미디어가 대중의 보고자 하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더 자극적인 것을 생산하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공정하지 않은 이미지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이다. 만약 피해자로 등장하는 탈레반 병사가 내가 아는 지인이라면 편안하게 사진을 감상할 수 있을까? 공정성에서 벗어난 이 사진을 독자들이 보면서 탈레반과 북부 동맹의 병사 중 과연 누구의 편을 들게 되는가? 독자들이 탈레반 병사에게 연민을 느끼고 이 전쟁에 반대해야 하는가? 전쟁은 원래 잔인한 것이니, 타인의 죽음을 여과 없이 신문 매체에서 보여주는 것은 이미지를 공정하게 보여주는 것인가? 이 사진의 주인공이 탈레반 병사가 아니라 미국인이었다면 죽는 모습을 이렇게까지 적나라하게 보여 줄 수 있었을까?

공정한 이미지

<공정한 이미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미지를 생산하고 소비하는 과정에서 이미지의 평등성, 공정성을 추구하는 규범적 차원의 문제이지만, 완벽한 공정성을 추구하기 불가능한 부분이 존재한다. <공정한 이미지>는 직접 ‘소비되는 이미지(광고
이미지)’를 제외한 시각예술에서 타인을 자신과 동등한 인격체이며 감정을 가진 인간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타인을 편파적인 시각이 아닌 공정하고, 평등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인데 그중에서도 ‘문화 인류학적 사진·영화’에서 공정성을 시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각예술에서 <공정한 이미지>의 지향은 이론적으로 존 롤즈(John Rawls)의『공정으로서의 정의』에서 부분적으로 유사한 지점을 찾을 수 있다. 미국의 정치철학자 존 롤즈가 정의론에서 설정한 정의는 공리주의와 유사한 장점을 가지면서도 그 약점을 피해간다. 그는 개인을 존중하고, 타인을 위해 개인의 복지나 권리를 희생시키지 않으며, 배분의 문제에서 가장 근본적인 의사결정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제공하는 이론을『공정으로서의 정의』에 담아냈다. 존 롤즈는 “원리가 정의롭기 위해서는 공정한 상황 그자체에서 선택돼야 하며, 공정한 것은 어느 한 편이 다른 한 편의 이익을 희생시키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정의의 원리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로 등장해야 한다. 존 롤즈의 정의론이 이미지에 대해서 이런 주장을 한 것은 아니지만, <공정한 이미지>를 모색할 때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손탁은 사진의 폭력성과 고통에 관해 언급하면서 “타자의 고통에 연민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고 했지만, 그녀에게는 불합리한 이미지에 대한 실천적인 해석이 부족한 부분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 존 롤즈의『공정으로서의 정의』는 실천적인 측면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정한 이미지>는 사진의 폭력성과 왜곡된 이미지를 해소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

김 석 원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작성자: khugnews

이글 공유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