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호 책지성: 폴 라파르그, 『게으를 권리』] 참된 게으름의 의미를 찾아서

 

 

▲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 1842~1911) ⓒ http://cartoliste.ficedl.info

▲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 1842~1911)          ⓒ http://cartoliste.ficedl.info

 

우리는 왜 이렇게 바쁘게 살아가는 것일까? 마치 일 하려고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은 하루 대부분을 일에 투자한다. 잠깐의 여유도 허락하지 않는 바쁜 틈에서 지쳐간다 말하면서도, 쉼 없이 일을 하고 있다. 쳇바퀴처럼 돌아가는 일상에 지친 노동자의 입장에서, 이 책은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한껏 나태해지고 싶은 마음으로 책을 펼쳤지만, 책은 생각보다 심오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저자인 폴 라파르그는 카를 마르크스의 사위이자 프랑스 사회주의 운동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또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유럽을 대표하는 혁명적 지식인이기도 하다. 사회주의 성향 출판사에서 무보수로 일할 만큼 활발하게 행동한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심지어 그는 70세에 이르러 더 이상 사회주의운동을 이어나갈 수 없다고 판단하자, 아내와 자살로 생을 마감할 만큼 열정적이었다. 이 책은 그의 여러 글 중에서 일곱편을 엮은 책이다. 표제작인 〈게으를 권리〉는 노동자를 억압하는 근대 자본주의를 비판한 글로, 곱씹다 보면 19세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현대 사회에서도 충분히 생각해볼 만한 가치를 갖는다. 이외에 다른 글을 통해 당시 지식인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다.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은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저자는 노동이 “모든 지적 퇴화의 원인이 되고, 모든 유기체를 기형으로 만든다”고 말한다. 2차 산업혁명 시대, 노동이 중요시되던 그 시대를 ‘고통과 비참과 타락의 시대’라고 비꼬며 노동자에게 게으름을 주문한다. 저자의 글에서 왜 그토록 노동을 비난하고 게으름을 요구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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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불화의 씨앗은 ‘노동의 과잉’

2차 산업혁명으로 생산 수단의 진보를 이룬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기계로 인해 제조업이 발전하고, 여기저기 공장이 세워졌다. 이것이 모든 문제의 시작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는 공장이 “인간의 노동에 대한 식욕을 주체하지 못하고 노동자들을 단란한 가정에서 끌어내어 쥐어짰다”고 하며, 하루 최소 15시간이나 지속되는 공장의 노동에 대해서는 “그것은 노동이라고도, 일이라고도 볼 수 없다. 방적 공장에서 날마다 긴 시간 계속되는 이러한 고문이 노동자들을 소모시킨다”고 공장노동에 대한 비판을 이어간다. 노동의 과잉이 지속되면 창고에 재고가 넘쳐나는 ‘상품의 잉여’가 발생한다. 과거에 제조업자들은 남아도는 상품을 불태우거나 강에 버렸다면, 저자가 살던 시대의 제조업자들은 시장을 찾아 전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리고 시장을 독점하고자 자국 정부에 압력을 가했고, 이는 국제적인 외교 분쟁과 전쟁으로 귀결되었다. 실제로 18세기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각자의 이익을 위해 식민지 전쟁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의 희생이 있었다.
그는 과도한 노동에서 시작된 개인적, 사회적인 참상을 물리치기 위해 노동자 스스로 ‘게으를 권리’를 선언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루에 최대 3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여가와 오락을 즐기는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글이 쓰인 19세기 후반에도 파격적인 주장이었지만, 요즘 현실에 대입해 봐도 이 주장은 ‘혁신’이 따로 없다. 그는 “노동은 인류에게 내린 다른 어떤 저주보다 더 끔찍한 저주였다는 사실, 그리고 노동은 게으름이라는 즐거움에 추가되는 양념에 불과한 것이 되리라는 사실”이라고 노동을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노동시간을 단축하면 새로운 기계적 힘이 사회적 생산에 이용될 것이라며, 노동시간 단축이 개인과 사회에 미칠 긍정적 파급효과에 대해 말한다. 또 노동시간을 줄이면서 발생할 수 있는 생산력 감소의 문제는 당시 발전하고 있던 기계가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 “노동이 인간이라는 유기체에 이로운 몸놀림이되고 사회라는 유기체에도 유익한 열정의 표출”이 되기 위해 노동시간을 최대한 규제해야만 한다고 한다.
또한, 벨기에와 영국 등 당시 노동시간을 규제해 생산성 증대를 이끌어낸 다른 국가의 사례를 들며 대부분의 노동자에게 하루 12시간 이상의 노동이 강요되던 프랑스의현실을 강하게 비판한다. 이 글은 당시 자본가를 공격해 노동당원을 결집하는 데 목적이 있었기에, 제목과는 달리 아주 분주하고 공격적인 분위기를 띈다.

왜 노동자는 게으를 수 없었나?

표제작인 〈게으를 권리〉를 읽다 보면 예전에는 전혀 의문을 갖지 않았던 사실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 기계로 인해 생산성이 월등히 좋아졌는데, 왜 인간은 계속 일을 하게 된 것일까? 기계는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킬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어째서 사람들은 기계로 인해 더 가난해지고 노예와 같은 삶을 살게 된 것일까? 폴 라파르그는 이러한 문제의 원인을 기독교 윤리를 천박하게 모방한 자본주의 윤리라고 본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과거 부르주아 철학자와 논객들이 봉건 귀족계급에 대항한 투쟁에서 승리하자,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노동의 교리를 만들어 노동을 신성화했다. 권력자와 자본가들은 이러한 논리를 대중에게 적용하게 되는데, 노동자들은 이것을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스스로 노동의 노예가 된다. 노동자들은 ‘신성한’노동에 집착하며 자신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며 무기력하게 살아가게 된 것이다. 그는 노동과 여가, 신성함과 게으름에 대해 이야기하는 중세 철학자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노동자는 게을러져야 한다는 본인의 주장에 힘을 싣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노동’을 비판하는 이 책의 논조는 〈말의 권리와 인간의 권리〉에서도 이어진다. “비참한 생활에 빠진 노동자들의 열정을 일깨우고 그들의 욕망에 불을 지피고자” 쓰인 이 글의 내용을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짐승만도 못한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다. 말도 말답게 존재할 권리를 누리는데,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 이상의 노동에 시달리면서 인간다울 권리는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이 글에서 저자는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이 내거는, 짐승만도 못한 ‘인권’따위는 집어던지고 차라리 ‘말의 권리’를 찾을 것을 주장한다.

 

 

궁극적인 가치, ‘인간다움’을 찾게 되길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책의 저자인 폴 라파르그는 그 자체로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사상가이면서 우리에게 더 많이 알려진 ‘카를 마르크스’의 사위이기도 하다. 이 책은 당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내용을 통해 현대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인간답게,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생각하게 만든다. 저자는 극렬하고, 명확하게 비난했던 노동과 달리 게으름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다. 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여유를 갖고 스스로를 돌보는 것, 결국 게으름은 일종의 ‘자기 계발’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본질이나 양상은 다를 수 있겠지만, 얼마 전까지 유행했던 ‘YOLO(You Only Live Once)’와 같은 것들도 21세기에 게으름을 실천하기 위한 인간들의 몸부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루가 다르게 첨단 기술이 등장하고 기계가 발달하지만, 사실 우리의 처지는 근대 공장 노동자와 흡사하다. 일에 파묻혀 살지만 손에 들어오는 것은 얼마 없고, ‘ 열정 페이’라는 아름다운 이름뒤에 숨어있는 일종의 노동 착취를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일하기싫어증, 감정노동, 갑질’을 떠올리면, 저자가 살던 19세기 후반과 2017년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다. 하지만 저자의 ‘게으름’에 대한 주장은 오늘날에도, 미래에도 유효할 것이다. 우리가 맞이하게 될 4차 산업혁명 시대는 개인
의 노동력보다는 창의성을 요구한다. 인간의 ‘창의성’을 극대화하는 데 있어 의견이 분분한데, 인간이 노동시간을 줄이고 충분한 여가와 휴식을 통해 정신적인 만족과 행복을 누리게 되면 창조성을 발휘하게 된다는 폴 라파르그의 주장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생산’에 있어
인간의 노동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들게 되면, 우리는 여유를 얻고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되지 않을까? 과연 우리에게 ‘게으를 권리’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시대, 인간의 존재 가치가 ‘자본’에 밀리지 않는 시대가 올는지 기대해본다.

 

유혜선 | hsyoo25@khu.ac.kr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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