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호 인터뷰: 윤석남 미술작가, 한국 여성주의 미술의 한 단면]

윤석남 미술작가는 1936년 만주에서 태어나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미술작가의 길에 들어서 “어머니의 모성과 강인함, 오늘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불안한 내면세계”를 표현하며 지난 30여 년 동안 한국의 대표적인 여성주의 미술가로서 역할을 수행해왔다. 여성 작가로는 처음으로 ‘이중섭미술상’ 수상 작가로 선정되었고, 1996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특별전」과 2014년 「광주비엔날레」에 참여하였다. 지난 9월 29일, 화성의 작업실에서 윤석남 미술작가를 만나 여성주의 미술가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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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말하다

Q. 나이 마흔에 평범한 가정주부에서 돌연 미술작가의 길을 걸으셨는데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사춘기 이전부터 미술작가라는 직업에 관심이 많았지만,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의 남편을 만나 8년 동안 가정주부의 길을 걸으며,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이 들었어요. 나 자신을 위한, 나의 행복을 위한 삶을 갈망했던 거죠. 그런데 당시는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던 터라 내가 할 수 있는 게 한정적이었어요. 조금씩 할 수 있는 것을 찾다가 박두진 선생님께 서예를 배우게 됐죠. 4년 동안 서예에 푹 빠져 지냈는데, 무언가를 내뿜고 싶었던 저 자신을 표현하기에는 방식이 맞지 않다는 생각을 했어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그 목적이 무엇이 됐든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꼭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저에게는 그것이 ‘그림’이었어요. 그래서 1979년 4월 25일, 남편에게 받은 한 달 생활비를 모두 갖고 미술용품을 사와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마흔이라는 늦은 나이에 미술교육도 받지 않고 시작한 무모한 도전이었지만, 그때의 설렘과 기쁨은 아직도 잊을 수 없어요.

 Q. 버려진 나무 조각에 어머니를 그려 넣은 999개의 조각작품 <999>로 1996년 여성 최초로 ‘이중섭 미술상’을 받기도 하였고, 어머니라는 주제로 오랜 기간 작업을 해오셨습니다. 작가님께 어머니는 어떤 의미가 있나요?

저의 어머니는 열아홉이라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만나 결혼하셨어요. 당시 아버지께서는 소설가였고,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많았죠. 집도 없고, 모아둔 돈도 없는 상태에서 두 분이 만주로 가 6남매를 낳아 기르셨어요. 아버지는 소설가 이후 서라벌대학 학장, 영화감독으로 활동하셨지만 집안 사정이 나아지지는 않았어요. 제가 고등학교 1학년 때 갑자기 아버지께서 병환으로 돌아가셨는데, 경제적 바탕이 없는 상황에서 어머니 혼자 6남매를 키우셔야 했지요. 당시 서른아홉 살이었던 어머니는 노점상도 하시고, 공장에 나가서 밤늦게까지 일을 하시면서도 힘든 내색하지 않는 강인한 분이셨어요. 또한 어려운 형편에도 오고가며 들르는 나그네며 식객들에게 잠자리를 마련해 주고 먹을걸 나누어 주는 따뜻한 분이셨지요. 그런 어머니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존경심이 있었기에 그림을 시작하자마자 어머니를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자식을 위해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주시는 우리 시대의 어머니, 희생과 어려운 삶 속에서도 긍정적이고 강인했던 어머니의 힘에 대한 경이로움을 작품에 표현하고 싶었어요.

Q. 어머니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존경심을 표현하는 작가 윤석남은 어떤 어머니 신가요?

사실 저는 작가로서의 생활에 집중하다 보니 딸을 챙기지 못한 결격사유가 많은 엄마였어요. 딸이 초등학교 1학년 때 제가 뉴욕으로 유학을 가게 되어 일 년 동안 떨어져 지내기도 했고, 유학을 다녀와서도 작업에 몰두하느라 함께 보내는 시간이 부족해 어린 딸에게는 항상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요. 그러나 저는 예술을 통해 대중에게 많은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잘못된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어요. 그래서 어린 딸이 성인이 되면 좋은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작가 윤석남에 대해 이해할 것이라 생각하고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지요. 그때의 제 마음이 딸에게 전해졌는지 지금은 저를 이해하고 응원해 주는 둘도 없는 친구예요. 누군가는 저에게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작업을 하면서 정작 본인은 그런 어머니가 되지 못하였다며, 모순이라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걸 모순이라 생각하지 않고, 시대가 변화하면서 발전된 여성의 모습이라 생각해요. 저의 어머니 세대는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 희생의 힘이 나에게는 자아실현의 힘으로 바뀌어서 왔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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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남이 바라본 여성의 삶

Q. <1,025> 작품에서 1,025마리의 유기견을 작품으로 만든 것이 흥미롭습니다. 여성이 주요한 소재였던 작품세계에서 유기견이 등장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그때가 벌써 2003년도네요. 제가 일민미술관에서 「늘어나다」전시를 하고 있을 때, 한 여성이 1,025마리의 유기견을 보호하고 있다는 신문기사를 우연히 접했어요. 이애신이라는 예순다섯 살의 여성이 유기견에게 자신의 안방까지 내주고 매달 300만 원의 사비를 들여가며 보살피고 있다는 기사를 읽는 순간 너무 큰 감동을 받아 ‘다음 작품은 이것이다’라는 확신이 들었지요. 얼마 뒤 파주에 있는 이애신 할머니의 유기견 보호소를 찾아갔어요.

한 가정에서 가족같이 지내다 한순간에 버려진 1,025마리의 유기견을 바라보며, 버리는 행위 자체가 인간의 악한 면을 보여준다 생각했어요. 그러나 버려진 생명체를 이애신 할머니가 다시 보살피는 것이 여성들이 가진 보살핌의 아름다움을 극대화 시켜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해 <1,025> 작품을 시작하게 되었죠. <1,025> 작품 또한 여성의 이야기가 주요하지만, 처참히 버려진 유기견에 대한 안타까움도 담겨있어요. 1,025마리의 유기견 조각을 만들기 위해 나무를 자르고 그 위에 드로잉을 하고 표면을 갈고 밑칠을 하는 작업을 하는 동안 버려져 비참하게 죽어간 생명들을 애도하면서 자연과 상생의 조화가 가능한 삶을 기원했지요.

Q.국내 작가 최초로 영국 테이트 모던 미술관 컬렉션에 선정된 <금지구역Ⅰ> 작품은 어떤 것을 표현한 작품인가요?

<금지구역Ⅰ> 작품은 작가의 삶과 어머니의 삶 사이에서 어느 것 하나 포기할 수 없는 중간자적 입장이었던 불안한 나를 표현한 작품이에요. 작가의 길을 걸으며 가족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적을 수밖에 없어 미안한 마음에 항상 부채의식이 있었지만, 결코 작품 활동을 소홀히 할 수 없었어요. 이처럼 자아와 현실의 괴리에서 생기는 갈등과 모순이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지요. 그러한 나의 불안함을 표현하기 위해 길가에서 주워온 주방 의자에 대장간에서 주문한 쇠못을 꽂고, 다리에는 35㎝의 쇠못으로 된 발을 붙여 앉을 수 없는 바늘방석 의자를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 뒤에는 여자가 꼿꼿이 세운 발로 의자를 잡고 불안하게 서 있는 형상을 나무 조각으로 만들어 세워 놓았지요. 바늘방석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불안하게 서 있는 여자. 그런 저를 표현한 작품이에요.

윤석남  1995 ⓒ학고제갤러리

윤석남 <금지구역Ⅰ> 1995 ⓒ학고제갤러리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윤석남

Q. ‘여성주의 미술의 대모’라는 호칭으로 불리는데 여성주의 미술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처음부터 여성주의 미술을 해야겠다 생각하고 시작한 건 아니에요. 미술을 시작하며 나의 마음을 어머니 또는 평범한 여성들의 형상에 비유해서 표현했어요. 이러한 작품들을 통틀 어 보니 한국에 있는 모든 어머니 이야기이기도 하고, 이것이 여성 이야기가 되어 의도치 않게 여성주의 미술가로 불리게 되었지요. 내가 이 시대에 여성으로 태어났고, 여성으로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자연스럽게 여성주의 미술을 불러온 것 같아요.

내가 작업을 시작할 당시에는 여성주의 미술이라는 말 자체가 한국에는 없었어요. 내가 하고 있던 미술이 여성주의 미술이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된 것이죠. 1988년도에 우연히 100여 명의 여성 학자들이 여성운동을 하는 ‘또 하나의 문화’라는 단체에서 여성주의에 대해 접하게 되었어요. 그곳에서 사회학, 인류학, 여성학 등을 연구하는 학자들과 만나며 여성 주의에 관해 토론도 하고, 해외 여성 관련 논문을 공부했지요. 그렇게 여성주의 미술이라는 것이 외국에 존재하고, 1970년대에서 1980년대의 여성운동이 굉장히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 이후 나에게는 여성 문제가 굉장히 큰 그림의 주제가 되었어요. 여성에 대한 얘기는 38년간 많은 작품을 통해 표현해왔지만, 아직도 하고 싶은 얘기가 많아요.

Q.「반에서 하나로」라는 전시가 한국 최초의 여성주의 미술 전시라고 평가받는데 어떠한 것을 표현한 전시였나요?

「반에서 하나로」는 김인순, 김진숙 작가와 함께 만든 ‘시월 모임’이라는 민중미술 단체에서 하게 된 전시예요. ‘시월모임’이 여성들로 이루어진 단체인 만큼 여성의 이야기를 해보자는 의견이 나와 전시를 하게 되었지요. 「반에서 하나로」라는 전시명은 완전하지 못한 ‘반’이라는 여성의 존재를 완전체 인 ‘하나’로 만들고 싶다는 뜻을 담고 있어요.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녀평등 사회로 가기 위해 여성들의 자각적 인식과 실천 의지를 조형화한 전시였지요. 여성주의라는 용어도 없는 시기에 시작한 전시였지만, 몇 년 뒤 「반에서 하나로」전시가 한국 최초의 여성주의 미술 전시로 평가되어 저는 너무 놀랐고, 기뻤어요.

그때 전시에 출품했던 <손이 열이라도>라는 작품은 2015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윤석남 심장」전에서 다시 전시 하기도 했어요. 서른아홉에 혼자가 돼 행상을 하며 어렵게 자식들을 돌보았던 저의 어머니를 모델로 한 작품으로,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가부장적인 사회에 대한 비판이 담겨있기도 하지요.

Q. 작품활동 외에 여러 여성운동도 하셨습니다. 이런 활동을 하게 된 계기가 무엇이었나요?

저는 한 가정의 어머니였지만 가족의 이해와 남편의 경제적 지원으로 작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감사하게 생각해요. 제가 작업을 시작할 1980년대에는 여성이 독립적으로 살기 어려운 사회였고, 여성은 자신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희생하며 지내온 경우가 많았죠. 이러한 여성들을 보며 저만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 같아 미안함과 함께 부채의식이 있었어요. 넓게 생각해 보면 남편에게 경제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것 또한 남편이 사회에서 많은 사람의 도움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라 생각할 수 있어요. 한마디로 제가 작가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지요. 그래서 제가 받은 혜택을 사회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가깝고 공감하는 여성 문제에 대한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표현하며, 여성이 살기 좋은 평등한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하고자 했죠. 그래서 ‘여성문화예술기획’의 이사장을 맡기도 했고 한국 최초의 여성동인지 ‘IF’등을 창간하며 여성단체에 굉장히 열심히 참여했어요.

Q. 끝으로 자신의 삶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대학원생들에게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작가 윤석남이 대학원생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인 것 같아요. 늦은 나이에 안정된 삶을 박차고 내가 꿈꾸었던 작가의 길을 걸어간 것. 그리고 나의 여성주의 미술. 나 또한 많이 부족한 사람이지만 내가 걸어온 길을 바라보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해요. 저는 작가로서 도전하고, 나의 존재에 대해 알아가기 위하여 끊임없이 몰두했어요. 여러분도 현재 살아있는 이 순간,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에 자긍심을 갖고 꼭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며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나의 작품을 통해 젠더의식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 보고, 남성과 여성을 성으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인간으로 바라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대담·정리: 최다운 | dawooning@khu.ac.kr
사 진 : 오지예 | ooojiye@khu.ac.kr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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