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4호 영화비평: <지난 여름 갑자기 Suddenly, Last Summer>(1959) 1950년대 할리우드에서 동성애에 대해 말하지 않기

미국 현대사에서 1950년대는 아마도 가장 보수적인 시기였을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 난 후 세계 자본주의의 유례 없는 호황과 번영 속에서 미국은 본격적인 소비 자본주의로 나아 가고 있었고, 중산층의 교외화(suburbanization)와 TV 소유, 십대들의 데이트 성지가 된 드라 이브-인 극장 등이 크게 발흥하고 있었다. 불과 20~30년 전 미국 자본주의를 공포로 몰아넣었 던 대공황의 흔적은 깨끗이 사라졌고, 미소 냉전 체제는 ‘혁명’, ‘공산주의’, ‘소비에트’등의 단어를 금기시하게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전후 최고의 호황을 겪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 그러 한 단어를 입에 올린다는 것은 어딘지 촌스럽고 시대착오적으로 보이는 것이였을 수도 있다.

슬로언 윌슨이 소설『회색 플란넬 양복을 입은 남자 The Man in the Gray Flannel Suit』(1955. 이듬해 영화로 제작)에서 그린 규격화되고 표준화된 중절모의 남자들(1950년대 중반을 배경으로 한 2008년 작 <레볼루셔너리 로드 Revolutionary Road>의 초반부, 통근 열차에서 쏟아져 나오는 한결 같은 중절모와 무채색 양복의 남자들로 표현된)은 그러한 풍요와 번영의 시대 순응주의를 대변하는 시대의 초상이었다. 이러한 순응주의와 보수주의가 지배하는 미국에서 성적인 표현 역시 제한적일 수밖에 없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예를 들어 <자이언트 Giant>(1956)에서 부부의 침실 장면은 더블베드가 불필요한 성적 암시를 준다는 이유 때문에(부부임에도 불구하고!) 트윈 베드로 바뀌었다고 한다. 사정이 이러할진대 동성애를 그린다는 것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이였던 20세기 미국의 위대한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원작의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Cat on a Hot Tin Roof>(1958)에서 남편이 아내와의 잠자리를 거부하는 이유는 분명히 동성 연인과의 관계 때문이다. 그의 알코올 중독은 그러한 자신의 비밀을 말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좌절감의 표현일 것이다. 영화는 이것을 동성애라기보다 동성 친구와의 묘한 우정(?!)으로 설정한다. 끝에 가서 남편은 아내와 다시 관계를 회복하지만 그것은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다루지 못하는 모순을 서둘러 봉합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같은 윌리엄스 원작 희곡을 영화화한 <지난 여름 갑자기 Suddenly, Last Summer>(1959) 역시 동성애라는 금기시 된 주제가 기괴한 방식으로 알레 고리화 된 영화이다.

세바스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시대적 배경은 1937년 미국 남부 뉴올리언즈의 주립 정신병원이지만, 영화는 이 시기에 대한 어떠한 시각적 정보도 제공하지 않는다. 이 시기는 대공황이 끝나가는 시점이자 제2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때였지만 이러한 역사적 사실들은 이 영화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비밀스러운 대저택과 폐쇄적인 정신병동, 그리고 후반부 플래시백에 나오는 스페인의 어느 해변만이 영화적 공간을 차지하고, 시간 역시 길지 않은 며칠 간을 다루고 있다. 후에 설명할 기괴한 사건이 벌어지는 공간이 미국이 아닌 이국적인 스페인의 어느 해변 마을인 것처럼 1937년이라는 시간 역시 이것이 1950년대라는 동시대의 사건이 아니라 오래 전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그 이상의 의미로 작용하지 않는다.

외과의사 쿠크로비츠 박사(몽고메리 클리프트)는 부유한 미망인 바이올렛(캐서린 헵번)에 게서 자신의 조카 캐서린(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뇌수술을 해주는 조건으로 병원에 막대한 기 부금을 제안 받는다. 캐서린은 지난 여름 바이올렛의 아들이자 자신의 사촌인 세바스찬과 스페인의 카베자 드 로보라는 해변에 놀러갔다가 세바스찬이 사고로 죽은 이후 정신이상에 시달리는데, 바이올렛은 캐서린의 정신이상이 아들의 죽음과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쿠크로비츠 박사는 캐서린에게 지난 여름 스페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끈질기게 되묻지만 캐서린은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다.

<지난 여름 갑자기>에서 가장 미스터리한 것은 세바스찬의 존재이다. 그는 영화 전편을 지배 하는 중요한 인물이지만, 캐서린이 지난 여름을 회상하는 후반부 플래시백 장면 이전까지는 그 모습조차 보이지 않는다. 또한 플래시백 장면에서조차 뒷모습이나 하반신 정도만 나올 뿐, 우리는 그의 얼굴을 볼 수조차 없다. 마치 이름으로만 존재하지만 영화의 모든 분위기를 지배하고 압도하는 <레베카 Rebecca>(1940)의 레베카처럼 세바스찬은 신비로움으로 둘러싸인 인물이다. 아니 피와 살이라는 형상을 부여받은 인간이라기보다 어떤 상징이나 알레고리처럼 보인다. 그와 어머니인 바이올렛의 관계는 무엇인가? 죽은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마음이야 오죽할까 싶지만 그녀의 아들에 대한 집착은 도를 넘어 보인다. 사랑이라기보다 일종의 소유욕이나 지배욕에 가깝다. 차갑고 냉정한 그녀가 캐서린의 정신이상을 고친다는 명목으로 뇌수술을 제안(지금의 기준으론 있을 수 없지만 과거에는 더러 있었다는)하는 것도 아들에 대한 어떤 기억 을 제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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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vie.naver.com

매혹의 시선, 동성애의 시선

러닝타임이 114분인 <지난 여름 갑자기>는 90여 분이 지나는 시간 내내 희곡 원작 특유의 장황한 대사와 답답하리만치 한정된 공간으로 지루함마저 자아낸다. 그러나 마지막 15분 가까이 가 압권이라 할 만하다. 그것은 마침내 캐서린이 카베자 드 로보에서 세바스찬과의 기억을 드 러낼 때이다. 대사로만 전달되던 이전 장면과 달리 영화 시작 95분이 지나서야 마침내 회상장면, 즉 플래시백이 등장한다. 이 장면은 고통스럽게 지난 여름을 회고하는 캐서린의 현재 얼굴 클로즈업과 카베자 드 로보의 과거를 교차시키는데, 대사는 현재 시점에서 캐서린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것에만 맞춤으로써 과거의 장면을 한층 더 현실감 없이 보이게 한다. 즉, 과거는 실재 했던 사건이라기보다 어떤 이미지로만 존재한다는 느낌을 가중시킨다.

앞서 말했듯이 세바스찬은 여기서 앞모습을 보여주지 않은 채 뒷모습으로만 나타난다. 캐서린은 세바스찬이 자신을 미끼로 사용했다고 회상한다. 여기서 미끼란 해변의 남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것이다. 세바스찬은 캐서린에게 몸의 굴곡이 다 드러나고, 물에 젖으면 속살까지 비추는 하얀 수영복을 억지로 입혀 바닷물로 끌고 간다. 호기심 어린 남자들이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다. 세바스찬이 왜 그런 일을 시켰느냐고 묻는 쿠크로비츠 박사의 물음에 그녀는 외로운 세바스찬을 위해 자신이 뚜쟁이 노릇을 한 것이라고 말한다. 일단 캐서린이 남자들을 끌어모으자 그녀의 역할은 정말 거기까지이다. 그 때부터 역시 하얀 수영복을 입은 매끈한 몸의 세바스찬은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과시적으로 그 상황을 즐긴다. 그리고 나중에는 귀찮다는 듯이 그들을 경멸해 마지않는다. 여기서 이 해변의 토착민 남자들은 인간이라기보다는 걸신들린 짐승들처럼 보이는데 세바스찬은 캐서린에게 “저 작은 괴물들을 쳐다보지 마. 저런 거지가 이 나라의 병폐야”라고 말한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그들은 정말 집단 괴물로 변하는데 자신들을 모욕한 세바스찬에게 달려들어 그를 뜯어먹는 식인(食人)을 연출하는 것이다.

이 급작스럽고 황당한 결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해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캐서린의 육감적인 몸을 향한 남자들의 시선이 왜 세바스찬에 대한 매혹으로 이전했는가 하는 것이다. 그녀가 남자들을 끌어 모으기 위한 미끼이자 뚜쟁이였다면, 아니 좀 더 나아 가서 해변의 토착민 남자들이 모두 세바스찬에 매혹된 동성애자들이었다면 왜 그녀가 미끼가 되어야 했을까?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사실, 관능적인 캐서린/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몸은 1950년대 이성애 남성 관객들을 위한 ‘미끼’였을 뿐, 토착민 남자들이 정말로 향한 시선은 또 다른 하얀 수영복을 입은 세바스찬이 아니었을까? 결국 그의 앞모습과 얼굴이 나올 수 없었던 것은 그 모습에 매혹당한 시선이 동성애자의 것이었기 때문 아니었을까? 서두에서 길게 서술했지만 가장 보수적이었던 1950년대에 <지난 여름 갑자기>는 동성애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에 가장 기괴하고 이상한 방식으로 봉합되었다. 그러나 그 봉합은 이렇게 풀릴 수 있다. 식인이 남자들끼리의 난교(혹은 윤간)에 대한 알레고리라면 토착민 남자들이 세바스찬에게 느낀 매혹의 시선은 관능적인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느낀 당대 이성애 남성 관객들의 매혹의 시선에 의해 분산되고 희석되었다고.

정영권 / 동국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강사

* 세바스찬에 대한 토착민 남자들의 동성애적 시선에 대해서는 Ellis Hanson이 편집한 Out Takes: Essays on Queer Theory and Film(Duke University Press, 1999)에 실린 D. A. Miller 의“Visual Pleasure in 1959”을 참조했음을 밝힙니다.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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