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호 인문학술: 민중미술] 민중미술, (민중)미술

서울교정 문과대학 건물에는 투쟁하는 한 청년의 벽화가 그려져 있다. 일명 ‘팔뚝’이라 불리는 이 벽화는 1989년 ‘6월 민주항쟁’을 기념하기 위해 그려진 민중미술 작품의 하나로 1980년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라는 평가를 받는 본교의 자랑이다. 세월의 풍파로 많이 훼손되었으나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지난 6월 복원과정을 거쳐 새롭게 공개되었다. 이에 본보는 민중미술의 태동에서 쇠퇴까지의 흐름을 살펴보고 현재의 민중미술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박영균, , 경희대학교 벽화, 1988 ⓒ 청년벽화복원추진위

▲박영균, <청년>, 경희대학교 벽화, 1988 ⓒ 청년벽화복원추진위

민중미술이냐 민족미술이냐? 혹은 민중미술이냐 (민중)미술이냐? 1980년대, ‘민중’이 역사의 전면에 폭발적으로 등장하고 모든 문화 양식이 그에 운을 맞추었던 때, 그 어떤 예술 분야보다도 사회변혁에 앞장섰던 민중미술이 위업을 이룬지도 30여 년을 훌쩍 넘긴 이때, 희미해질 법도 하건만 왜 이 일을 들추어야 하는가.

지혜로운 사유가 발터 벤야민을 인용해 말해 보건대, ‘행복’의 관념처럼 ‘과거’ 속에는 구원의 관념이 포기할 수 없게 공명하고 있기 때문, 저 고귀한 것을 구원하고 싶다/해야겠다는 어떤 은밀한 지침(指針)이 내장되어있기 때문이다1). 지금의 우리는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서로 죽일 듯이’ 토론했던 저 문제들이 옳게 해명만 된다면 그들은 얼마나 좋은 세상에 살 것인가라고 기다려왔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민중미술의 역사-과거는 이 힘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민중미술의 태동에서 쇠퇴까지의 편년체(編年體)로서의 연대기가 아닌, 그들 내부에 간직된 사상 미학적 입장이 어떤 내면과 변모의 모습을 갖추어 가고 있었는지를 그려 내 보는, 그 의미를 도출해보는 시도다.

▲오윤, , 캔버스에 유채, 131x162cm, 1982 ⓒ kyeonggi.com

▲오윤, <1960년 가>, 캔버스에 유채, 131x162cm, 1982 ⓒ kyeonggi.com

민중미술이전

모든 역사쓰기에서의 난점처럼 민중미술의 태동을 묘사하기 위해서도 역사가는 시간의 소급을 어디까지로 제한할 것 인가의 결정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민중미술의 초기 이론가 원동석을 따라 1945년 광복과 그 이전 일제의 침탈기를 짚어볼 수 있다. 소위 자생적 근대미술의 맹아로 유감없었던 판소리, 탈춤, 민속화, 진경산수, 풍속화와 같은 것들이 나름의 민족예술의 리얼리즘을 정립시키려는 바로 그즈음,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침탈로 파탄을 면치 못하게 된 정황을 말한다. 이때의 미술에 대한 제도적 관리 장치가 ‘조선미술전람회(선전, 鮮展)’였다. 양식근거의 자유성이 거세된 채 심미적 관조주의 형식미학만이 권장되고 배양되는 가운데 향토적 서정주의, 정태주의, 나아가 총후(銃後)미술과 같은 제국주의의 정치선전물이 되기까지 했던 것이 우리가 익히 아는 역사다. “선전에 응모하는 작가는 치안, 풍교를 해치는 작품을 출품할 수 없다”는 규정, 당대의 우리 미술가들이 식민지 현실에 문화적으로 순응할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2)
그러나 해방 이후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 國展)’ 제도가 이 모순된 역사적 진리를 인식하지 못했거나 혹은 않았다는 것도 분명했다. 선전의 인물과 세력을 그대로 답습한 국전은 식민미술의 연장선, 역사적 불감증 혹은 마비증이라는 치유되지 않은 병증을 안은 채 1960년대의 문턱까지 떠밀려갔던 것이다. 명실공히 민중미술(론)이 적극적으로 나타나기까지 1980년대 이전의 역사는 이처럼 ‘현실의 무풍지대’라 명명해도 지나치지 않을 낡은 감수성이거나 혹은 외세 추종의 현대주의, 정교한 형식유희, 폐쇄회로 속의 관념 남발, 삶과 관계없는 예술이 주종을 이뤘다고 보는 것이다. 이는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삶은 살아있지 못하다”고 했을 때의 착종된 곤혹, 분명히 현실을 살아내고 있었건만 현실이 없던 나라의 기이한 상이다.
1970년대 ‘현실동인(오윤, 임세택, 오경환)’의 위대한 각성을 구출해내야 할 필요가 여기에 있다. 김지하가 기초해 작성한 <현실동인 제1선언>은 ‘조형의 사회적 효력성 회복’이라는 제1강령에서 드러내듯 한국전쟁을 분기점으로 소멸해버린 프롤레타리아 미술운동 및 비판적 사실주의(리얼리즘) 미술론의 재건이라는 점에서 4.19혁명이 파생시킨 민족주의 논쟁과 민족문학 논의의 공명이었다. 비록 소수이고 막강한 권력 앞에 무력했지만 그들의 ‘현실의 발견’이라는 값진 성과는 ‘조형의 자율’이라든지 ‘심미성’이라든지 하는 당대 현대주의자들(아방가르디스트들)의 주장을 ‘미망’으로 돌리며 이것이 더 이상 존속될 수 없다는 정직하고 능동적인 주체의 선언이었던 것이다. 혹자는 전시회에 출품(무산)된 오윤, 임세택, 오경환의 작품들이 4.19혁명의 ‘군중’을 멕시코 벽화 양식에 담아 재현하고 있는 사실을 들어 ‘민족적 형식’에까지 도달한 무엇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고도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발표공간을 가질 수 없어 잘 알려지지 못했던 당대의 청년 오윤의 예술은 오늘날 ‘민중미술’의 틀 속에서 다루는 의미로서의 그 민중미술이 아닌 ‘진짜 민중미술’로, 또한 오윤은 진짜 민중적 속성을 주목한 작가, “민중의 삶의 호흡과 가락, 그들의 한과 슬픔, 기쁨과 생명력이 배어있는 소리와 춤사위를 좋아해 민중의 영적인 것, 신령스러운 것을 체현 하려 했던 작가”3)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을 얻는다.

엄밀히는 오윤의 1980년대적 성취로 기록돼야겠지만, 이를 이 지점으로 끌어와 말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오윤의 판화들이다. 그의 판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무명의 민초들, 그들의 고통과 한,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몸짓을 압축된 도상으로 보여준다. 기층 대중(민중)의 ‘역사적인 몸’과 소통함으로써 한국적 리얼리즘을 정초하고자 했던오윤은 “영웅적 소비에트 리얼리즘 스타일의 민초의 모습이 아니라 지속되는 고통 속에 풀뿌리처럼 살아남아 다시 부활을 꿈꾸는 듯한”4)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삶의 미학을 열었던 것이다. 전위미술이라는 미망이 작가의 상상력을 축소시키고 급기야 파편화한 인간상에 도달할 것임을 불안감을 갖고 예견했던 그는 예술의 자율성이라는 금과옥조의 ‘신화’를 적발해낸 것이며, 소위 예술적 자율성 그 이전의 삶의 타율성이라는 긴 그림자, 즉 현실 속에서 억압되고 추방되고 소외된 것들의 목소리를 들었던 셈이다.

이것이 선언 이후의 1970년대가 사실상 또다시 ‘폐절기’였다지만, 결코 역사 이래로의 숱한 정치적 억압 속에서도 납작 해지지 않는 ‘민중미술’의 원천이다. 1972년 김윤수의 ‘생의 진실과 자유 그리고 휴머니즘을 근거 삼아 인간과 현실의 풍부함을 다시 발견’하자는 요청과 1975년 원동석의 ‘민중예술 이란 민중 속에서 진실을 찾고 확인하는 예술, 민중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예술’이라는 제창은 결코 10여 장 남짓의 인쇄 된 종이 무게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비로소 ‘민중미술’의 의미 있는 이름을 갖는다. “민중미술은 민족을 수탈하고 갉아먹는 세력인 ‘외세’, 그리고 민족 구성원인 민중을 억압하고 저해하는 세력인 ‘독점세(력)’와의 싸움, 즉 아름다운 삶을 저해하는 어떤 세력과의 싸움도 주저하지 않는 용기 있는 삶을 위한 그 힘의 생동력을 창출하는 살아있는 매체 혹은 실천”5)인 것이다.

▲주재환, , 캔버스에 유채, 201x152cm, 1980 ⓒ terms.naver.com

▲주재환, <몬드리안 호텔>, 캔버스에 유채, 201x152cm, 1980 ⓒ terms.naver.com

▲오윤, , 캔버스에 유채, 131x162cm, 1982 ⓒ hani.co.kr

▲오윤, <가족Ⅱ>, 캔버스에 유채, 131x162cm, 1982 ⓒ hani.co.kr

‘현실동인’의 태동부터 ‘민족미술인협회’까지

1960년대까지의 ‘예술적 미망’을 흔들어 깨운 ‘현실동인’ 과 김윤수, 원동석의 1970년대는 오윤, 오경환, 이상국과 함께 1980년 민주화의 폭발적인 대행진을 예비하는 긴 몸부림의 기간이었다. 그것은 곧 민족미술인협회 20여 년의 족적이자 1969년 ‘현실동인’으로부터 본다면 30여 년의 부피를 갖는 연대기를 말한다. 이 연대기에서 살펴야 할 것은 ‘아름다운 삶을 위해 용기 있게 싸워야 하는 실천’인 예술이 왜 ‘시대정신’인지, 미학은 왜 아름다운 삶을 향한 ‘정치적 행위’인지에 대한 우리의 타성화된 오인을 새롭게 교정해 주는데 있다. 그것의 성쇄가 오늘 우리의 주제, ‘민중미술· (민중)미술’ 논의의 어떤 유효한 눈금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먼저, 1980년대 민주화의 대폭발이라는 민주화운동의 사회적 힘은 기존의 미술운동 개념을 질적으로 비약시키는 결과로 전환되었던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말하자면 ‘미술장르 안에서의 자기변화운동’ 정도의 것들이 민족의 현실과 민중의 생활현장으로 존재 이전을 꾀하는 폭의 확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1980년 이후의 세대, 광주의 아픔을 금기된 기억, 즉 억압된 실재계(The real)로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지식인 작가들에게 이는 곧 민중이 주체가 되는 미술로서의 민중미술이라는 개념의 내면화가 진행되고 있는 표징이기 도 했던 것이다. ‘시민미술학교’, ‘민속 미술교실’을 필두로 한 광주자유미술인협의회(광자협), 두렁, 땅동인, 시대정신과 같은 실천적 소집단들의 민중미술교육, 공장과 농촌미술활동, 대학미술운동, 판화운동 등 ‘민중의 바다로!’의 행렬은 민족사의 자각과 삶의 소외를 극복하려는 의심 없는 미학적 대의였던 셈이다.

1980년대 민중미술의 판도를 크게 두 가지로 대별한다 했을 때 그 한편의 모종의 키워드로서 ‘밑으로부터’의 미술문화운동, 함께 살아가는 민중을 위한 예술, 실용적이고 실천적인 열린 개념의 미술, 지역과 현장에서 역동적으로 생동하는 미술이라는 광자협, 두렁 등의 미술 소집단의 미학이 일정한 음역대를 점할 수 있었던 배경이 이와 같다. 그리하여 이와 대당관계를 이루는 나머지 한편, 현실과 발언(현발) 동인들은 ‘엘리트 중심의 미술’인 듯 은유되고 타블로(Tableau) 중심의, 전시장 미술의 경향을 지닌 집단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는 말 그대로 내부의 작은 차이를 침소봉대하는 분류가 되고야 만다. 예컨대 현발의 작가 주재환, 성완경, 강요배, 노원희, 김정헌, 민정기 등의 작품들은 서로 다른 시간과 이질적인 공간들이 상호 혼입되는 ‘시공간적 가소성’이 일상(의 환경)이 된, 따라서 그 속에서의 인간의 의식과 감각마저도 가소성을 내장하게 된 스펙타클(Spectacle) 사회에 대한 고발이다. 말하자면 예술가란, 예술과 전체 현실에 대한 공동적 체험의 바탕 위에서 작동하는 ‘신화’에 대해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야 하는 휴식할 수 없는 과업을 자임한 자라는 인식위에 서 있는 것이다. 또한 두렁, 광자협 등 민중론 쪽의 미학은 “미술인들만의 미술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미술이 되어야 한다.”6)면서 이 새로운 미술은 민주화운동과 함께 독재와 분단된 현실 안의 민중의 삶과 호흡하는 등 민중적 민족주의의 실현에 기여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전문 미술가들만의 전유물이었던 미술향유의 도구와 수단을 그들의 손에 쥐어주자는 것이다.

이들을 당대의 모더니스트 그룹의 예술에 대질시켜보는 것은 의미가 없지 않다. 1975년 그 때, 환원주의 단색조 미학, 5인의 한국 화가의 작품이 ‘백색 미학’으로 일본에서 작위를 수여받았다.《( 한국 5인의 작가 – 다섯 가지의 흰색전》, 1975, 동경화랑) 그리고 이후 그들 모노크롬 그룹의 전시들은《한국현대회화전》이나《한국현대미술전》이라는 제목으로 ‘ 한국의 현대회화’로 자칭 타칭되며, 1970년대의 성공신화가 되어갔다. 한국의 미의식을 ‘백색의 비애미’와 유사한 것으로 설정했던 그들의 미술은 1970년대 박정희 정권 제2기의 명실상부 근대화된 한국의 근대적인 미술, ‘한국적 미학의 토착화’로 공명되었던 것이다. 순수미술, 도의 경지, 은자의 노장사상의 추구와 같은 ‘역전된 신화’ 기제가 결과적으로 정치적 지지를 받았던 셈이다.

모더니즘 그룹에 대질시켜본 이 대목은 ‘미술사’, 곧 ‘서양미술사’ 적용의 문제를 지시한다. 해방 이후 현재까지도 “한국미술을 형성해온 광범위한 영역들, 창작, 미술이론, 비평, 교육, 전시기획, 감상 등에서 서양미술사가 지역을 초월하는 어떤 보편적 내러티브로서, 즉 지적 안정성을 담보하는 특권적 기제로서 작용해왔다.”7)는 기제를 다시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서구와 우리의 현실, 우리 현실과 추상미술 사이에서 생기는 모순 관계를 보지도 보려고도 하지 않는 비역사주의의 눈에 모더니즘은 더 커지고, 민중미술은 더 작아졌을 거라는 것이다. 예컨대 현발과 두렁의 벅찬 ‘투쟁’이 미학은 왜 아름다운 삶을 향한 ‘정치적 행위’인지에 대한 조용한 웅변으로 기억되는 이유다.

브레히트의 ‘서사적 인식을 낳는 연극적 소격효과’를 회화에 적용해, 리얼리즘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불과한 것인지라 예술가는 민중의 각성과 소통을 위하여 고대의 전통을 비롯한 어떤 수단의 활용도 주저할 일이 없다는 요지의 리얼리즘의 포용성이나 외연 확보를 더 마음에 두고 있었던 오윤의 미학, 한편 전통문화 계승 문제, 즉 민족적인 것, 민중적인 것에 대한 과잉 의식은 미술이 지닌 표현의 가능성을 향한 노력을 포기하게 하는 함정이 될 수 있는 염려를 하는 성완경이나 최민의 미학, 그 두 그룹 사이를 일러 넘을 수 없는 오독과 곡해를 주고받은 것으로 볼 것인가?

요체는 두렁의 김봉준의 ‘민중’이 역사적으로 억압받는 민족 구성원 대다수였던 당대의 민중 담론에 기반해 허위의 근대화로 삶을 쩍쩍 갈라지게 했던 시대를 신명과 소통으로 ‘하나’되게 했다는 것도 진실이고, 또 다른 리얼리스트 신학철의 <한국근대사>가 자기인식이라는 허위의 가면을 무섭게 질타하며 ‘지금 이곳의 불편한 진실’을 소환하곤 했다는 것도 진실인 것이다. 원동석의 표현대로 1980년대 민중미술은 “대외적으로 제국주의 문화의 영향권으로부터 해방하려는 민족문화의 기틀인 것이며, 대내적으론 계층적 지배관계의 구조를벗어나 공동체문화를 창조하려는 정당한 삶의 열망”8)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이다.

1998년이후, 포스트-민중미술에 남겨진 과제

민중미술이 1990년대 중반 이후로 ‘쇠퇴’의 길에 들어섰다는 것은 대개의 중론이다. 그토록 강한 국가의 존재와 싸워온 누적된 피로감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외환위기라는 초유의 사태 속에서 밀려들어 온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엉거주춤한 양보를 거듭한 채 시장의 권력에 적절히 대응할 수도 없게 되었던 난관이기도 했다. 여기에 미술 제도권의 그간 20여 년간의 변화상을 덧댈 수도 있을 것이다9). 우리는 이 시대에 ‘포스트 민중 미술가’로 불리기를 꺼리지만 어쨌든 그렇게 분류되는 몇몇 작가들과 민중미술이 다루지 못했던 지대에 있는 작가의 작업을 예시해 봄으로써 성찰을 시작해 볼 수도 있겠다.

플라잉시티, 함경아, 노재운, 임민욱, 배영환, 조습, 조해준, 김상돈, 고승욱, 송상희, 믹스라이스 등의 작업은 “국제적 아방가르드의 언어를 내재화한 한국적 비판성의 형식으로 발현”되었다고 소개되곤 한다.10) 그것은 대개 프로젝트에 기반을 둔 사회학적 리서치, 혹은 미시권력에 대한 탐사들이다. 또한 우리는 1990년대 이래로의 동양화단의 재기발랄한 파격의 예들, 대안공간들에서의 실험성, 코리안 팝, 뉴미디어, 관계미학, 포스트 페미니즘 등의 각각의 항목을 추가할 수도 있을 것
이다. 한마디로, 참여적 미술을 실행한 자들로서의 개념주의적 경향성을 띤 1990년대 이후 후세대 작가들이 출현해있다. 포스트 민중미술, 신세대미술, 후기개념미술, 이들을 일괄해 “민중미술의 대열에 끼이지 않고도 민중미술에 속하는”11) 작업이라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들에게는 분명 미덕이 있다. 이들에게는 시비 걸 수 없는 공공적 헌신이라는 도덕적 어드밴티지가 있고, 적절한 사회적 예술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필자는 여기에 고언을 덧붙이겠다. 그들은 대개 개념미술의 제도 비판적 경향을 선용한다지만 예술적 자율성과 사회적 맥락의 긴장 사이에서 잃어버린 세계와의 접점을 찾지 못하고 너무도 엄밀하게 각 단위를 세분화시키고만 있을 뿐인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 이른바 후기 구조주의의 학술적 정치관에 머물고 마는 경우가 종종 발견되곤 한다는 것이다. “저항하는 시늉만 하던 것이 이번엔 급진적인 분석만 하는 것으로”12) 돌아선 그 터닝포인트를 말함이다. 그것은 교묘하게 주체를 다치지 않을 안전한 장소로 존치시키는 현란한 기교를 부리곤 하는 것이다. ‘세계화’의 진실 그 황홀경의 커튼이 걷히지 않은 채 세계화와 성공모델, 전 지구화된 무대에서 성과 내기 등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로서 우리를 휘감고 있는 한, 자칫하면 ‘시장’의 충실한 소비자가 되는 줄도 모른 채 흡입구의 경사로에서 연기하는 어설픈 세계시민주의의 광대 꼴을 면하기 어려울 뿐이다.

그래서다. 우리는 위로부터의 민족주의, ‘관료형 공식 민족주의’에 이용당하지 않는 일도 시급하거니와 엉뚱하게도 국가와 민족의 위기가 여전한 우리 현실에서 아래로부터의 민족주의마저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탈민족/탈근대 담론은 경계해야 한다는 최열의 말이 답이다. 현실의 문제로부터 과거와 미래 사회의 핵심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실천성 말이다. 우리의 주요 모순을 빗겨가는 우회로는 그 아무리 멋져 보여도 허망한 수사일 뿐인 것이다 .

박 응 주 / 미술비평가


각주
1) 발터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최성만 역,『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폭력비판을 위하여』, 길,2008, pp.329-350.
2) 원동석,「 80년대 미술관의 새 흐름-70년대 미술을 넘어서면서」, 국립현대미술과 편저, 『민중미술 15년 1980-1994』, 삶과 꿈, pp.12-21.
3) 성완경,「 나의 춤은 꿈을 꾸는 동안 계속되었다-오윤과 민중미술」,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도록『오윤-낮도깨비 신명마당』, 컬처북스, 2006, pp.278-290.
4) 박소양,「 기억과 망각의 시각문화」,『 현대미술사연구』vol.18, 2005, p.52.
5) 최열,「 민중미술론의 전개」,『 시대 상황과 미술의 논리』, 한겨레, 1986, p.357.
6) 라원식, 김봉준,「 함께 나누어 누리는 미술」,『 민중미술』, 공동체, 1985, p.242.
7) 심상용,「 서양미술사, 왜 다시 읽어야 하는가?」,『 美術史學』, No.29, 2015, pp.287-310.
8) 원동석,「 1980년대 미술의 새 흐름」,앞의 글.
9) 국전과 같은 국가주도의 미술권력은 이제 국가·지자체의 문화재단, 지원기금, 공공미술 프로젝트, 비엔날레, 레지던시, 대형미술관, 경매회사, 대안 공간 등으로 권력을 넘긴 지 오래인 것이다.
10) 박찬경,「 민중 미술과의 대화」,『 문화과학』, no.60, 2009, p.160.
11) 성완경,「 1980년대 민중미술 시말기」,『 마지막 혁명은 없다』, 현실문화, 2012, p.201. 12) 크리 스 헤지스,『 진보의 몰락』, 노정태 역, 프런티어, 2013, p.218.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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