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호 테마서평: 조금 더, 게을러도 괜찮아] 좀 게을러도 괜찮아, ‘생각하는 게으름’이 중요해!

[1] 게으를 권리(폴 라파르그 저 · 차영준 역, 필맥, 2009)

[2] 게으름에 대한 찬양(버트런드 러셀 저 · 송은경 역, 사회평론, 2005)

[3] 피로사회(한병철 저 · 김태환 역, 문학과지성사, 2012)

그림1 게으를 권리, 폴 라파르그l_20141112162537

그림3 피로사회, 한병철

 

 

 

 

 

 

 

 

 

신성한 노동앞에 게으름 찬양이라니?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노동의 의미는 결코 신성하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만 해도 노동은 노예나 천민의 일이었다. 노동을 뜻하는 독일어 ‘ Arbeit’의 어원의 뿌리에도, 고아가 겪는 고통이 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언제나 그렇듯이 노동은 고역이다. 따라서 가능한 한 적게 하거나 하지 않을 수 있다면 좋다. 폴 라파르그(Paul Lafargue)도 “ 자신의 노동을 제공하고 돈을 받는 시민은 노예와 마찬가지고, 수년 간 감옥에 갇혀야 할 죄인”이었다고 했다[1].
부정적 의미를 갖고 있던 노동이 신성한 세례를 받은 것은 중세 종교개혁 이후부터이다. 칼뱅(Jean Calvin) 같은 개혁가는 “육욕과 죄를 위해서가 아니라 진정 신을 위해 부유해지도록 노동해야 한다”는 식으로, 노동을 통한 구원을 설파했다. 청교도적 노동윤리다. 막스 베버(Max Weber)는『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서 바로 이 청교도 윤리가 자본주의의 정신적 배경이라 했다.
이렇게 자본주의와 더불어 노동의 신성함이 강조되는 맥락에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 말라”는 노동 교리가 나왔다. 중세 내내, 또 초기 자본주의 때만 해도 수공업 노동자들은 주 4일 일했고, 하루 4시간 일했다. 그러나 이들이 임금 노동자가 되면 예사로 주 6일, 하루 15시간 노동했다. 이것이 현대 노동의 시작이 되었다.

▲tvN 드라마 ‘미생’에 등장하는 오상식 과장의 피곤한 모습은 현대의 피로사회를 잘 보여주고 있다. ⓒmediaus.co.kr

▲tvN 드라마 ‘미생’에 등장하는 오상식 과장의 피곤한 모습은 현대의 피로사회를 잘 보여주고 있다. ⓒmediaus.co.kr

노동의권리vs 게으를권리

그 뒤 ‘노동과 기아’의 선택 앞에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에게 “노동의 권리”를 요구한다. 종종 발생하는 공황 국면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다. “자본가들이시여, 제발 우리에게 일을 주시오”[1] 이것이 1848년 혁명적 노동자들의 구호였다. 그러나 일자리, 즉 노동이야말로 자본가들에겐 축적의 수단이다. 노동이란 원료를 가공하고, 상품으로 변환하는 활동이다. 그런 상품을 많이 만들어 팔수록 이윤이 증가한다. 반면 노동자는 궁핍해졌다. 그래서 라파르그는 도발적으로 “게으를 권리”[1]를 주창했다. “프롤레타리아는 하루에 3시간만 일하고 나머지 시간은 여가와 오락을 즐기는 삶에 익숙해져야 한다”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역시 “게으름 찬양”[2]을 한다. “하루에 네 시간 이상 일하도록 강요하지 않는 세상에서는, 과학적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것을 탐닉할 수 있을 것이며 화가들은 작품성만을 추구하더라도 굶지 않으면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이다”

 노동사회vs 피로사회

오늘날 우리는 모든 것이 노동 중심으로 도는‘ 노동사회’에 산다. 아이의 교육 역시 쓸모 있는 노동력(노동능력과 노동의욕)의 측면에서 우수 등급이 되려고 시간과 돈을 투자한다.
그러나 이 노동사회는 결국, 만인을 피로로 내몬다. ‘피로사회’[3]의 탄생이다. 과연 어떻게 해서 그런가?
처음엔 자본가 내지 감독관이 노동자들에게 직접 채찍질을 해서 노동 규율을 강요한다. 때로 도망치는 노동자도 있으며, 이들은 거지나 방랑자가 되기도 한다. 도망친 이들의 대부분은 감독관에게 다시 잡혀오거나 굶주림 때문에 원점 복귀한다. 처음엔 좀 나은 공장으로 옮길 수도 있었지만, 모든 공장에 혹독한 규율이 확립되면 별 대안이 없다. 어디라도 마찬가지니까. 이 완벽한 노동통제가 자본가의 ‘플랜 A’다. 그렇게 대공장이 탄생한다.

하지만 노동자들의 경험과 시간의 공유가 많아지면서 집합의식도 발전한다. 그 최고 단계가 계급의식이다. 노동자 계급은 그렇게 탄생한다. 파업과 태업, 저항과 폭동, 그리고 혁명과 변혁 이 노동자의 ‘플랜 A’였다. 러시아 혁명은 그 표본이다.

자본가들이 이를 좋아할 리 만무하다. 그들은 군기 잡기에 나섰고 ‘플랜 B’를 고안한다. 19세기 내내 기계 시스템을 도입했고, 1910년경 프레드릭 테일러(Frederick Winslow Taylor)는 ‘과학적 관리’를 개발했다. 헨리 포드(Henry Ford)는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도입, 노동의 주도권을 확립하려 했다. 그 뒤 노동통제를 위해 각종 복지제도와 참가제도까지 도입한다. 이제 노동자도 계급 해방이 아니라 고용안정, 임금인상, 승진기회, 경력개발, 복리향상, 경영참가 등을 ‘플랜 B’로 삼는다.

노동의 (대자본) 전략이 소통과 연대라면, 자본의 (대노동) 전략은 경쟁과 분열이다. 즉, 노동자들이(성별, 숙련별, 학력별, 직종별, 공장별, 산업별, 지역별, 국적별, 인종별 등으로 나뉘어) 서로 경쟁하고 분열할수록 자본의 대노동 지배는 효과적이다. 특히 성과별 경쟁을 유도하는 인사 제도는 효과가 크다. “21세기의 사회는 규율사회에서 성과사회로 변모했다”[3] 성과주의가 정착하면 더 이상 타율적 군기 잡기는 필요 없다. 이제 노동자 스스로 자율적 군기 잡기를한다. 모두가 “나는 할 수 있어!”라며 자신의 극한까지 심신을 몰며 채찍질한다. “긍정성의 과잉”이다[3]. 일중독이 대중화된다. 그리하여 노동자들이 스스로 자신을(또 상호 간) 피곤의 극한 내지 소진(번아웃)까지 몰아가는 사회, 즉 ‘피로사회’가 탄생한다.

 

축적의 시간vs삶의 시간

미햐엘 엔데(Michael Ende)의『모모』는 시간 도둑에 관한 얘기다. 사람들의 모든일상에서 뭔가 일을 빨리 처리하지 않으면 그건 사실상 시간을 도둑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이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은행원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절약해 일을 더 빨리, 더 많이 하라 한다. 그 절약된 시간을 시간 금고(은행)에 저축하면 이자까지 준다. 기발하다.

그러나 사태의 진실은 다르다. 인위적으로 절약한 시간을 은행에 축적하는 일이야말로 시간 도둑질이다. 일례로, 동네 식당을 찾는 손님과 그 주인이 한가하게 인간적 대화를 나누던 풍경이 변하여 이제는 30분마다 기계적으로 손님을 대접한다. 이발소도 마찬가지다. 속도전이다. 이제는 사람들에겐 사는 재미가 없다. 서로 얘기를 들어주고 공감하던 여유도 사라졌다. 요컨대, 돈벌이, 즉 축적의 시간이 삶의 시간을 도둑질한다. 이것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이제 우리의 과제는 도둑맞은 시간 되찾기, 만성 피로나 일중독에서 벗어나 한가하고 여유롭게 삶을 즐기기, 그러면서도 ‘나 홀로’ 잘 살기보다 ‘더불어’ 행복한 사회 만들기 등이다.

노동은 삶의 필요를 해결하는 창조이기도 하고, 심신의 에너지와 삶의 시간을 쓴다는 면에서 고생이기도 하다. 따라서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과 더불어 인간적 욕구 충족에 필요한 사회적 노동시간을 줄이면서도, 누구나 그 혜택을 고루 누리게 시스템을 바꾸는 것이 우리의 과제다. “현대의 생산 방식은 우리 모두가 편안하고 안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런데도 우리는 한쪽 사람들에겐 과로를, 다른 쪽 사람들에겐 굶주림을 주는 방식을 선택해 왔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계가 없던 예전과 마찬가지로 계속 정력적으로 일하고 있다. 이 점에서 우리는 어리석었다. 그러나 이러한 어리석음을 영원히 이어나갈 이유는 전혀 없다”[2]

즉, 한쪽엔 과로와 일중독이, 다른 쪽엔 실업과 굶주림의 공포가 병존하는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고 ‘모두’ 여유로운 삶을 살려면 우리가 가진 경제적, 기술적 생산력을 민주적 방식으로 배분하고 실현할 ‘새 정치’가 필요하다. 기본소득, 생활임금, 격차 해소, 자원 재분배, 생태 전환, 개성 있는 평등 교육, 노동시간 단축, 일자리 나누기, 산별 교섭 등이 그 내용이다.

바로 이 새 정치를 위해서라도 우리는 그간 깊이 내면화한 노동의 신성함 이데올로기, 근면 · 성실(성과주의) 규범, 나아가 ‘조금만더 열심히 하면, 선진국’과 같은 국가주의 및 경쟁주의를 털어내야 한다. 즉, 한편으론 단 한 번밖에 없는 내 인생, 행복하게 살자(YOLO· You Only Live Once) 식의 삶의 주체성도 필요하고, 다른 한편으론 (경쟁과 이윤 원리가 아닌) 협동과 공생 원리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경제 시스템을 만들겠다는 삶의 연대성 역시 필요하다. 생각 없는 부지런함이 아니라 ‘생각하는 게으름’이 절실한 까닭이다. 이것이 곧 노자의 무용지용(無用之用), 즉 “쓸모없는 것의 쓸모”[3]가 아닐까?

강 수 돌 /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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