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호 영화비평: <덩케르크 Dunkirk>(2017) <덩케르크>의 전쟁 재현 방식과 의미에 대하여

크리스토퍼 놀란의 <덩케르크 Dunkirk>(2017)는 개봉하기 전부터 전세계적으로 많은 기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2차 세계대전 초기 연합군 최대 규모의 작전이었던 덩케르크 철수를 실사촬영을 선호하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만든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는 이 영화를 덩케르크 해안에서 촬영했으며 고증을 위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던 당시의 군함과 전투기를 동원하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이 영화는 전체분량 중 70%가량을 아이맥스로 촬영하여 상업영화 사상 최대 분량의 광활한 화면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이 영화에 대한 국내의 평론도 재현의 방법을 중요하게 평가하고 있다. <덩케르크>는 이전의 영화들과 달리 전장으로 가는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으며 그 방법론에서 떠올릴 수 있는 생존이라는 핵심도 곱씹어볼 만하다는 게 많은 평자들의 주장이다. 이들 주장의 근거는 아이맥스로 촬영된 전장의 풍경인데, 이것의 특징은 이전 전쟁영화와 달리 스펙타클한 전투 장면이 없다는 것이다. 전쟁영화 관습의 빈 자리를 채우는 것은 아이맥스라는 광활한 캔버스 위에 새겨진 생존의 정언명령에 적극적으로 응답하는 인물의 행위다. 그래서 <덩케르크>는 전쟁의 승패보다 전장에서 무사히 귀환하는 그 자체의 중요성을 부각시키는 영화라는 것이다. 이 과정을 이름 없는 어린 병사가 수행한다는 점에서 전쟁의 리얼함을 담보한다는 것이다. 전쟁이란 지휘관이나 용감한 몇몇 부대원이 하는 게 아니라 대부분 이름 없는 병사들이 수행하는 과정이란 의미이고 그들에게 영화를 이끌어갈 자리를 선뜻 내어주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상찬은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양식(style)의 표층만 평가한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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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한 전쟁의 기만적 실체

<덩케르크>가 전쟁의 폭력을 재현하는 것에 관심이 없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잔인한 장면만 없을 뿐이지 기존 전쟁영화가 추구했던 욕망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전쟁의 풍경을 시각적으로 소비하고자 하는 욕망인데 <덩케르크>는 그것을 두 가지 양식으로 다듬어 새로운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나는 영화의 가장 핵심적 양식으로 동반적 시점이다. 동반적 시점은 카메라가 한 인물을 따라다니며 인물의 시선에 관객들의 시선을 일치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인물의 시선을 통해 관객이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인물이 보고 듣는 정보와 동일한 것을 관객이 획득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는 해변에서의 연합군이 독일군 급강하 폭격기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다. 영국으로 데려다줄 배를 기다리며 비무장으로 해변에 서 있는 병사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독일군 급강하 폭격기를 피해 이리저리 달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해변에 몸을 숨길만한 엄폐물 따위는 없으며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모래사장에 얼굴을 묻고 적기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방법뿐이다. 카메라는 그들의 공포와 혼란을 동반적 시점으로 포착했다가 그들이 모래사장에 엎드려 있는 것을 부감으로 포착해서 연달아 보여준다. 물론 이 장면은 아이맥스로 촬영되었기 때문에 전장의 공포가 더욱 부각된다. <덩케르크>를 둘러싼 평가, 즉 리얼한 전장을 보여주고 있다는 주장은 여기에 기초한다.

<덩케르크>는 대규모 작전이나 악마화 된 적들과 싸우는 것을 보여주는 대신 거대한 폭력으로부터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인물의 행동에 집중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덩케르크>가 휴머니즘에 대한 의미를 품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은 전쟁이라는 폭력을 재현하는 행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다. 분명 재현과 서사의 표면적인 측면, 즉 고증에 충실하고 그 날에 있었던 사건을 재현한다는 행위는 사건을 간접적으로 체험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만든다. 하지만 전쟁 체험은 거기까지다. <덩케르크>의 표층은 잔혹함의 스펙타클을 피하는 것으로 자신이 재현하고자 하는 역사의 폭력을 외면함으로써 윤리적 재현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서사의 심층은 영화가 외면한 전쟁의 폭력성을 욕망하고 있다. 그런 전쟁의 참혹함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살아남는 것은 숭고한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이다.

영화가 추동하는 이런 욕망은 공중전을 촬영하는 양식을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공중전 장면은 <덩케르크>의 절반을 차지한다고 말해도 될 만큼 이 영화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감독 스스로가 밝혔듯이 이 장면은 2차 대전 영국 공군의 실제 전투기를 어렵게 구해 촬영한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라 공중전을 더욱 더 실감나게 보여주기 위해 전투기 조종석을 개조해 아이맥스 카메라를 장착했다. 그리하여 관객은 영국군 스핏파이어(Spitfire)의 파일럿이 되어 독일군 메서슈미트(Messerschmitt Bf 109)의 뒤를 쫓는 시각적 체험을 하게 된다. 여기에 극적인 장치로 영국군을 구조하기 위한 민간인 선박 하나를 데려다 놓는다. 독일군의 전투기는 그 선박을 공격하려 하고 영국군의 전투기는 그것을 저지하려 한다. 파일럿의 시점과 조준경에 잡힌 메서슈미트 그리고 바다 위에 무방비로 떠 있는 배를 번갈아가며 보여주는 쇼트의 조합은 극적 긴장과 직조해 긴박함을 더욱 고조시킨다. 이 장면은 영화가 마련한 시선의 위치가 영국군의 것임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전투기를 격추하는 경험에서, 즉 타자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동참하는 구조를 가진 이 영화를 생존과 휴머니즘의 영화라고 평가하는 것은 위선적인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독일군과 전쟁의 참혹함을 애써 재현하지 않은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가 아닐까. 시선의 위치, 즉 이데올로기적 주체의 고결함과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으로 말이다.

부인당한 타자와 표백된 허상

이러한 측면은 영화가 재현한 독일군 전투기를 통해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앞서 언급했듯이 <덩케르크>를 만들기 위해 감독은 고증에 대한 강박에 가까운 집착을 보여주었다. 실제 덩케르크 철수에 사용되었던 얼마 남지 않은 민간인 선박을 수소문해 20여 척을 촬영에 동원하였으며 파일럿의 소품까지 당시 기록에 근거하였다. 덩케르크의 실제 해변에서 촬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공중전 만큼은 고증에 대한 감독의 신념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장면에서 독일군 전투기는 실제 작전에서 운용하지 않았던 도장(塗裝)을 가지고 있다. 실제 기록과 다른 도장을 한 기체를 사용한 것에 대해서 감독은 “영화를 보는 관객이 독일군을 구별하는데 도와주기 위해” 라고 밝힌 바 있다. 한마디로 피아식별의 선을 확실히 그은 셈이다. 관객이 독일군 전투기를 격추하는 영국군 파일럿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점과 감독의 말을 결합해 생각해 보면 이 영화가 품고 있는 욕망의 실체를 파악할 수 있다.

어떤 이는 영국인 감독이 영국적인 소재로 영국 배우와 함께 만들었으니 이러한 영화적 양식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 영화를 둘러싼 담론이 영국이라는 기호를 삭제하고 전쟁과 휴머니즘 같은 보편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게다가 그것은 어느 순간 국제적으로 작가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감독의 명성과 결합해서 위상을 더해만 간다. 여기서 더 나아가 이 영화를 감독의 작가적 인장의 흔적을 찾기 위한 알리바이로 사용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가 재현의 측면에서 관객들에게 전쟁을 대리 체험 하도록 만든다는 것이고 그것은 새로운 감각을 직조한다는 점이 아닐까.

전쟁을 재현한 영화가 주는 감각에 대한 것은 전쟁과 영화의 상관관계에 천착한 폴 비릴리오의 의견에서 착안했다. 그는 전쟁에 사용되었던 광학기술이 영화에 그대로 적용되어 우리의 지각체계를 바꾸어 놓았다고 말한다. 전쟁의 광학기술이 영화에 쉽게 전이되었던 이유는 영화가 등장한 시기가 바로 1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돌던 때였고 전쟁과 영화 모두 최신 과학기술의 각축장이기 때문이다. 이 광학기술의 핵심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포격하기 위한 원거리 측정기술이나 정찰기의 카메라가 바로 그것인데 그 기술로 인하여 전쟁에서의 적은 더 이상 실체를 지닌 인간이 아니라 지도 위의 점에 불과한 존재로 전환되었다. 영화는 그런 지각의 전환을 불러온 광학기술을 거의 그대로 수용하여 대중의 공포와 심리를 직조하는 최전선에 배치된 무기가 되었다. 적 혹은 타자를 같은 인간으로 재현하지 않는 기술이 당연한 것으로 통용되며 그러한 기술이 만들어낸 감각체계는 우리의 지각을 구성한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덩케르크>가 가지고 있는 영화적 기술과 전쟁의 해석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덩케르크>는 영국인들을 제외한 모든 이들의 죽음, 심지어 그들이 무사히 철수할 동안 도시 외곽에서 방어전투를 벌였던 동맹군의 모습까지 망각함으로써 전쟁을 영국의 명예로운 서사시로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그것은 타자인 우리를 허락하지 않는 곳이기도 하다.

백 태 현 / 동국대학교 국제학생센터 강사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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