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2호 문화비평: SF 디스토피아의 철학적 기초] 과학기술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최근 4차 산업혁명에 관한 이야기가 회자되고 있다. 학계나 언론계는 물론이고 지난 대선 후보들의 토론에서도 주요 정책 의제로 떠오른 것을 보면, 현실 담론의 큰 흐름임에 분명하다. 4차 산업혁명이란 초연결성(Hyper-Connected), 초지능(Hyper-Intelligent)을 구현한 기술, 곧 사물인터넷(IoT), 클라우드 같은 정보통신기술(ICT), 빅데이터, 인공지능 등의 과학기술을 통해 야기된 대규모의 사회변혁을 일컫는다. 과학기술에 의해 인간 삶의 구조가 ‘혁명적으로’ 뒤바뀐다는 것이 당연시되는 것을 볼 때마다, ‘정말 그럴까?’라는 의문은 남는다. 예컨대 사랑의 통신기술이 편지, 삐삐, 휴대폰, 스마트폰으로 변한다고해서 미숙한 사랑이 성숙해지느냔 말이다. 그럼에도 과학기술에 의해 혁명적 변화가 초래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기술 개념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다. 통념상, 기술이란 인간의 특정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도구, 수단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기술은 결코 그런 것일 수 없다. 한갓 도구나 수단에 불과한 것에서 세계와 인간마저 변형시킬 수 있는 역량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통찰을 도입하면, 과학기술은 오직 ‘진리의 힘’ 덕분에 (1, 2, 3, … n차) 산업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

과학기술은 진리에서 발원한다. 그렇기에 인간의 시선, 문화, 생활세계 전체를 바꿀 수 있는 막강한 힘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고 과학기술이 진리로 이어지는 유일한 길이라 말할 수는 없다. 절대(絶對)의 유일한 길을 참칭하자마자 거짓에 빠진다. 과학기술은 복수의(plural) 길들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니체는“우리 19세기를 특징짓는 것은 과학의 승리가 아니라, 과학에 대한 방법의 승리”라고 말했다. 진리를 찾는 시도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근대가 시작하면서 새로운 과학적 방법론(methode의 어원적 의미가‘길’이다)이 독주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과학적 방법론의 핵심은 무엇일까? 앎의 대상이 수학적 언어로 답하지 않을 수 없게끔 통제된 실험과 관찰로 강제하는 것이다. 보편적으로 재현 가능한 실험적 증거를 통해 가설을 입증하는 방법이다. 결국 로고스(이성, 언어)로 자연을 포박하는 방법이다. 그렇다면 과학적 방법론에서 프로크루스테스(procrustes)의 침대가 연상되는 것이 무리한 억측만은 아닐 것이다. 모든 것들이 이 침대 위로 눕혀진다.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과학기술은 초-현실적인 지적 욕망(고대 그리스 철학)과 그 욕망을 공적 시선 앞에서 실연해 보이려는 마술적 욕망의 결합체다. 우주로 배를 띄우고 도심의 밤을 대낮처럼 바꾼 테크놀로지는 무시할 수 없는 위력을 만인에게 입증했다. 자연의 베일을 벗기는 섹시하고 스펙터클한 공연에는 대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래서인지 현대인들은 누구나 과학이 진리임을 굳게 믿는다. 그러나 이 믿음은 아직 미신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과학기술이 남긴 그림자를 사유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휘황찬란한 과학기술이 감춘 것과 망각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까지 고려할 때에야, 과학은 비로소 명실상부한 진리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의 한계에 대한 성찰이야말로 한갓 마술과 미신 따위로 전락하는 것을 막는 과학의 마지노선이다.

222-0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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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토피아적 상상의 원천

과학적 방법론이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감추고 있는 소박한 가정들을 두 가지만 꼽아보자. 첫 번째 가정은 인간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결국 알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과학은 진행된다. 이런 가정은 충분히 가능하지만, 가능한 만큼 부정될 수도 있다. 자체로 입증 불가능한 가정이지만, 이 위에서 꼼꼼한 과학적 검증 절차가 진행된다. 이 가정에 따르면, 종국에 자연이란 인간이 생각하고 상상한 대로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 알 수 없는 것을 철저히 배제했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정교한 수학적 질서로 세운 가설을 가지고 자연에 다가가‘네 정체가 이게 맞지?’라고 물으면서, 마치 영리한 검사가 피의자를 조사하듯 요리조리 다그치며 몰아세운다. 특정 잣대로 측정된 것만을 알 수 있는데, “측정될 수 있는 것이 현실적(막스 플랑크, Max Planck)”인 반면 측정되지 않는 것은 비현실적인 것이다.

두 번째 가정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제작된 산물이라는 것이다. 즉 반복해서 재현·제작할 수 있는 설계도면이 있다는 가정이다. 물론 제작 주체가 꼭 인간일 필요는 없다. 제작 주체가 누구든, 그보다는 합리적인 모형을 바탕으로 만물이 만들어졌다는 점이 중요하다. 플라톤의 그 유명한 이데아는 실상 존재의 설계모형을 뜻한다. 제작을 통해 존재를 해명하는 유구한 전통의 끝자락에 생명의 설계도, 즉 유전자 지도가 있다. “내가 창조할 수 없는 것은 이해된 것이 아니다(리처드 파인만, R. P. Feynman)”라는 말도, 유전자 콜라주를 통해 새로운 생명체를 제작하는 합성생물학(Synthetic Biology)의 등장도 같은 맥락에 있다. 제작 모형에 따라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에, 과학과 기술이 쉽게 호환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과학의 두 가정이 틀렸다고 주장할 생각이 전혀 없다. 오히려 두 전제 위에서 눈부시게 발전해 가는 과학을 존중한다. 두 가정을 올곧게 밀고 나가는 것이 과학의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다만 과학의 마술적 위력에 압도당해, 진리의 또 다른 길들에 대해 전혀 사유하지 못하는 위험을 염려할 뿐이다. 과학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은 없으며 아무 의미조차 ‘없다’라고 선언한다든가, 아니면 과학적 설명만이 믿을 만하며 과학이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수 있다고 허풍을 치는 것에는 단호히 반대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과학이 진리에서 유래한 것임을 기억한다. 더불어 그 진리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또렷이 직시하려한다.〈터미네이터〉, 〈매트릭스〉등에 등장하는 세계, 즉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SF 디스토피아는 바로 과학적 진리의 냉혹한 가치중립성에서 발원한 것이다. 성경의 진리는 인간을 자유롭게 한다지만, 과학적 진리는 그것을 약속하지 않는다.

버림받은 것을 숨기려고 버렸다면?

과학적 진리는 보편성을 추구한다. 여기에서의 보편성은 특수성을 과감히 버리는, 추상적 초월을 통해 확보된다. 높은 곳에서야 부분을 아우르는 전체 모습을 관조할 수 있듯이, 보편의 지평을 확보하려면 발 딛고 있는 특수한 지점으로부터의 (수직적인) 지적 도약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인간 자신마저도 객관화된다. 이것은 마치 지구를 탈출하여 우주에서 지구를 바라보는 것과 유사하다. 우주선에서 보면, 조그마한 지구에서 벌어지는 인간사는 한없이 덧없는 것처럼 보인다. 흥미롭게도 서양 중세인들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사실 그들은 지상의 인간을 떠나 천상의 신을 찾았으며, 과학 이전에 이미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난 이들이었다. 단테는『신곡』의 「천국」22곡에서 하늘 아래의 지구를 보면서 “그 초라한 모습에 웃음이 나올 정도”이고 “지구를 하찮게 생각하는 견해에 최대한 찬성”한다고 말한다. 인간을 초월하자마자 인간적인 가치들은 모두 무의미해진다. 허무(Nihil)는 초월적 보편성의 문턱에서 지불해야만 하는 입장료다.

탁월한 과학 교육자인 김상욱은 “생물학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김상욱, 『김상욱의 과학공부』, 동아시아, 2016, 13쪽)고 말한다. 같은 논리대로라면, 유전자로 설계되어 있다는 점에서 박테리아와 인간은 평등하며,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돌덩이와 인간은 평등하다. 궁극 원리로 삼라만상을 꿰뚫으려는 보편 초월적 시선의 필연적 귀결이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한다. “그 수많은 생명체 가운데 나와 같은 종(種)을 만나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다른 인간을 사랑해야만 하는 우주론적 이유이다”(같은 곳). 왜 기적처럼 희귀한 것을 사랑해야만 할까? 번개 맞는 일이 희귀하다고 그것을 사랑할 수는 없으며, 더욱이 사랑해야만 한다고 강변할 수는 없다. 평등과 사랑, 그리고 그것들의 당위는 실상 과학의 진리가 아니다. 인문학의 진리다. 인간은 H2O와 단백질만이 아니라 의미와 사랑을 먹고 산다.

과학의 가치중립성, 보편성, 객관성은 진리를 향한 한 가지 길의 특성이다. 비록 진리의 길이더라도, 게다가 경제적 이익과 삶의 편리와 지적 즐거움까지 제공한다하더라도, 이 길만 고집해서는 안 된다. 우주의 절대 침묵과 공허만 가득한 곳에서 인간은 결코 오래 거주할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그래비티〉,〈인터스텔라〉,〈마션〉등 우주여행을 다룬 SF영화에 열광한다. 영혼의 고향이 하늘 저편 어딘가에 있는, 보편적인 이데아 세계라고 보았던 플라톤의 후예들답다. 모험심 가득한 그들은 지구를 쉽게 저버린다. 너무나도 쉽게, 육체를 버리고 증강된 인공장기(지능)로 대체한다. 이 문제에 관한 한, 나는 과학이 아닌 시적 진리의 길을 따를 것이다. “버림으로써 사라지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 오직 버림받은 뒷모습이 있을 뿐이다”(고정희, 「버림받은 지구, 그 이후-암하레츠 시편 19」중에서).

김 동 규 / 철학자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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