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호 영화비평: <명량>(2014)] <명량>, 이상적인 영웅이라는 기호 만들기

202-08-1 (1)

 

김한민 감독의 <명량>(2014)에 대한 관심이 여전히 뜨겁다. 분명 이 영화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은 주목을 받게 될 것이고 지금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너무나도 놀라운 속도로 흥행 기록을 경신했으며, 이 영화를 둘러싸고 하나의 현상까지 등장했기 때문이다. 주위를 한번 둘러보자. 영화의 인기에 힘입어 현충사를 방문하겠다고 결심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난중일기』를 정독하겠다는 사람도 하나둘 씩 등장했다. 이러한 현상에 흥미를 느낀 사람들은 저마다의 잣대를 들고 흥행요인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배우의 뛰어난 연기가 새로운 흥행 기록을 이끌었다고 주장했으며, 누군가는 영화가 묘사한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을 기록의 원인으로 손꼽았다. 대기업의 기형적인 배급구조도 무시할 수 없다고 주장한 이들도 등장했으며, 사회적 갈등에 지친 대중들의 정신적인 휴식처를 영화가 제공해 주었다고 외치는 이들도 나타났다.  하지만 이러한 담론들은 <명량>이라는 텍스트 자체에 대해서 아무 것도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이 글은 이러한 시선보다 영화 텍스트 자체에 집중해 보기로 한다. 그러기 위해서 <명량>이 이순신 장군과 명량대첩을 바탕에 두고 있다는 자명한 사실을 다시 돌아보면서 시작하고자 한다.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과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소재로 삼았다는 것은 서사적인 측면의 즐거움을 어느 정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한다. 쉽게 말하자면 역사가 스포일러인 셈이다. 게다가 그동안 이순신 장군을 소재로 했던 영화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몇몇 불리한 지점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명량>은 기존의 영화들이 도달하지 못한 곳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기능적인 캐릭터와 기의 없는 기표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명량>이 가지고 있는 외형을 파악하는 것이다. <명량>은 명량대첩을 중심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최민식)을 비롯해 다양한 인물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것에 주력하고 있으며, 후반부는 전투 장면을 스펙터클하게 그리는 것에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이야기했듯이 전반부의 모습은 정교한 서사의 포물선보다 상황과 위기의 순간들을 단순하게 나열한 인상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이순신의 대사는『난중일기』의 특정한 구절을 떠올리게 만든다. 결정적으로 부족한 지점은 캐릭터가 가지고 있는 평면성이다. 이순신 장군의 부하 장수를 포함해 많은 등장인물이 전반부에 등장하는데, 이들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서사의 필요에 의해 잠시 영화 속으로 견인되어 들어온다. 영화 속에서 탐망꾼 임준영(진구)과 왜군 진영의 첩자인 준사(오타니 료헤이)의 경우를 떠올려 보자. 카메라
는 관객에게 이들이 누구이고 어떤 역할을 가지고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이들은 갑자기 등장했다가 조용히 사라지거나 서사의 비약을 감행하기도 한다. 또한 이순신 장군의 아들인 이회(권율)는 영화 내내 이순신의 통찰력과 판단력을 감탄하는 역할로만 등장하고 있다. 이처럼 전반부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는 기능적이고 도구적이라고 단정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를 보고 나온 이들은 이순신의 감동적이고 유명한 대사인“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만 기억하게 된다. 그만큼 강렬하다. 하지만 이 강렬함의 정체는 드라마나 영화적 표현에 의한 것보다 관객의 배경지식에 존재하던 것이 이미지로, 그러니까 소설이나 역사책에서만 접했던 것들을 직접 보고 듣는 것에서 비롯한 강렬함이다. 그 강렬함이 가장 극대화 되는 것은 후반부의 전투 장면이다. 이 말을 오해해서는 안 된다. 강렬함이 극대화 된다는 의미는 상상했던 전투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도 무려 61분이나 눈앞에 펼쳐진다. 하지만 오로지 순수한 전투 장면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잠시
전투 장면의 편집을 떠올려 보자. 울돌목에 일자진을 구성한 이순신 장군은 눈앞에 왜군 수장 도도(김명곤)와 와키자카(조진웅), 해적왕 출신 구루지마(류승룡)가 이끄는 왜선 330여 척을 맞이하게 된다. 장수들을 뒤로 하고 이순신의 대장선이 홀로 적진으로 뛰어든다. 이때 영화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과 왜장의 모습을 번갈아 가면서 보여준다. 말하자면, 이순신 장군이 전술을 구사하면 그 다음 장면에 왜장이 등장하여 앞 장면의 전술을 설명해 준다. 그래서 이순신이 아무말 없이 배를 돌리면 왜장이 진법과 파도를 설명하는 괴기한 장면이 중간 중간에 펼쳐진다. 전술과 상황을 설명하는 왜장의 모습과 달리 이순신 장군은 자신의 부하들에게 전략을 설명하지 않는다. 오로지 부하 장수들에게 명령만 내릴 뿐이다. 이때 편집의 순서는 명령을 내리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이 먼저 등장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부하의 난감한 표정이 이어진다. 그러면 저 멀리서 대치하고 있는 왜장들이 놀라서 전략 또는 파도를 읽어내는 쇼트가 등장한다. 즉 카메라가 비어있는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보여주면 편집의 맥락에서 의미가 발생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전투 장면에서의 이순신 장군은 텅 비어 있는 기호처럼 보이며, 장면이 어떤 순서로 등장하느냐에 따라 여러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전투장면에서 왜장들의 리액션 쇼트가 편집을 통해 등장하면, 이순신 장군은 뛰어난 전략가로 재탄생하게 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부족하다.

 

의미의 완성

영화는 이상적인 지도자의 의미를 만들기 위해 하나의 장치를 더 추가한다. 그것은 바로 영화 속에서 절벽위에 올라 전투를 바라보는 백성들의 시선이다. 헌데 이들의 역할은 스크린 밖의 관객의 역할과 비슷하다. 마치 영화를 통해 전투를 관전하는 관객처럼, 이들도 절벽 위에서 전투를 바라보고 있다. 관객을 대신해 영화 속에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몇몇 장면을 떠올려 보자. 이순신 장군은 전략을 설명하는 대신에 명령을 부하에게 지시하고 있으며, 바다 위의 배라는 특수성으로 카메라 공간도 조금씩 엇나가 있다. 이 부족한 부분을 일차적으로 채우는 것은 왜장들의 리액션 쇼트라고 위에서 언급했다. 전투의 흐름이 이순신 장군 쪽으로 기울자 백성들의표정이 편집의 맥락에 적극적으로 끼어들기 시작한다. 대장선의 움직임과 백성들의 리액션 쇼트가 결합한 맥락
은, 즉 멀리 떨어진 곳에서 대장선의 움직임을 보고 감탄한 그들의 시선은 영화를 보면서 감탄한 관객의 시선과 동일한 것처럼 보인다. 이 편집 순서는 TV스크린에서 나오는 미리 녹음된 웃음소리의 원리와 비슷하다. 영화 속에 직접 들어갈 수 없는 관객(주체)을 대신해서 디제시스 안의 인물(대상)이 감탄하고, 위기에 빠진 이순신을 그들이‘대신’구해주는 것을 관객은 바라보면서 역사적 강박의식에서 탈출하게 된다. 이때 남은 건 무엇인가? 전투가 시작 할 때까지만 해도 기의 없는 기표에 불과했던 이순신 장군은 영웅이라는 하나의 기호, 그것도 백성의 행동을“천행”처럼 여기는 이상적인 지도자라는 기의를 획득하게 된다.  이처럼 <명량>은 전투장면의 쇼트-리액션 쇼트의 결합으로 기호의 의미를 완성해가는 텍스트이다. 편집의 맥락에서뿐 아니라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더 나아가 자신의 욕망을 스크린 속으로 안전하게 투사함으로써 이상적인 상을 구축하게 만든다. <명량>이 대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이유는 아마도 절망적인 현실을 무의식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바뀌지 않는 현실에 절망하고 새로운 욕망을 스크린 안에서만 찾고 스스로 안도하는 그런 미래의 풍경이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진 것은 아닐까. 피동형의 시대 안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백태현 | 인하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강사

* 그림 설명 및 출처

– 그림 1: (출처: movie.naver.com)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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