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호 인문학술: 포퓰리즘과 정치] 포퓰리즘은 사이비 민주주의다

지난해 국정농단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이 한바탕 뒤집어졌다. 제19대 대선이 더 특별해지는 이유다. 선거에 출마하는 후보들이 결정됐고, 후보들은 자신을 대표하는 공약들을 내세워 선거 유세에 바쁘다. 많은 공약들 중 반드시 시행되어야 할 정책들도 있지만 표심을 얻기 위한 포퓰리즘적 공약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러한 포퓰리즘에 의한 정치, 정책의 결과는 경제를 불안정하게 하여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이에 본보는 포퓰리즘과 정치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nation.com.pk/columns/25-Dec-2016/the-new-popu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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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소화되고 변질된 민주주의를 대중에게 되돌려 줄 것을 약속하고 있다.

 

서론

포퓰리즘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한때 라틴아메리카가 포퓰리즘의 발상지라고 알려졌지만, 최근 들어서는 ‘서구 민주주의’의 본향인 유럽에서 포퓰리즘의 위세가 더 두드러진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는 포퓰리즘에 대한 인상이 좋지 않다. 대체적으로 포퓰리즘을 ‘무책임한 인기 전술’로 치부한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유행어에 빗대어, ‘내가 하면 민주주의, 남이 하면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입에 오르내릴 정도이다. 사실 포퓰리즘의 곤궁한 처지는 그 누구도 선뜻 자신을 포퓰리스트라고 자리매김하려 들지 않는 사실에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포퓰리즘은 결코 간단한 현상이아니다. 현대 사회의 여러 구조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포퓰리즘의 출현을 부추긴다. 더 중요한 것은,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외피(外皮)를 걸치고 있어, 이에 대한 평가가 각자의 이데올로기적 입장과 착종(錯綜)된다는 점이다. 이 글은 우선 포퓰리즘을 정확하게 규정하는 일의 어려움부터 설명하고자 한다. 포퓰리즘을 명확하게 규정할 수만 있다면 포퓰리즘을 둘러싼 논란의 큰 줄기는 극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포퓰리즘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

중요한 사회과학적 개념은 대부분 ‘개념적 모호성’의 굴레에 빠져 있는 듯하다. 홉스는 ‘성직자, 지식인, 정치인’들의 이기심 때문에 개념 혼란이 생긴다고 했고, 니체는 오직 비역사적 존재(ahistorical being)에 대해서만 제대로 된 정의를 내릴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 하더라도 포퓰리즘의 경우는 조금 더 독특하다. 여러 이유가 겹치면서 포퓰리즘을 명확하게 규정하기가 어렵다. 이 글에서는 너무 이질적이고 다종다양한 현상이 모두 포퓰리즘이라는 한 이름으로 불린다는 사실, 그리고 포퓰리즘과 민주주의를 명쾌하게 분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 포퓰리즘에 대한 이해를 더욱 어렵게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많은 사람들이 1870년대 러시아에서 전개된 ‘인민 속으로 (V narod)’운동과 1892년에 창당된 미국의 ‘인민당(People’s Party)’을 포퓰리즘의 기원으로 꼽는다. 또 아르헨티나의 페론주의 등 포퓰리즘의 대표적인 사례에 대해서도 대부분 의견을 같이한다. 그렇다면 포퓰리즘이라는 정치 현상의 개념과 성격에 관해 연구자들 사이에 일정 부분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아도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포퓰리즘이라는 이름 아래 너무나 많은, 그리고 이질적인 대상이 모두 포괄되고 있기 때문에 포퓰리즘이 무엇이고 그 특성은 어떤 것인지 생각이 모아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미국에서는 사회의 저소득 계층을 겨냥한 좌파 성향의 노선은 물론, 무엇인가 ‘남다르고, 꾸미지 않아 수수한 것, 그래서 일반 서민의 감각과 건실한 노동자 대중의 정서’를 담고 있다 싶은 것에 곧잘 ‘포퓰리즘’을 갖다 붙인다. 오늘날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데 대한 책임의 상당 부분을 미국이 져야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결국 포퓰리즘 이론의 대표 주자라 할 수 있는 캐노번(Margaret Canovan)은 전 세계의 포퓰리즘을 분석해본 결과, 일곱 가지 이질적인 정치 운동(19세기 말 러시아의 ‘인민속으로’운동과 미국의 농민 급진주의, 페론의 포퓰리스트 독재, 스위스의 직접민주주의 운동을 위시한 포퓰리스트 민주주의 등)이 전부 포퓰리즘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 포괄되고 있음을 확인했다. 이런 분석 끝에 캐노번은 포퓰리즘이라고 알려진 현상들을 함께 담을 일관된 이론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캐노번뿐만이 아니다. 1967년, 관련 학자 43명이 영국 런던에 모여 포퓰리즘에 관한 일반 이론을 정립하려 했지만 끝내 그 뜻을 이룰 수 없었다. 그 후에도 사정은 바뀌지 않았다. 오늘날 학자들 사이에서는 포퓰리즘에 관한 합의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합의가 이루어지고 있을 뿐이다.

1) 인민주권론
그러나 이 글은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포퓰리즘이라는 말의 원칙 없는 남용과 그에 따른 개념 정의의 어려움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보다 명확한 개념 규정이 이루어져야 포퓰리즘을 둘러싼 불필요한 오해와 혼란이 불식될 수 있다. 이 글은 ‘인민에 대한 호소’와 ‘선동적 대중정치’라는 양대 특징을 통해 포퓰리즘을 규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왜 그런가?

포퓰리즘 연구의 기틀을 닦은 실스(Edward Shils)는 엘리트-대중의 대립적 관계가 포퓰리즘의 본질을 구성한다면서 “기득권 지배 계급이 만들어낸 기성 질서에 대한 인민의 분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포퓰리즘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저항(oppositionalism)이야말로 포퓰리즘의 기본성격이 된다고 결론 내렸다. 이런 실스의 입장은 향후 포퓰리즘 연구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포퓰리즘의 개념을 뚜렷하게 정의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연구자들도 ‘인민에 대한 호소(appeal to the people)’가 포퓰리즘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캐노번은 포퓰리스트들이 ‘인민에 대한 호소’와 지배 세력에 대한 불신을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것을 적시(摘示)했다. 라클라우(Ernesto Laclau)는 항상 인민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 연장선상에서 지배자에 대해 적대감을 품도록 조장하는 것을 포퓰리즘의 가장 큰 특징으로 꼽았다. 이들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들이 포퓰리즘을 “사회가 적대적인 두 개의 진영, 즉 ‘순수한 인민’대 ‘타락한 엘리트’로 양분되어 있다는 인식 아래, 정치란 곧 인민의 일반의지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데올로기”로 이해한다. 한마디로 ‘인민을 위하고,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모든 포퓰리즘의 공통점인 것이다.

이처럼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은 ‘인민주권론’또는 ‘인민주권의 회복’을 표방함으로써 대중의 지지를 확보하려 한다. 민주주의의 진정한 사도(使徒)를 자처하는 것이 포퓰리즘의 생명선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2) 반이성적 선동 정치
포퓰리스트들의 선언적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그들이야말로 둘도 없는 민주주의자이다. 그러나 이것은 진실과 거리가 멀다. 포퓰리즘의 민낯은 그 주장보다 정치 행태(form)를 통해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것의 독특한 정치적 스타일을 주목해야 한다.

포퓰리즘이 결정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포퓰리스트 정치인들이 허황된 방법으로 ‘인민주권 회복’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고 단순 논리를 확산시킨다. 대중의 이성적 판단을 흐리게 만들어 대중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이야말로 포퓰리즘의 가장 뚜렷한 특징이 아닐 수 없다.

(1) 이분법 적대정치

포퓰리즘은 ‘정치적 이원론(political dualism)’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모든 존재는 적 아니면 동지이다. 그 중간 단계는 없다. 포퓰리스트들은 인민을 순수의 화신, 천사와 같은 존재로 미화한다. 반면, 인민을 억압하는 지배 계급은 상종할 수 없는 악질로 규정해버린다. ‘타락한 엘리트’가 만악(萬惡)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인민에 대한 호소를 지배 엘리트에 대한 반감으로 연결시키는 것이 포퓰리즘의 기본 동력이 된다.

포퓰리스트 선동가들이 나라 안팎의 문제와 관련해 ‘희생양’ 또는 ‘원흉’을 즐겨 지목하는 것도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다. 유럽의 우익 포퓰리스트들은 민족주의를 앞세워 반외국인 정서를 부추긴다. 특히 외국에서 온 이민 노동자들이 대표적인 표적이 된다. 배타적·국수주의적 적개심을 숨기지 않는다. 포퓰리스트들은 “우리와 같지 않은 외국인”에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전술을 자주 구사한다.

그들은 정치적 이슈도 단순 이분화한다. 정치 세계를 적대적인 둘로 나누듯이, 모든 정치 담론을 자신들이 찬성하는 것과 반대하는 것, 좋은 것과 나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대립시켜 구획함으로써 전선(戰線)을 명확히 하는 것이다.

(2) 단순 정치
포퓰리스트들은 ‘단순 정치(politics of simplicity)’를 기본 전략으로 삼는다. 정치라는 것이 보통 사람의 지혜를 구현해야 한다면, 그 모습은 단순하고 직접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복잡하고 어려운 말을 싫어한다. 전문용어는 보통 사람의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기득권 계급의 술수라고 강변한다. 단순하고 명료한 것이야말로 인민의 표상이요, 미덕이라는 것이다. 언어만 단순하고 직접적인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정치를 바라보는 관점과 분석 틀, 나아가 문제를 풀어나가는 대안까지도 단순, 명쾌하다. 보통 사람의 상식에 입각한 문제 해결을 추구한다.
이분법적 세계관과 단순 정치가 조합을 이루게 되면 정치적 현안에 관한 토론이나 담론 자체도 단순 이분법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복잡하고 어려운 논리는 지배계급의 음모로 배척된다. 포퓰리스트들은 곧잘 세금 반대 운동을 전개한다. 세금을 생산 현장에서 땀 흘리는 시민들의 돈을 빼앗아가기 위한 지배계급의 음모의 산물로 규정해버린다. 그러면서 세금을 거둘 수밖에 없는 현실적 필요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논리적 도전에 대해서는 대응을 거부한다. 외국인 배척 운동도 마찬가지다. 새로운 이민을 금지하자고 역설하지만, 이민을 받지않을 수 없는 정치적·경제적 상황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외면한다.
이처럼 포퓰리스트들은 문제를 의식적으로 단순화한다. 간단명료하게 정리해버린다. 이것이 포퓰리즘의 매력이고, 일정 수준 성공을 거두게 되는 기본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 일이 그렇게 간단할 수가 없다. 포퓰리스트들이 권력을 잡고 세상의 복잡성 앞에 나서면 할 말을 잃고 말 것이다. 포퓰리스트 선동정치가 힘을 얻는 곳에서는 합리적 사유와 건전한 상식이 뿌리내리기 힘들다. 이성적 토론이 전제되어야 민주주의가 살아남을 수 있다. 포퓰리즘은 이것을 부정한다.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기본 조건을 훼손하는 것이다.

(3) 엘리트주의
포퓰리즘은 인민이 주인 되는 세상을 약속한다. 인민을 괴롭히는 기득권 계층을 타파하는 것이 포퓰리즘의 제1 존재이유다. 그러나 유럽 등 현실 정치에서 목격되는 포퓰리스트 운동은 이런 꿈을 정면 배반하고 있다. 포퓰리즘의 지지자들은 스스로 주인 되기를 포기하고 있다. 그들은 지도자를 원한다. 자기 일을 대신 나서서 해결해줄 사람을 찾는다. 자신을 돌보아주고 책임져줄‘자애로운 아버지’같은 지도자를 대망한다.
결국 포퓰리스트 정치 현장에서도 인민 대중은 정치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포퓰리즘이라는 이름과 걸맞지 않게 인민은 사라지고 특정 지도자가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겉모습과는 달리 엘리트주의가 포퓰리즘의 숨은 본질이다. 라클라우는 단도직입적으로 포퓰리즘을 엘리트 이데올로기라고 규정한다. 지배 계급의 일파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싶지만 여의치 않을 때 대중을 향해 직접 호소하는 전술이 바로 포퓰리즘이라는 것이다.

민주주의의‘그림자’?

1) 그림자론
따라서 이 글은 ‘인민주권의 회복’을 표방하지만, 그 정치적 실체는 반이성적 선동 정치를 벗어나지 못하는 대중영합적 정치운동을 포퓰리즘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정의(定義)에 따르면 포퓰리즘은 한 마디로 극복의 대상이다. 그러나 포퓰리즘에 대한 우호적 시각도 엄연히 존재한다. 제3세계 지식인 중에는 포퓰리즘의 민족주의적, 반제국주의 노선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는 것 그 자체가 포퓰리즘’이라는 말도 나온다.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내재적 한계에 대한 본질적 반응, 나아가 하나의 도전으로 바라보는 관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캐노번은 포퓰리즘을 민주주의 사회의 병리적 현상으로 간주하는 통설에 반기를 들며, 포퓰리즘을 민주주의의 불완전함을 드러내주는 일종의 ‘그림자(shadow)’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맥락에서 보비오(Norberto Bobbio)는 민주주의의 ‘약속 불이행(broken promises)’, 즉 민주주의의 한계 또는 실패를, 다렌도르프(Ralf Dahrendorf)는 민주주의의 ‘결핍’과 민주적 제도의 ‘빈틈’이 포퓰리즘이라는 세균이 번식하는 온상지가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조금 각도는 다르지만, 알디티(Benjamin Arditi)는 ‘정상적’민주정치와 ‘비정상적’포퓰리스트 정치를 엄밀하게 구분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알디티는 포퓰리즘을 ‘나쁜 민주주의’로 규정했다. 민주주의에 속하기는 하지만, 어디까지나 민주주의의 ‘변방(edge)’또는 ‘주변부(periphery)’라는 것이다.

2) 비판
그러나 이 글은 그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의 한계에 대한 고민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동안 다양한 이론적, 실천적 노력이 경주되어 나왔다. 포퓰리즘은 그 중 하나의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바람직하지 못한 대안’에 불과하다. ‘그림자론’은 자칫 포퓰리즘이 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정당한 대안인 것 같은 인상을 줄 수 있다. 알디티의 주장은 상대적으로 더 설득력이 있지만, 포퓰리스트들의 ‘대외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드러낸다. 그들의 ‘말 따로, 행동 따로’를 직시하고, 실제 행태와 정책을 분석해야 문제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포퓰리스트들은 ‘민주주의의 회복’을 다짐한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 속에는 민주주의를 위태롭게 하는 요소가 있다. 그들의 실제 정치 행태는 더 큰 문제를 낳고 있다. 반이성적 선동정치를 일삼기 때문이다. 선동이 있는 곳에서는 민주주의가 살 수 없다. 맨스필드(Harvey Mansfield)는 포퓰리스트들의 단순화 공작에 대해 정면 반박을 가한다. 그에 따르면, 숙고(deliberate)한다는 것은 ‘천천히’를 전제한다. 그리고 그런 행위는 ‘주의 깊고 이성적인’삶의 태도를 요구한다. 사람이 조급하게 서둘다보면 이성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이 글은 이런 이유에서 포퓰리즘과 인민 민주주의 (populistic democracy)를 구분한다. 루소 등 참여 민주주의자들은 대의 민주주의를 엘리트 중심주의로 비판하면서 인민의 적극적인 직접참여를 옹호한다. 이런 인민 민주주의론은 ‘민주주의’를 둘러싼 수준 높은 철학적 논쟁을 자아낸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작지 않다. 포퓰리즘이 인민주권의 회복을 제일의적으로 내세우기 때문에 인민 민주주의와 어느 정도 겹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실체는 반민주적이다. 따라서 포퓰리즘과 인민 민주주의를 구분하지 못 하는 것이 포퓰리즘을 둘러싼 논란의 큰 원인이 된다.

결론

포퓰리스트들은 보통 사람들의 애환을 부각시켜주고, 사회적으로 배제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유도한다. 서구 민주주의, 특히 대의제 민주주의를 ‘가짜 민주주의’라고 공격하며 ‘민주주의 회복’을 주창한다. 왜소화되고 변질된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인민에게 되돌려 줄 것을 약속한다. 엘리트 민주주의가 빚어낸 문제점들을 해결하겠다고 나선다는 점에서 포퓰리즘을 범상하게 볼 일이 아닌 것이다. 민주주의가 허점을 보이면 보일수록 포퓰리스트들의 활동 공간은 넓을 수밖에 없
다. 포퓰리즘과 더불어 사는 것이 민주주의 국가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포퓰리즘이라는 말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민주화가 진행되고 특히 김대중 정부 이후, 일부 좌파 성향을 띤 것으로 평가되는 정책이 추진된 것과 맞물려 포퓰리즘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이 글과 관
련해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한국의 모든 정당이 다양한 방법으로 ‘대중영합’을 도모한다는 점이다. 본질은 그대로인데, 1년이 멀다 하고 정당의 이름을 바꾼다든지, 선거철만 되면 실체도 없는 ‘새정치’를 내세워 유권자를 현혹하는 것은 ‘반
이성적 선동정치’의 또 다른 모습이라고 보아야 마땅하다. 재원(財源)도 없는데 복지 공약을 남발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런 대중영합적 포퓰리즘을 극복하자면 성숙한 시민의식, 양심적이고 유능한 정치인의 조합이 필수적이다. 시민
단체와 언론이 거짓 민주주의의 횡행을 얼마나 막아줄 수 있을지 걱정이다.

서 병 훈 / 숭실대학교 정치학과 교수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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