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호 영화비평: <어느날>(2016)] 죽을 권리를 외치는 영화의 수상한 화법

 <어느날>(이윤기, 2016)은 사랑하는 아내 선화(임화영)를 잃고 실의에 빠져 있는 보험회사 과장 강수(김남길)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그는 집안 곳곳에 산적해 있는 선화의 물건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으며, 장모님이 가져다 준 김치를 한 입 베어 먹으며 아내와 함께 행복하게 지냈던 시간을 떠올리기도 한다. 그런 강수가 회사로 복귀하자 팀장은 그에게 교통사고로 혼수상태에 빠진 미소(천우희)와 대리인을 만나보라고 지시한다. 시각장애인에다가 고아인 미소에게 지급되는 보험금을 중단할 꼬투리를 찾기 위해서다. 병원에 도착한 강수는 병상에 누워있는 미소를 보고 병마와 힘겹게 씨름하던 자신의 아내를 순간적으로 떠올리는데, 바로 그 순간 그의 눈앞에 또 다른 미소가 등장한다. 식물인간 상태인 몸에서 빠져나온 미소의 혼(魂)이다. 병상에 누워 있는 몸에서 빠져나온 또 다른 미소는 강수의 눈에만 보이며, 평생 안고 있었던 시각장애도 사라진 상태이다. 미소의 모습에서 선화를 떠올린 강수는 보험회사 직원으로서 할 일도 잊고 미소의 세상구경을 돕기 시작한다.

221-08-01

ⓒmovie.naver.com

상실된 타자로부터 벗어나기

영화의 전반부는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경험하게 된 미소와 그 여정을 옆에서 도와주는 강수의 모습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미소는 강수의 도움으로 시내를 돌아다니며 말로만 듣던 전철과 오토바이를 처음으로 보게 되며 시장의 풍경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된다. 모든 걸 신기해하는 미소를 옆에서 지켜보던 강수는 아내와 데이트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된다. 강수가 미소를 보고 죽은 아내를 떠올리는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미소를 처음 봤을때부터 아내를 연상했으며, 이후 미소의 상태가 급격히 나빠졌을 때도 선화가 응급실로 실려왔을 때를 떠올린다. 이처럼 영화는 계속해서 미소의 모습 위에 선화의 모습을 덧칠한다. 강수가 아직까지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염두에 둔다면 이 방식은 강수의 죽은 아내, 즉 상실된 타자를 향한 애도 작업과 상관성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강수가 아내를 잊지 못한 까닭은 긴 투병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선화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강수는 사랑하는 이의‘상실’에 대한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선화를 떠나보낸 것이다.

강수와 미소의 여정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프로이트의 애도를 끌어올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애도는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에 대한 반응 혹은 그 자리에 대체될 만한 추상적인 것의 상실에 대한 반응을 말한다. 프로이트는 상실 이후의 반응에 대해서 주목했는데, 이것은 대상을 향했던 리비도가 정착할 곳을 잃고 부유하는 것이다. 대상을 향했던 리비도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애도와 우울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애도는 자아가 대상의 죽음을 수용하고 부재를 인식하는 반응, 즉 죽은 대상을 포기하는 문제다. 상실된 대상의 자리를 메우려 다른 대상으로 리비도를 이동시키거나 부재 그 자체를 자아 안에 삼켜버리는 방법 등이 있다. 우울은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상태이다. 무엇이 없는지, 무엇을 상실했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상실감에 빠지게된다. 상실된 외부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리비도는 자아를 향하게 된다. 이것이 우울증 환자가 자아의 공허함에 빠지는 이유라고 프로이트는 말하고 있다.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 볼 때, 강수의 행위는 애도 작업의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선화의 자리를 대신한 미소의 어머니를 찾아주려 애쓰고 있기 때문이다. 한시적으로 부유해 있던 강수의 리비도가 새로운 대상인 미소에게 정착한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미소와 어머니와의 만남일 것이고 서사는 그렇게 흘러간다. 여기서 놓치기 쉬운 것은 이 여정이 오로지 미소만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미소를 볼 때마다 선화를 떠올렸던 강수 역시 선화와의 정산이 끝나지 않았음을 깨닫고 자신만의 여정을 시작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강수가 미소의 어머니를 만난 후 선화가 사용하던 작업실 문을 처음으로 열어보는 장면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강수가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잊지 못하고 있던 상처와 다시 대면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한편 미소는 애타게 찾았던 자신의 어머니(정선경)의 형편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과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단순한 대상화가 가지는 위험성

그런데 중반부가 지날수록 영화는 상실된 타자를 잊지 못하는 강수의 모습과 함께 남은 이들의 사정에 대해서 보여주기 시작한다. 애도 작업의 선로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병원의 풍경을 보여주는 장면을 잠시 살펴보자. 미소와 같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두용(윤제문)은 속칭 ‘나이롱 환자’이다. 병원에서 지내고 있지만 아침마다 스쿠터를 타고 어디론가 향한다. 강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험금만 받는 그를 못마땅하게 생각하지만, 그가 자신의 아들 입원비를 위해 배달과 공사장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부터 다른 시선으로 두용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미소 어머니의 사정도 마찬가지다. 형편이 좋지 않지만, 그는 딸을 버렸다는 죄책감에 미소의 마지막을 함께 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교통사고의 가해자가 제시한 합의도 마다하고 식물인간인 미소의 옆자리를 지키기 시작한다. 몸에서 빠져나온 미소는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눈물짓기 시작하고 강수에게 “사랑하는 사람들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줄여주고 싶다, 더 힘들기 전에 떠날 수 있게 해 달라”며 결정하기 힘든 부탁을 건넨다.

이것은 앞서 말했던 미소의 모습에 선화의 모습을 덧씌우는 방식으로 극화된다. 영화는 플래시백으로 강수의 사정에 대해서 자세하게 펼쳐놓기 시작하는데, 그 장면은 미소가 강수의 옆에서 듣고 있는 모습과 함께 교차된다. 그런 다음 미소는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고 말한다. 이어지는 장면은 슬퍼하는 강수의 모습인데 그의 앞에 있는 미소는 어느새 선화로 바뀐 상태이다. 선화는 슬퍼하는 강수에게 “미안해, 조금이라도 좋은 모습일 때 떠나고 싶었다”며 스스로의 죽음을 선택했던 심정에 대해서 고백한다. 화면이 바뀌면 프레임 안의 미소와 선화는 어느새 사라지고, 카메라는 강수가 혼자서 슬퍼하는 모습을 풀 쇼트로 포착한다. 이어지는 장면은 늦은 밤 홀로 미소의 병실을 찾은 강수의 모습이다. 여기서 강수는 미소의 생명유지 장치를 끄고 병원을 빠져나간다. 애도 작업의 과정을 걸었던 영화가 존엄사의 문제를 끌어오는 순간이다.

문제는 이 영화가 존엄사를 대하는 태도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글이 존엄사의 가치에 대해서 논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 아직 논쟁 중이며 여러 가치가 복합적으로 연결되어 쉽게 판단을 내릴만한 사안도 아니다. 지적하고 싶은 것은 이 영화가 존엄사 문제를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형식이다. 이 영화가 롱 쇼트와 색채, 그리고 배경음악을 중요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강수가 선택하기 전에 고민하던 순간이 가장 대표적이다. 영화는 고민에 빠진 강수를 롱 쇼트로 포착한 다음 파란색 조명과 감미로운 선율의 사운드를 덧대기 시작한다. 말하자면 존엄사를 윤리적이고 사회적 차원이 아닌 감정적인 차원의 것으로 대하는 것이다.

왜 영화는 이성적인 고민 대신 감정적인 차원으로 이 문제를 돌파하려고 했을까? 그것은 단지 주인공에 대한 관객의 감정이입을 끌어오기 위한 장치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사회적 가치는 문제와 갈등을 치열하게 고민한 끝에 조금씩 나아가는 것이지 감정적인 차원에서만 작동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영화가 문제 제기한 자본주의적 구조의 한계와 생명에 대한 윤리적 고민도 따르기 마련이다. 또한 이 영화가 존엄사의 대상 인물, 그러니까 선화와 미소를 젊은 여성으로 선택한 것도 생각해 봐야 한다. 강수의 트라우마를 치유해주는 것은 여성이며, 그들이 죽음을 선택한 이유 중 하나는 ‘남은 이들에게 좋은 기억을 주고 싶어서’이다. 영화에서 좋은 기억이라는 것은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는 선화와 미소가 가장 예쁘고 건강했던 모습들이다. 이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삶과 죽음의 문제에 큰 관심이 없다는 증거이다. 카메라는 그들을 생명의 가치를 가진 인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남은 이들, 즉 타자의 대상으로만 취급하고 있다. 존엄사는 사회와 함께 고민해야 할 문제인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그 문제를 감정적이고 단순화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서는 안 될 것이다.

백 태 현 / 인하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강사

작성자: khug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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